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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드형 May 16. 2021

찌질한 남자의 반성문

<태풍이 지나가고>

5월인데도 벌써 여름같이 덥다고 투덜댄 걸 들었는지...

주말 내내 하늘이 시원한 비를 뿌린다. 


마침 어제 퇴근길에 사 온 막걸리가 냉장고에서 최적의 온도로 대기 중이라, 아내를 졸랐더니 며칠 전 아들 구워주고 두 덩이 남은 삼겹살을 김치와 구워 훌륭한 안주로 내온다. 이제 느긋하게 영화 하나만 더하면 완전 내 세상이다.


여러 번 본 영화지만 믿고 볼 수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태풍은 지나가고>골라냈다.


그가 만든 작품들 대부분은 가족 이야기가 많은데,

다큐 감독 출신답게 그 주제를 아주 사실적이고 디테일하게 담아낸다. 이 영화 역시 한 가족의 아들이자 가장인, 그러나 작가로서 실패한 남자가 얼마나 찌질할 수 있는지를 너무도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은 데뷔 때 작은 상을 받은 후

15년 동안 소설을 전혀 쓰지 못하고 곧 오십을 앞둔 작가다.

이혼한 전처와 아들, 그리고 도쿄 교외의 연립 아파트에서 혼자 사는 어머니, 이렇게 4명이 태풍이 몰아치는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는 내용이다.


책도 그렇지만, 이미 본 영화를 다시 볼 때

새롭게 발견하는 재미가 솔솔 한데 2개 장면이 그랬다.


장면 1 : 귤나무에 대한 母子간 대화 (태풍 전)


 소재를 얻는다는 핑계로 흥신소 직원이 되어 불륜 부부 뒷조사나 하며 월세와 양육비를 버는 료타(아베 히로시).

마저 도박, 복권으로 날리고 아버지 유품  돈 되는 것을 찾으러 어머니 요시코(키키 키린) 집을 찾아온다.


40년 버틴 허름한 아파트 베란다에서 대기만성형이라 믿는 철부지 아들에게 엄마는 능청스럽게 뼈 때리는 말을 던진다. 

찌질한 아들과 귀여운 엄마의 대화
모 : 이 귤나무 기억하니?
자 : 고등학교 때 내가 귤 씨 심은 거네. 엄청 자랐구나.
모 : 꽃도 열매도 안 생기지만,
       너라고 생각하고 날마다 물 주고 있어.
자 : 말씀 얄밉게도 하시네.
모 : 그래도 애벌레가 이 잎을 먹고 자랐단다.
       나중엔 나비가 됐어.
       꼬물꼬물 하더니 파란 문양 나비가 됐지...
       나중에 사진 보여줄게.
자 : 안 봐도 돼.
모 : 어쨌든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고 있어.
자 : 저기 말이야. 나도 세상에 도움은 되고 있어...


그러고 나서,

태풍이 오기 전 화분을 옮겨달라는 어머니 부탁에 아들은 식은 죽 먹기라며 큰소리치다 결국 베란다 창을 깬다.


장면 2 : 태풍이 지나간 다음날 아침 출근길


비바람이 휘몰아치던 전날 밤,

주인공 료타는 전처인 쿄코, 아들 싱고와 함께 어머니 요시코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같이 묵게 된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못 버린 그에게 이미 다른 사람과 재혼을 결심한 쿄코는 "그러게, 같이 살 때 좀 잘하지 그랬어"라고 선을 긋는다.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는 료타에게 더 이상 미련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한밤중에 잠에서 깬 아들 싱고와 집 앞 놀이터 미끄럼틀 안으로 들어간 료타는 어릴 적 추억의 공간인 그곳에서 진정한 어른에 대해 子간의 대화를 나눈다.


자 : 아빠는 어떤 어른이 되고 싶었어?
       되고 싶은 어른이 됐어?
부 : 아빠는 아직 되지 못했어.
       하지만 되고 못되고는 문제가 아냐.
       중요한 건
       그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거지.


잠시 후, 두 사람을 찾으러 나온 쿄코가 합류하면서 그 좁은 미끄럼틀 안에서 세 사람은 잠시 과거 포근했던 가족이란 느낌을 공유한다.


다음날 아침

마치 지난밤 태풍에 과거의 미련과 집착도 함께 실려 지나가 버렸다는 듯, 맑게 개인 날씨처럼 그들은 밝은 표정으로 베란다에 배웅 나온 어머니와 인사하며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과거에서 벗어나 다시 각자 삶으로...

영화는 앤딩 OST '심호흡'이 흐르며 여운을 남긴다.


꿈꾸는 미래가 어떤 것이었던

Hello, again

내일의 나

놓아버릴 수 없으니까

한 걸음만 앞으로

또 한 걸음만 앞으로...




대기만성(器晩成).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좋은 뜻이지만,

어쩜 나태한 자신에 대한 변명이나

잘 안 풀리는 타인에 대한 위로의 말로 용 또는 과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커다란 얼음을 담기 위해

넓은 접시를 만들었는데

담으려고 보니 물로 변해 오히려 깊은 병이 필요할 수 있듯이

일상의 현실에 계속 발을 딛지 않고 꿈만 꾸는 인생은

본인 자신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주기 마련이다.


료타의 전처 쿄코처럼 여자들은 가짜 대기만성형 남자들(막연히 큰 꿈만 좇다가 현실의 소소한 행복을 놓치고 찌질해질 가능성이 높은)을 이미 아는 것 같다.


요즘 가끔 설거지를 해보니 나도 알겠다.

큰 그릇들은 집에 손님이 오지 않는 이상 거의 쓰지 않아 보통 싱크대 맨 위 구석에 처박혀있고

어쩌다 사용하면 씻거나 닦기 참 힘들다는 것을...


남자들이여

작더라도, 내가 원하는 모양이 아니라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담을 수 있는 쓰임새 있는 그릇이 되어 봅시다.


태풍이 지나가고 후회하지 말고...


P.S.

만약 이 영화 후속 편을 만든다면

료타가 소설을 다시  작가로 꼭 성공했으면 좋겠다.

나 역시 아직도 대기만성을 믿고 싶은 찌질한 남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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