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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나나나 Apr 30. 2020

청소

간만에 여유로운 아침이다. 알바도 수업도 없는 조용한 날이다. 날씨도 좋다. 이불 위로 떨어지는 햇살이 따뜻하다. 알람도 없이 눈을 떠 몸도 개운하다. 팔을 들고 다리를 쭉 뻗고, 으으, 기지개를 켠다. 오늘은 조깅도 생략이다. 몸을 천천히 일으키니 어지러운 방이 눈에 들어온다. 요 며칠 정신없이 학교 간다고, 알바한다고, 누군가와 어울려 술 마신다고 집안일을 미뤄둔 탓이다. 오늘은 깨끗히 청소를 하고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저녁엔 달달한 영화 한 편을 보며 혼자 술을 마셔야겠다.


침대 아래로 발을 뻗을 공간이 없다. 발끝으로 옷 사이를 비집고 야금야금 창문으로 향한다. 창문을 활짝 여니 따뜻한 햇살과 포근한 아침 냄새가 방 안으로 퍼진다. 일광욕 1분. 눈을 감고 맘껏 햇살을 즐긴다. 얼마만에 맡는 여유로은 아침 냄새인지. 1분이 지나고 천천히 눈을 떠 시선을 방으로 옮긴다.


옷을 왜 이렇게 너저분하게 바닥에 벗어둔건지. 천천히 옷을 정리한다. 아니, 침대 위로 올려둔다. 빨래해야 할 옷은 빨래통에 던지고 아닌 옷은 일단 침대에 보관. 생각보다 빨래할 옷이 많다. 무엇보다 씻고 쓸 수건이 없다. 빨래통에 모아둔 빨래를 다시 바닥에 쏟는다. 속옷을 분류해 빨래망에 넣기 위함이다. 하나하나 꼼꼼히 분류해 넣는다.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 그럼 꼭 속옷이 세탁기 구석에 쳐박혀 빨리지도 않은 채로 축축하게 남는다. 빨래망 분류가 끝나면 다시 빨래통에 몰아 넣는다. 세탁기를 먼저 돌리려 빨래통을 드니 꽤 무겁다. 아, 맞다. 이불을 까먹을 뻔했다. 빨아야지 빨아야지 말만 하고 두달 째 방치한 이불. 이불도 곱게 접어 빨래통 위에 얹는다. 빨래통이 한 손으로 들기 버거울 정도로 무겁다. 낑낑대며 걸어서 3분 거리의 코인 세탁소로 향한다. 아침이라 그런지 조용하다. 좋다.


세탁기 두 대에 빨래를 나눠 넣는다. 하나는 이불, 하나는 옷가지. 각각 동그란 큐브 세제를 두 개씩 넣는다. 보통 한 개씩 넣으라는데, 왠지 한 개는 서운하다. 좋은 냄새도 덜 나고, 깨끗하게 빨리는 것 같지도 않다. 동전을 넣고 세탁기를 작동시킨다. 35분. 세탁소를 나와 다시 방으로 향한다.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이따가는 양말을 신고 나와야지. 방에 도착해 침대 위 옷을 하나하나 갠다. 소매는 소매끼리, 밑단은 밑단끼리. 닿아야 할 곳 끼리 닿게 접는다. 곱게 접어 옷장에 넣는다. 아니, 못 넣는다. 옷장 선반이 무너져 내렸다. 전부터 선반을 받치는 못이 위태롭다 싶었는데, 무너져 내렸구나. 분명 며칠 전 무너졌던 거 같은데 이제 확인했다.


결국 옷장 속 옷을 다 끄집어낸다. 선반 바닥이 보일 때까지. 그리고 선반을 꺼낸 뒤 못을 다시 만져 튀어나오게 만든다. 이것도 얼마나 가려나. 선반을 다시 올린다. 그리고 그 위로 옷을 하나하나 넣는다. 잘 안 입는 옷은 뒤로, 잘 입는 옷은 앞으로. 이것도 얼마나 가려나. 며칠 뒤면 또 뒤죽박죽이 되겠지.


이제 설거지. 며칠 전 친구가 놀러 와 함께 안주를 만들어 진탕 마셨다. 그 때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다. 냄비에는 국물이 있던 자국이 선명하다. 소주잔은 마음대로 널부러져 있다. 젓가락은 한 짝이 어딨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일단 뜨거운 물을 틀어 그릇을 불려 놓는다. 그리고 고무장갑을 끼고 수세미에 세제를 묻히고 거품을 낸다. 설거지는 잠시 미뤄두고 인덕션 주위를 박박 닦는다. 이것도 그 때의 여파로 음식물이 구석구석 묻어있다. 꼼꼼하게 닦고 행주로 마무리한다. 옆에 있는 밥솥도, 전기 포트도 닦는다. 밥을 언제 해먹었는지 밥솥에 먼지가 소복하다. 뽀득뽀득 닦고 나니 꽤 새것 같다. 이건 나중에 꼭 제 값을 받고 팔아야지.


이제 진짜 설거지. 조금 물에 불린 탓에 박박 잘 닦인다. 수저와 젓가락처럼 비교적 간단한 걸 먼저 닦는다. 그리고 컵을 닦고, 그릇을 닦는다. 그릇을 다 닦을 즈음 보이지 않던 젓가락 한 짝이 나온다. 잃어버렸으면 서운할 뻔 했잖아. 그 젓가락도 꼼꼼히 닦아 건조대에 올려 놓는다. 설거지를 끝내고 한발짝 멀어져 부엌을 보니 제법 광이 난다. 뿌듯하다.


이제 청소기를 밀려고 하는데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린다. 빨래가 다 된 시간이다. 다시 슬리퍼를 끌고 방을 나온다. 여전히 쌀쌀하다. 양말 신고나오기로 했었는데 그새 까먹었다. 그래도 뭐, 부엌 깨끗해졌으면 됐지. 세탁기 안에서 푹 돌아간 빨래를 꺼낸다. 세제 냄새가 가득하다. 역시 큐브 세제는 두 개가 정답이다. 빨래를 꺼내 건조기에 넣는다. 아까처럼 이불 따로, 옷가지 따로. 코인을 넣고 작동. 이번엔 45분이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책상을 정리한다. 꼴에 학생이라고 책이며 종이며 펜이며 아주 정신이 없다. 그렇다고 공부를 그리 열심히 하지도 않았으면서. 책은 책꽂이에, 펜은 필통에, 종이는 파일에 하나하나 정리한다. 노트북을 잠시 의자에 올려놓고 책상을 닦는다. 책상에서 라면을 먹고, 야식을 먹은 탓에 책상에도 굳은 음식물이 군데군데 눌어붙어있다. 세척제를 뿌리고 꼼꼼히 닦아낸다. 책상이 반짝거린다. 다시 노트북을 올려놓는다.


이번엔 식탁. 식탁은 더 답이 없다. 말이 식탁이지 그 위엔 널부러진 술병과 담배가 가득하다. 쓰레기통을 끌어다가 쓰레기를 버린다. 빈 담배갑도 버린다. 이렇게 텅 빈 것들을 그동안 안 버리고 뭐했나 싶다. 그때그때 버리기만 했어도 이 지경은 아니었을텐데. 식탁 위를 차지하고 있던 걸 싹 버리고, 식탁 위도 싹 닦는다. 쓰레기만 가득했던 탓에 비교적 책상보다는 쉽다.


이제 화장실로 향한다. 극한의 장소이다. 일단 변기 커버를 올리고 세척제를 뿌린다. 그 동안 여기에 많이 싸지른 내가 대단하다. 변기를 이렇게 만들 수도 있구나 혼자 감탄한다. 세척제가 흐르고, 변기솔로 변기 안 쪽을 박박 문지른다. 거품이 솔솔 올라온다. 그리고 변기가 점차 원래의 모습을 찾는다. 제법 깨끗해지면 변기솔을 잠시 변기에 쳐박아두고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간다. 수챗구멍에 머리카락이 마음대로 뭉쳐있다. 손가락 끝으로 머리카락을 끄집어낸다. 내 몸에서 이렇게 많은 머리카락이 나올 수 있다니. 한 번 더 감탄한다. 머리카락을 잡고, 변기에서 변기솔을 구출하고, 변기에 머리카락을 던져넣는다. 그리고 물내리기.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솔솔 올라왔던 거품과 머리카락이 한데 뭉쳐져 사라져버린다. 잘 가라. 세척제를 변기 커버에도 뿌리고, 이번엔 물티슈로 닦아낸다. 제 몸 불사른 물티슈는 꼬질꼬질해져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다시 물티슈 두어장을 뽑아 세면대를 닦는다. 세면대는 물 때와 먼지가 뭉쳐 색이 이상하다. 물티슈 두어장으로는 모자라다. 한 번에 다섯장을 더 뽑아 있는 힘껏 닦아낸다. 점차 하얘진다. 처음 왔을 때 그 상태로 돌아가고 있다. 마무리로 바닥에 물을 뿌리고 끝낸다. 샤워 부스의 물때도 닦긴 해야하는데 그건 포기. 샤워부스는 뭐, 샤워하면 그 거품으로 깨끗해지는 거 아닌가?


이제 진짜 바닥을 밀어야하는데 다시 알람이 울린다. 혹시 누가 내 빨래를 훔쳐가진 않겠지? 낙관적인 생각으로 청소기 코드를 콘센트에 꼽는다. 쬐끄만한게 전기만 연결되면 시끄럽게 소리를 낸다. 현관부터 부엌까지. 있는 힘껏 박박 밀어낸다. 청소기도 힘든지 점점 소리가 커진다. 그러면서 제대로 빨아들이지는 못한다. 더 힘줘서 밀어낸다. 카펫 바닥에 붙은 머리카락 단 한 올도 놓칠 수 없다. 팔목에 힘을 주고 더 세게 밀어낸다. 대충 끝나자 팔이 살살 아프다. 코드를 다시 뽑고, 선을 정리하고, 방을 나선다.


아직 쌀쌀하다. 또 양말을 까먹었다. 그래도 빨래 안 까먹은 게 어디야. 슬리퍼를 질질 끌며 걷는다. 아직 바쁜 시간이 아니어서 그런지 내 빨래는 모두 안전하다. 건조기를 여니 따뜻한 열기와 빨래의 고운 냄새가 퍼진다. 이 순간이 제일 좋다. 이불을 꺼내 한 번 끌어 안는다. 온 몸이 따뜻해진다. 온 몸이 고운 향기로 감싸 안긴다. 이불을 꺼내 개고, 옷가지는 꺼내 다시 빨래통으로 집어넣는다. 옷가지는 양이 많았는지 제법 안 마른 것들이 있다. 그래도 일단 빨래통으로 넣는다. 다시 낑낑대며 따뜻하고 축축한 빨래를 방으로 가져온다.


깨끗해진 바닥에 건조대를 펼친다. 건조대 사이즈를 잘 모르고 산 탓에 건조대를 펼치면 방에 남는 공간이 없다. 이불은 보송보송하게 말랐으니 그대로 침대에 올려두고, 옷가지를 하나씩 꺼내 건조대에 넌다. 하나씩 꺼내 있는 힘껏 탁탁 털어낸다. 그리고 곱게 건조대에 올린다. 다들 씻고 나와 기분이 좋은지 얌전히 건조대에 널린다. 하나하나 일렬로 예쁘게 정렬한다. 마지막 남은 속옷까지 널고나니 정말 끝이다.


온 방이 빨래 냄새로 가득하다. 이대로면 이 방에 평생 있어도 좋을 것 같다. 방이 향기롭다. 방이 반짝거린다. 햇빛을 받아 더 반짝거린다. 침대 위로 풀썩 쓰러지면 아까 그 햇살이 아직도 침대에 머무르고 있다. 이불에서 올라오는 좋은 냄새와 따뜻한 햇빛. 눈이 스르르 감긴다. 행복하다. 근래 했던 일 중 가장 행복했다. 다시 잠들어야겠다. 왠지 지금 자면 기분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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