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도 마찬가지다. 늘 보던 뻔한 로맨틱 코미디나 액션 블록버스터보단 신선한 독립영화 한 편이 눈에 들어온다.
<남매의 여름밤>.
제목부터가오래 잊었던 어린 시절 향수를 자극하는 이 영화는 장르 자체가 그렇듯 대단히 섬세하고 현실적이다.
사춘기 누나 옥주와 철부지 남동생 동주가할아버지 집에서 보낸 특별했던 어느 여름날을 가족의 평범한 일상으로 참 덤덤하게도 그려낸다.
이 영화에는 옥주와 동주 외에도 또 다른 남매가 나온다. 바로 아빠와 고모다. 그래서 여름밤의 주인공은 어린 남매일 수도 어른 남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자식과 손주인 두 남매들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시선과 마음이 더 잘 보였다. 영화 내내 대사나 표정이 거의 없는 그가 왠지 주인공일 거란발칙한 상상으로 가장 인상적인 여름밤 몇 장면을 소개한다.
여름밤 #1
어린 남매 옥주와 동주는 아빠와 살던 반지하 빌라가 재개발되면서할아버지가혼자 살고 있는 2층 양옥집으로 들어온다. 아빠는 엄마와 이혼 후 사업까지 망해 지금은 짝퉁 브랜드 신발을 다마스 차를 타고 다니며 판다. 애들 여름방학 동안만 잠깐 와 있을 거라 했지만 할아버지가 모를까?그냥 눌러 살 작정으로 아예 이사 왔다는 것을...
얼마 있으니 부부싸움을 하고 집 나온 고모도 짐을 싸들고들어온다. 조용하고 서먹서먹했던 집안 분위기가 살아나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할아버지 생일날 저녁, 모두 모여 케이크를 자르고 아빠가스마트폰 사준다는 말에 혹한 동주는 재롱까지 부린다. 이 순간만은 각자의 근심을 잊고 모두가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챙모자 속 할아버지의 그늘진 얼굴에서 마지막 생일잔치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살짝 읽힌다.
여름밤 #2
새벽에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잠을 깬 옥주가 계단을 내려오다 컴컴한 거실 소파에 앉아 맥주 안주 삼아 가만히 노래를 듣고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한다. 방해하지 않기로 한 듯위층으로돌아가던 옥주는 생각을 바꿔 계단에 주저앉아 함께 듣는다. 자신의 애청곡을손녀도 듣고 있다는 걸 아는지 할아버지 얼굴에미소가 번진다.
두 사람이 교감하는 그 순간, 그 공간에서 쓸쓸하게 흐르던노래는 신중현이 만들고 장현이 부른 <미련>이다.
내 마음이 가는 그곳에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갈 수 없는 먼 곳이기에
그리움만 더하는 사람...
늙고 병들어 이제 남은 시간도 얼마 없는 할아버지가 무슨 미련이 있으랴. 다만 마지막으로 누려보는낭만이 아닐까?
여름밤 #3
한밤중, 어른 남매인 아빠와 고모는 할아버지 집 앞 슈퍼에 앉아 유산 처리 문제로 신경전을 벌인다. 고모는 그동안 사업한다고 할아버지 돈을 수시로 가져다 쓴 아빠에게 집까지 혼자 욕심내면 안 된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알겠다며 얼렁뚱땅 넘어가는 아빠. 돈 앞에서 사람은 왜 이리 치사해질까...
두 사람은 이후 본격적으로 양로원을 보러 다니고 할아버지의 이층 양옥집을 내놓는다. 고모가 할아버지를 데리고 나간 후 집 보러 온 사람을 안내하는 아빠를 향해 옥주는 화를 낸다. "이건 아니지..."
며칠 후,할아버지가갑자기위독해져응급차에 실려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다. 아빠와 고모는이제 불효를 저지르고 않아도 된다.할아버지는자식들이 미안해할 그 상황이 너무 싫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