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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드형 Jul 19. 2021

사랑은 순간이고 망각은 세월이다

<남매의 여름밤>

짧은 장마가 끝나고 연일 폭염이 한창이다.

이런 날씨엔 입맛도 없어 밥보단 시원한 맥주 한잔이나 매콤한 비빔 국수가 더 당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늘 보던 뻔한 로맨틱 코미디나 액션 블록버스터보단 신선한 독립영화 한 편이 눈에 들어온다.


<남매의 여름밤>.

제목부터가 오래 잊었던 어린 시절 향수를 자극하는 이 영화는 장르 자체가 그렇듯 대단히 섬세하고 현실적이다.

사춘기 누나 옥주와 철부지 남동생 동주가 할아버지 집에서 보낸 특별했던 어느 여름날을 가족의 평범한 일상으로 참 덤덤하게도 그려낸다.


이 영화에는 옥주와 동주 외에도 또 다른 남매가 나온다. 바로 아빠와 고모다. 그래서 여름밤의 주인공은 어린 남매일 수도 어른 남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자식과 손주인 두 남매들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시선과 마음이 더 잘 보였다. 영화 내내 대사나 표정이 거의 없는 그가 왠지 주인공일 거란 발칙한 상상으로 가장 인상적인 여름밤 몇 장면을 소개한다.





여름밤 #1

어린 남매 옥주와 동주는 아빠와 살던 반지하 빌라가 재개발되면서 할아버지가 혼자 살고 있는 2양옥집으로 들어온다. 아빠는 엄마와 이혼 후 사업까지 망해 지금은 짝퉁 브랜드 신발을 다마스 차를 타고 다니며 판다. 애들 여름방학 동안만 잠깐 와 있을 거라 했지만 할아버지가 모를까? 그냥 눌러 살 작정으로 아예 이사 왔다는 것을...


얼마 있으니 부부싸움을 하고 집 나온 고모도 짐을 싸들고 들어온다. 조용하고 서먹서먹했던 집안 분위기가 살아나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할아버지 생일날 저녁, 모두 모여 케이크를 자르고 아빠가 스마트폰 사준다는 말에 혹한 동주는 재롱까지 부린다. 이 순간만은 각자의 근심을 잊고 모두가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챙모자 속 할아버지의 그늘진 얼굴에서 마지막 생일잔치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살짝 읽힌다.



여름밤 #2

새벽에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잠을 깬 옥주가 계단을 내려오다 컴컴한 거실 소파에 앉아 맥주 안주 삼아 가만히 노래를 듣고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한다. 방해하지 않기로 한 듯 위층으로 돌아가던 옥주는 생각을 바꿔 계단에 주저앉아 함께 듣는다. 자신의 애청곡을 손녀도 듣고 있다는 걸 아는지 할아버지 얼굴에 미소가 번진.


사람이 교감하는 그 순간, 그 공간에서 쓸쓸하게 흐르던 노래는 신중현이 만들고 장현이 부른 <미련>이다.


내 마음이 가는 그곳에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갈 수 없는 먼 곳이기에

그리움만 더하는 사람...


늙고 병들어 이제 남은 시간도 얼마 없는 할아버지가 무슨 미련이 있으랴. 다만 마지막으로 누려보는 낭만이 아닐까?



여름밤 #3

한밤중, 어른 남매인 아빠와 고모는 할아버지 집 앞 슈퍼에 앉아 유산 처리 문제로 신경전을 벌인다. 고모는 그동안 사업한다고 할아버지 돈을 수시로 가져다 쓴 아빠에게 집까지 혼자 욕심내면 안 된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알겠다며 얼렁뚱땅 넘어가는 아빠. 돈 앞에서 사람은 왜 이리 치사해질까...


두 사람은 이후 본격적으로 양로원을 보러 다니고 할아버지의 이층 양옥집을 내놓는다. 고모가 할아버지를 데리고 나간 후 집 보러 온 사람을 안내하는 아빠를 향해 옥주는 화를 낸다. "이건 아니지..."

며칠 후, 할아버지가 갑자기 위독해져 응급차에 실려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다. 아빠고모는 이제 불효를 저지르고 않아도 된다. 할아버지는 자식들이 미안해할 그 상황이 너무 싫었나 보다...  





영화 속 옥주의 티셔츠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Love is short
Forgetting is long


사랑의 시간은 순간처럼 짧지만

그것을 잊는데 걸리는 시간세월처럼 길다.


어린 남매, 옥주와 동주도

어른 남매, 아빠와 고모도

할아버지와 보낸 이 여름밤의 추억은 꽤 오래 남을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 옥주도 알게 되리라

나이가 들면 미련도 그리움도

그저 한여름밤 꿈같이 나른하고 서글픈 낭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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