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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나나나 May 28. 2020

짝사랑 2 : 너

입에서 입김이 솔솔 나오기 시작하던 계절이었다. 넌 갑자기 캐리어를 끌고 집 앞에 찾아왔다. 그리고 내게 재워달라고 말했다. “길게는 아니고 몇 달?” 몇 달이 길지 않다면 긴 건 어느 정도일까. 넌 살던 집에서 갑자기 쫓겨나게 됐다고, 살 곳을 구할 때까지만 머물겠다고, 갈 곳이 정말 우리집 뿐이었다고 덧붙였다. 외로웠고, 널 사랑해 마지 않았던 난 널 흔쾌히 받아들였다. 


난 알고 있었다. 나의 마음과 너의 마음이 같지 않다는 걸. 정말 갈 곳이 없어, 의지할 곳이 나 뿐이어서 찾아왔다는 걸, 그래서 날 이용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네가 내 옆에 있다는 것, 나의 공간을 너에게 내어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 공간에서 너와 시간을 공유하고 나의 이야기와 너의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너와 나는 짧은 동거를 시작했다.


너와 내가 처음 마주했던 그 카페에서 계속 일하던 넌 매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왔다. 대학생이었고 마침 방학이었던 나는 매일 방구석에 틀어박혀 글을 썼다. 정확히는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글을 썼다. 그러다 이따금씩 네 생각이 떠오르면, 아니 계속 떠오르는 네 생각을 나는 멈출 수가 없어, 글을 쓰다 말고 네게 오늘 무슨 말을 할지 고민했다. 집에만 있어서 재미없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네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그래서 네가 웃고, 그래서 네가 네 얘기를 편하게 늘어 놓길 바랬다. 


집도 매일 청소했다. 혼자 살 땐 정리도 귀찮아 물건을 아무데나 늘어놓고 살았는데, 네가 들어오니 모든 것이 신경쓰였다. 창틀에 작게 쌓이는 먼지들도, 라면을 끓여 먹는 싸구려 냄비도, 화장실에서 나는 케케묵은 냄새들까지 모든 것들이 거슬렸다. 글을 쓰다가도 네가 떠올라 화장실을 청소하고, 설거지를 하고, 창틀을 닦았다. 그러다 창 밖에서 햇살이 들어오면, 괜히 네 생각에 간지러워 혼자 웃어버렸다. 그렇게 너의 생각과 함께 집을 청소했다. 난 네게 뭐든 완벽함을 보이고, 깨끗함을 선물하고 싶었다. 


너는 일이 끝나면 내게 전화를 걸어 집에 필요한 게 없는지 물었다. 나의 대답은 매일 똑같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랑 맥주. 전화를 끊고 난 어줍잖은 실력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밥을 씻어 밥통에 넣고, 계란 후라이를 하고, 얼려 놓았던 불고기를 볶고. 한 시간쯤 흐르면, 넌 한 손에는 비닐봉지에 담긴 맥주를, 다른 한 손에는 얼음이 녹아 컵이 젖어버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들어왔다. 내 요리와 함께 우린 맥주를 마셨다. 나란히 식탁에 앉으면 내가 먼저 네게 물었다. “오늘은 무슨 일 없었어?” 나의 질문에 넌 네 이야기를 늘어놓고, 난 그런 너를 바라보며 네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의 무슨 일에서 시작한 너의 이야기는 끝내 힘겨운 너의 인생사까지 흘러갔다. 복잡한 네 인생사를 듣고 있으면 온 마음이 저릿했다. 그리고 속상했고, 아팠고, 슬펐다. 내가 네 옆에 있어 줄게, 내가 항상 너와 함께할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이내 다시 삼켜버렸다. 네가 부담스러워 할까봐. 그래서 네가 날 떠나버릴까 두려웠다. 내가 네 옆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 뿐이었다. 


한 캔, 두 캔, 세 캔씩 맥주를 비우고 나면 넌 피곤하다고 말했다. 넌 천천히 몸을 일으켜 빈 맥주캔을 치우고, 그릇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난 설거지하는 네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 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뻔한 생각을 했다. 네가 나에게 너의 깊은 이야기를 계속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지속되길 바랬다. 누구도 듣지 못하는 너의 이야기를 나만 간직하고 싶었다. 쑤셔오는 마음 탓에 난 고개를 돌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다 녹아버린, 이젠 아이스 아메리카노라고 부를 수도 없는 이 커피는 씁쓸함도 없었다. 


난 네가 언젠가, 조만간 떠날 것을 알고,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네가 날 궁금해하지 않는 다는 걸 알기에 커피와 함께 마음을 삼켰다. 그래, 너와 이렇게 함께하는 시간이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자. 더 욕심내지 말자. 수천번을 다짐했다. 


설거지가 끝나면 넌 샤워를 했다. 그 다음에 내가 샤워를 했다. 내가 샤워를 하고 나오면 넌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날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머리를 말리면 넌 네 옆을 손으로 툭툭 치며 ‘얼른 누워.’ 라고 말했다. 그럼 난 머리를 말리다 말고 널 보고 웃었다. “왜 웃어.” 무심하게 말을 던져 놓곤 너도 날 따라 웃었다. 유달리 키가 컸던 넌 침대 끝에 발목이 달랑거렸다. 난 괜히 그 달랑거리는 발목이 좋아 침대에 눕기 전, 꼭 네 발을 톡톡 건들였다. 넌 작게 웃으며 ‘간지러워.’ 라고 말했고, 난 그 말투가, 그 말이, 그 말을 하는 네 목소리가 좋아 괜히 몇 번 더 건들였다. 


“누우라니까 꼭 그런다.” 퍽 다정한 네 말투에 난 네 옆으로 누웠다. 우린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가, 잠이 안 와 뒤척이다가, 서로를 바라보고 누웠다가, 간지러워져 다시 천장을 보고 누웠다. 그러다 다시 내가 고개를 돌려 널 보면 나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 꾹꾹 누르고 누르며, 몇 번이고 참아야 한다고 속으로 되뇌였다. 


“너랑 이러고 있으니까 좋아.” 누르고 눌러도 결국 난 매번 입 밖으로 말해버렸다. 넌 내 말에 작게 웃었다. “고마워.” 다정한 척하는 무심한 네 대답은 내게 늘 상처가 됐다. 하지만 난 그렇게 대답하는 너를 미워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대답을 하게 만든 날 미워하는 것 뿐이었다. 내가 너무 무뚝뚝하게 말했나. 그래서 내 감정이 전해지지 않았나. 아님 너무 뻔한 말을 한 걸까. 그래서 네게 아무 의미가 없었나. 아님 혹시 내가 네게 부담을 주고 있는 걸까. 그래서 넌 내게 선을 긋는 건가. 내가 바랐던 대답은 이게 아니었는데. 너도 나와 함께 있어 좋다는 단순하고 흔한 말이면 됐는데. 욕심내지 않기로 해놓고 또 욕심을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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