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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경 Mar 18. 2019

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간헐적 독후감


우리는 딸로 태어나, 아들을 동경하며 살았다. 단 한번도 젠더 권력을 누린 적 없으니, 손이 있어도 쥘 수 있는 게 없으니, 다리 사이에 달린 고깃덩어리 그깟게 뭐라고 그것들 못 이겨서 억눌려 살았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아가는 여성 중 단 한번도 남성이 되고 싶어 해 본 적이 없는 여성은 단언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남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페니스도 달고 싶지 않았고, 남자"같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지독하게도 성별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소위 정상의 범주에 들기 위해서 나는 무조건 그 카테고리 중 하나에 속해야 했다. 그렇게 나는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어째서 여성은 이렇게도 가진 것이 없고 누리는 것이 없는데, 끊임없는 착취의 굴레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깨부수고 싶었다. 그러려면 알아야 했다. 내가 깨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여성이 하고 싶은 걸 모두 하는 페미니즘, Girls can do anythig 이 성행하던 2017년 1월의 겨울, 나는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었다. 페미니즘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책이란 책은 전부 다 도서관에서 빌려다 왔을 때, 가장 먼저 내 손이 갔던 책이다. 미리 말해 두지만, 나는 그때 여성이 하고 싶은 걸 모두 하는 —하지만 그 “하고 싶은 것”이 남성의 시선으로 그려졌다는 사실은 부정하고 있을 때— 페미니즘이 옳다고 생각했다. 쿨걸 문화와 백래쉬에 흠뻑 젖어 있는 상태로 나는 이 책을 읽었다. 고로 나는 21세기 사회의 기본 명제 자체가 틀렸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책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이 책에 나오는 그 어떤 여성도 남성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아니, 남성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21세기 현재 남자들이 쥐고 있는 것을 보여줬을 뿐이다. 책 속 사회는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달랐다. 정반대였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는 여성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했다. 여성혐오적 시선으로 그려지지 않은, 여성이 사람으로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는 사회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이다.) 유토피아적 세계에서도 착취 구조는 존재한다. 이갈리아에서는 남성들이 그렇다.

무해하고 순종적인 남성, 가정에서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착취당하고 있으면서도 사회적 지위따위는 없으니 인정받지 못하는 남성, 페호를 착용하며 살덩어리를 꾸역꾸역 밀어 넣고 불편함을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사는 남성, 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말하며 제모를 하고, 화장을 하는 남성. 이 모든 것을 수용해야만 하고, 반발을 했다간 크나큰 낙인을 찍히고 사회적 규탄을 받는 남성.

지겹도록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나는 읽는 내내 펴지지 않는 미간 때문에 고생해야 했다. 거울을 봐도 숨이 막힐 정도로 여성혐오사회에 이골이 나 있던 것이다. 시스템 속에서는 시스템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미러링이 필요한 것은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고 처참한지 보여 주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을 덮는 순간, 더 이상 이 환상의 거울만 보고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거울을 깨야 할 때다. 가장 근저에 있는 기본 명제가 달라지지 않는 이상, 여성은 결코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 수 없다. 나는 전복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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