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본드형 Mar 23. 2021

IT 컨설턴트가 명품 마케터로 변한 이유

뭔가 도전하는 때가 인생의 터닝포인트다

코로나가 끝나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


요즘,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면서도 불안해하는 질문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인류의 역사가 코로나 前과 後로 나뉠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누구 하나 속시원히 마스크를 언제 벗을 수 있을지, 더구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를 구체적으로 답하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지금이 '터닝포인트'란거다. 터닝포인트란, 어떤 상황이 다른 방향이나 상태로 바뀌는 시점 또는 계기가 된 사건을 의미한다. 누구나 살다 보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찾아오는데 이때 한 도전과 경험들은 이후 삶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돌아보면 내게도 인생의 터닝포인트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지금의 직장인 면세점으로 이직하게 된 계기는 서른 살 중반에 떠난 MBA 유학이었다. 나름 잘 나가던 IT 컨설턴트의 늦깎이 도전은 사실 '개고생'이었다. 이직 당시 연봉과 포지션이 오히려 떨어진 조건이었으니 결과적으로 ROI도 안 나온 투자였다. 하지만 그 시절 경험했던 것들은 "업의 본질과 현장을 알아야 전문가다"라는 평생의 내 직업관으로 남아 결국 명품 마케터로 전직하게 된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스토리는 유학 떠나기 6년 전인 2000년 1월부터 시작한다. 새천년이 시작된 그때, 나는 밀레니엄 베이비를 가진 아빠가 되었고 동시에 잘 다니던 첫 직장에 사표를 냈다.

과거 공기업이었고 당시 철강 유통으로 '갑'의 위치에 있던 P사는 꽤 안정된 직장이었지만, 입사 후 4년 만에 다소 무모해 보이는 첫 번째 이직을 결심한 것이다. 그 계기는 IMF였다. '명퇴'란 말이 처음 나오고 평생직장의 신화가 사라지자 스스로 경쟁력을 가져야 살아남는다는 위기감으로 이직한 두 번째 직장이 ERP 컨설팅으로 막 뜨기 시작하던 외국계 I 사였다. 준공무원 월급쟁이가 경영혁신 전문가로 변신한 것이다.


그 뒤 몇 년 간 컨설턴트 일은 무척 재밌고 매력적이었다. 내가 맡은 직무는 CRM으로 지금은 흔한 용어지만 그땐 국내 처음 소개되는 글로벌 경영기법이었다. 나 또한 처음 접하는 분야였기에 미국 본사에 가서 몇 주간 교육을 받고 돌아왔다. 낮에는 인터뷰와 회의, 자료 조사에 정신없이 보내고 밤새워 보고서를 작성하다 보면 몸이 힘들기도 했지만 고객사의 미래를 바꾼다는 자부심이 더 컸다. 첫 프로젝트에서 좋은 피드백을 받은 이후 여러 고객사들로부터 계속해 계약을 따냈고, 연봉과 직급도 함께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업종이나 기업의 특성에 상관없이 Best Practice를 PPT로 찍어내는 유사 프로젝트만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하나의 히트곡만 평생 불러야 하는 가수 같이 열정은 식고 매너리즘에 빠지기 시작했다. 다시 위기감이 몰려왔고 때마침 맞벌이를 시작한 아내의 격려와 지원으로 결혼 전 포기했던 MBA에 재도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반년 정도 준비 끝에 2006년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겁 없는 도전이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든다.


내가 선택한 MBA 과정은 'International Luxury Brand Management'라는 다소 생소한 프로그램이었다. 미국이 아닌 프랑스의 ESSEC이라는 그랑제꼴에서 운영하는 1년 코스였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2년은 무리였고, Top 스쿨이 아니라면 차별화를 택한다는 전략이기도 했다. 물론 예술의 나라 프랑스에 대한 로망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단기 과정이라 각오는 했지만, 막상 많은 강의와 다양한 발표 그리고 수시로 보는 시험들은 만만치가 않았다. 또한 이와 별도로 명품회사들의 현지 본사 방문, 해외 지사와 공장 견학, 그리고 특정 브랜드와의 프로젝트까지 빡빡한 일정을 한 해 동안 다 소화해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고통은 동기들과 해야 하는 팀 과제였다. 당시 동기들은 17개국 출신 31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거의 여자(남자는 달랑 3명)였고 대부분 나보다 5살 이상 어렸다. 한번 상상해 보시라. 불어는 물론 영어도 유창하지 않은 한국의 토종 남자가, 브랜드에 대한 이해나 로컬 시장에 대한 경험까지 전무한 상태에서, 저마다 살아온 문화와 개성이 천차만별인 여자 동기들과 함께 팀을 이뤄 토론하고 과제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이겠는가?


매번 다른 조합의 동기들과 팀을 꾸릴 때마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거나, 명품도 모르는 멍청이가 되거나, 혹은 모든 걸 따라 하는 예스맨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컨설턴트로 쌓은 자존심 따윈 여지없이 무너졌다. 다행히 홍콩과 상해로 떠난 필드트립 이후 친해진 동기들과 어울리다 보니 영어 대화가 편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과정이 진행될수록 명품이 단지 사치품이 아닌 브랜드라는 인식이 생겼고 이를 글로벌하게 관리하려면 본사뿐 아니라 전 세계 다양한 유통망과 소비자에 대한 통찰이 중요한다는 점도 깨달았다. 이제 뭔가 해볼 만하다 느껴지는 순간, 벌써 1년이 됐고 나는 졸업을 했다.


졸업 후 바로 복직을 했으나 나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 그럴싸한 이론과 논리로 무장했지만 실제 산업과 현장의 경험이 없는 내게 IT 컨설턴트란 직업은 전문가로서 더 이상 경쟁력도 매력도 없었다. 실패하더라도 기획한 것을 직접 실행해보고 그 결과까지 책임지는 현업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세 번째 직장인 면세점으로 두 번째 이직, 10년 넘게 명품 마케팅을 해오고 있다.


사내 정치에 서툴러 임원 승진도 탈락하고 지금은 코로나 이슈로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명퇴 대상자가 되었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도 MBA 같은 힘든 도전과 손해 보는 장사는 앞으로 다시는 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만약 그때 내가 유학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컨설턴트로 잘 나가고 있을까? 물론 임원급 파트너가 되어 억대 연봉을 받고 있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분명한 건 도전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그것보다 휠씬 클 것이다.


터닝포인트는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그때였다는 것을 안다. 또한 누구에게나 유학이 전환점이 되는 건 아닌 것처럼 사람마다 기준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지치고 힘든 상황을 닥쳤을 때 피하지 않고 도전해 정면으로 부딪혀보면 뭔가 남는 게 있다. 그리고 그것이 분명 삶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


나는 MBA 유학이 내 인생의 멋진 터닝포인트였다고 믿는다. 비록 탈모가 올 정도로 개고생을 했으나, 평생 못해 볼 다양한 경험들(명품, 여행, 사람...)을 프랑스라는 멋진 나라에서 했고, 현재 글로벌 Top 면세점에서 신사업, 온라인, CRM 등 많은 프로젝트들을 직접 경험하고, 성공과 실패를 통해 산업과 현장을 아는 진짜 전문가에 더 가까워졌으니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코로나가 끝나길 기다리며 걱정만 말고 뭔가에 한번 도전해보라.

내가 글쓰기를 시작한 것처럼

지금소중한 터닝포인트로 남을 테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