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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삭 Apr 15. 2023

출간 연재-북한 이주민과 함께 삽니다 2

#15 다른 곳에서의 삶

북한 이주민 대학생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영어가 아닐까 싶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는 더더욱 그러했다. 대학이 본격적으로 국제화(?)를 지향할 때라 영어 수업이 교양 필수였고, 토익 성적이 없으면 졸업도 못 했다. 영어와 무관한 전공 수업마저 일정 학점 이상은 영어로 들어야 했다. 그래서 민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한국어로 들어도 알아듣기 힘든 철학 수업을 언젠가는 영어로 들어야하니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정원 외 전형’으로 입학한 북한 이주민은 이 규정에서 예외였는데 민은 그걸 모르고 있었다.) 


대학교에서는 기초부터 배울 수 없었기에 민은 학교 밖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다행히 여러 도움을 받았다. 강남 사교육계에서 유명하다는 어떤 분은 북한 이주민에게 무료 영어과외를 해줬고, 한 유명 어학원은 북한 이주민을 위한 장학금 제도를 따로 운영했다. 나와 달리(?) 성실함이 장점인 민은 열심히 수업을 들었고, 영어 실력을 갈고닦아 중급 회화 정도는 무난히 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번은 탈북청년 영어 말하기 대회에 참가해 본선에 진출하기도 했다. 민의 영어 실력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내심 수상을 기대했지만, 최종 결선에 오르지도 못했다. “다른 참가자들이 그렇게 잘했어?” 내 질문에 민은 이렇게 답했다. “김일성대학 나온 사람 본 적 있어? 난 있어, 이번에. 농부의 아들과는 비교가 안 되더라.” 민은 수상자들의 영어 발음이 네이티브 수준이었다고 했다. 떨어진 게 민망해서 그렇게 말한 건지 진짜로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김일성 종합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왜 한국에 왔지? 보통 그런 사람은 영국이나 미국으로 망명을 가지 않나? 나는 좀 의아했다. 어쨌든 민은 수상을 못 했지만, 대신 다른 기회를 잡았다.  


“어디를 간다고?” 


“영국."


교회에서 진행하는 선교 활동인데 동생이랑 같이 뽑혔다고, 한두 달 정도 영국에서 머물다가 돌아온다고 했다. 선교라니. 그것은 상대를 감정적으로 설득하는 영역이 아닌 가. 신앙심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모두 요구하는 분야일 것 같은데…. 그걸 민이 할 수 있을까? (이때 나는 민이 한다는 선교 활동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 모르는 사람을 붙잡아 이야기를 나누는 줄 알았다.) 그래도 좋은 기회이니 민에게 잘 갔다 오라고 했다.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동생과 같이 가 니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와 민은 한 달 좀 넘게, 짧은 이별을 했다. 매일 보다가 갑자기 못 보니 허전할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대학원 생활 때문에 바쁘기도 했고, 어쩌다 생긴 여유 시간에는 연애 대신 덕질을 했다. 오랜만에 덕질 에 집중해서 그런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민이 돌아왔다. 민은 내게 영국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어느 지역에 가서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말이다. 과일은 싸고 맛있지만, 음식은 짜고 양이 많다고 했다. 한 조각인 줄 알고 여섯 개를 시켰다가 하나가 반 마리라서  배가 터질 뻔했다는, 그런 사소한 일들이었다.


들어보니 말이 선교 활동이지 교회 탐방이 주를 이룬 것  같았다. 시골에 있는 오래된 성은 왜 그렇게 자주 간 건지.  알고 보니 영국의 지역 교회는 한국의 사찰과 비슷했다. 종교적인 장소임과 동시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유산이랄까? 


그렇군, 하고 넘어가려는데 민이 뜬금없이 영국 이민에 관심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이민 제안을 받았다나? 목사가 부족해 수백 년 된 교회들이 방치될 위기라고, 그래서 그곳 사람들이 민에게 영국으로 올 수 없겠냐고 물어봤단다. 고택(古宅) 관리직으로 취업해 영국으로 온 뒤에 목사 안수를 받으라고, 목회자가 되면 교회 중 하나를 맡기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사기꾼인가?’라고 생각했다. 믿을 만한 제안이냐고 묻자 민은 그렇다고 했다.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영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았다. 민이 북한 이주민이라서 건넨 제안이었겠지. (자유민주주의 국가 에서 살게 된 북한 이주민의 이야기는 동서를 막론하고 인기가 많다. 다만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만 들려줘야 한다….)


영국 이민? 솔직히 말해서 혹했다. 당시 한국에선, 아니 북한 이주민 사이에선 ‘재망명’이 화제였다. ‘한국에서 북한 이주민 차별을 받느니 차라리 영미권에서 아시안 차별을 받는 게 낫다.’는 여론이 있었다고 할까.  난민인 탈북자와 달리 북한 이주민은 한국 국적을 취득한 시민이기에 사실 망명을 신청할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겪은 차별도 망명 사유가 된다면 가능하겠지만…. 그런데도 적지 않은 북한 이주민이 자신의 신분을 은폐하며 재망명을 시도했고, 가끔은 성공했다고 한다. (역시나 소문으로 전해졌다.) 


나 또한 민과 함께 지내면서 북한 이주민을 향한 한국 사회의 불편한 시선과 차별을 간접적으로 경험했기에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차별받는다면, 사회적 소수자성을 가장 비싼 값(?)에 팔아 밥그릇이라도 챙기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나와 민은 그 제안을 해프닝으로 여기며 떠나보냈다. 왜 그랬냐고? 첫째는 다른 사람이 한 제안을 철석같이 믿기에는 나는 의심과 불신의 아이콘(!)이었으며, 둘째는 목회자가 사전적 의미의 ‘직업’이라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목회자란 직업은 생계만으로는 논할 수는 없는 더 복잡한 무언가가 있으니까. 


그리고 나도 문제였다. 설령 민이 목회자가 되어 지역 교회를 맡게 된다고 할지라도, 내 직업까지 해결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막상 가면 뭐라도 하겠지만, 당시 나는 영국에서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나의 원픽은 중화권이라는 걸 잊지 말자.) 또 언어 문제, 문화 차이, 가족 및 지인들과 헤어짐, 입맛에 맞지 않는 로컬 음식(엄청 중요하다.) 등등 여러  문제를 생각했을 때 득보다 실이 클 것 같았다. 


그렇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탈북자들이 다른 나라로 망명 갈 수도 있는데 왜 한국행을 선택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같은 민족이니까, 말이 통하고, 음식도 비슷하니까, 고향에서도 멀지 않으니까. 그런 크고 작은 이유가 모여 한국행을 선택했을 것이다. 다만 그 선택이 기대에 부합했는 지는 모르겠다. 누군가는 재망명을 택하니까. 


어쨌든 나와 민은 작은 가능성을 하나 떠나보냈고,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의 삶을 열심히 꾸려가야 한다. 이곳에서의 삶이 막연히 상상하게 될 그곳에서의 삶보다 행복해야만, 나와 민도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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