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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경 Feb 20. 2019

탈코르셋

또래 여성과의 대화 중 일부 발췌

M: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은 사회에 어울려 살아가기 때문이라기보다, 인간관계에서 끊임없이 의미를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사회, 그리고 더 좁게 작금의 한국 대학교들은 여성혐오와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장이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성 대학생들의 탈코르셋은 대학교 내에서 곧 아웃사이더가 되는 지름길이라 여겨질 수 있다. 이는 곧 대다수 여성들이 수행하고 있는 여성성에 반항하는 행동으로, 사회에서의 고립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곧 인간관계가 협소해지며 이를 통해 의미를 찾는 행위를 할 수 없게 된다. 

위와 같은 사회성 결여나 결핍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탈코르셋을 뛰어넘는, 다시 말해 탈코르셋을 오로지 수단으로 쓸 수 있을 만큼 더 큰 목적과 목표가 필요하다. 그리고 비로소 그 목적과 목표가 의미가 되는 것이다.


먼저 그 목적이 지긋지긋한 대한민국 조선을 뜨는 것, 탈조라면 이를 위해 절대적 시간과 자원 비축을 위해 탈코르셋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고,

그 목적이 내가 지금 현재 속해 있는 대한민국을 바꾸겠다는 것이라면 대학교에서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내 목적은 사회적 관계 형성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탈코르셋을 수행하는 행위 자체도 단순히 꾸밈 노동을 멈춘다, 사회적으로 여성들에게만 씌워지던 미의 기준을 거부하고 반박한다는 것은 일차원적이다.

코르셋은 여성 착취 구조인 현실, 즉 현재 여성들에게 족쇄가 되며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기능적 측면을 무시하고 여성이라는 허구의 사회적 측면만을 강조해 왔다. 다시 말하자면 탈코르셋은 인간의 기능적 측면을 되찾는 여성 복권 운동이다.


더불어서 여성은 스스로를 볼 때도 거울 속에서 자신을 타자화하고 도구화한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남성적 시선으로 본인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아름다움이나 고귀함, 우아함 등 피상적인 개념으로 설명되어 왔다. 이는 여성이 인간의 몸으로 기능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예쁜 여성이 되려면 예쁘다는 추상적인 미의 개념에 부합하기 위해 인간의 기능적 측면을 아주 축소시켜야 한다. 모든 여성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울 필요가 없고, 아름답지 말아야 한다. 아름다움은 인간의 기능에 속하지 않는다.


더불어서 여성들은 감정적이고 감성적이기를 사회적으로 요구받아 왔다. 마치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높고, 모성애가 무조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앞서 언급한 측면이 모자라거나 부족하다면 결격 사유가 된다. 


인간은 태초에 악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순수한 선으로 태어난 것 또한 아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여성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상냥하고 친절하며 누군가를 챙겨줄 줄 알아야 하는가? 사근사근함과 조신함은 여성들이 타고난 특질이 아니다. 지독한 반복과 개념 주입은 생각하는 힘을 방해하고 저해한다. 여성들은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다. 여성들'만' 그렇게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코르셋은 여성들의 겉과 속을 사슬처럼 옭아매고 숨통을 조인다. 


나를 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해하지 말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내 앞길에서 쳐낼 수 있도록, 내가 나의 목소리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탈코르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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