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위대한 유산 있다구!

부자유친 유럽여행 3일 차

by 본드형
I have a problem


싱크대가 막혔다.


어젯밤 야식을 먹은 뒤 처음 설거지를 했는데

물이 내려가지 않는다.


그냥 둘까 하다 못 참고 결국 배수관을 만지다

물이 쏟아져 그만 바닥이 흥건해져 버렸다.


객실 전화기가 따로 없는 레지던스라

0층(파리에선 1층) 데스크로 내려가 설명해야 하는데

짧은 불어가 걱정부터 드는 순간,


'그래! 사진 찍어가면 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데스크 직원은

내 표정과 사진만으로 금방 상황을 이해하는 듯했고

불어식 떠듬떠듬 영어로 뭐라 하는데

대충 담당자가 출근하면 고쳐주겠다는 눈치다.


급할 땐 역시 '잔머리'가 잘 돈다.




어제는 비가 내렸는데

오늘은 쨍하고 맑은 하늘에다

기온마저 선선해 그야말로 걷기 딱 좋은 날씨다.


우리가 처음 간 곳은 보쥬 광장인데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광장답게 참 고풍스러웠다.


멋들어진 4개 분수대가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물을 뿜고 있는 사이

잔디밭에선 체조하는 건강한 두 남자가 보였고

그 앞에선 아이 둘이 엄마와 모래 놀이에 빠져 있었다.

너무나도 평화롭고 낭만적인 풍경에 취해

아들은 또 스케치북을 꺼내 들었고

나는 천국 같은 장면들을 하나하나 눈에 새겼다.


노천카페에서 에스프레소와 달콤한 크렘 브륄레로

파리지앵 마냥 느긋하게 브런치를 즐긴 후

두 번째로 간 곳은 퐁피두센터였다.


어제 오르세와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너무 많은 그림들을 실컷 본 탓일까...


칸딘스키, 모딜리아니 등 현대미술의 거장들 작품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대신, 5층 테라스에서 한눈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파리 시내의 전경들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와

의자에 기대앉아 한참을 '멍' 때렸다.


전시장 안에서
아이들에게 열심히 작품 설명을 해주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명화를 직접 보며 하는 조기교육은

절대 못 따라 가겠네...


아까 아들 녀석이 중얼거리던 말이

어쩜 맞을지도 모르겠다.


영어 못하는 프랑스 사람들이

세계 어디 가서도 절대 꿀리지 않는 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예술적 유산을 가진

사회의 일원이라는 강한 자부심 때문일 거야.


우린 어떤 위대한 유산을

후손들에게 남겨줄 수 있을까...


당장 떠오르질 않았다.




오후 들어 후끈 달아오른 태양 아래

마레지구 여기저기를 사람들에 치여 돌아다니다

기진맥진해 숙소로 돌아왔다.


아침에 요청한 배수관은 고쳤는지 확인하러

데스크에 잠깐 들렀더니


이십대로 보이는 젊은 여직원이

한국에서 왔냐며 대뜸 자기는 K드라마 팬이고

김밥과 김치 같은 한식도 무척 좋아한다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에

나와 아들 모두 우쭐해져

어깨를 들썩이며 서로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우리도 뭐,
물려줄 유산 있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