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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로 May 02. 2023

희붐하고 흐릿한

순환하는 생각들


하늘이 맑았다. 너무 맑아서 아득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아득해져서 점점이 흩어진 구름들만 바라보았다. 어딘가로 부웅, 하고 사라지고 싶었지만 언제나 나는 부웅, 하며 떠나는 퇴근 버스에 올랐다. 나는 누군가에게 쫓기듯 집으로 향했다. 덜컹거리는 버스에서는 다리가 아팠다. 버스가 오른쪽, 왼쪽 오갈 때마다 나도 휘청휘청 함께 흔들렸다. 풀썩 하고 쓰러지고 싶어지기도 했지만 팔의 힘을 풀진 않았다. 꼭 쥐고서 넘어지지 않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아직까지는, 아직까지는.

내가 도착하는 곳에는 쫓아오는 존재도 없었지만 너 또한 없었다. 벨을 누르고 버스가 정차한 뒤 버스정류장에 발을 내딛을 때, 분명하게 너는 없을 것이다. 아니, 없다. 그 단 하나의 사실이 가끔은 머리를 어지럽게 했고 아득한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빛에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있으면 버스가 또 왔다. 그럼 나는 또 그곳에 올랐다. 그 내부에도 너는 없고 불청객을 본 것만 같은 사람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곱씹듯 바라봤다. 그럼 나는 또 이리저리, 흐느적흐느적, 휘청휘청, 흔들흔들, 쓰러지지 않은 채 몸을 흔들었다. 그렇게 쓰러지지 않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질문이 들려온다면 나는, 아마도 그러게 하고 답할 것이다. 그러게, 정말 그러게 말이야. 버스가 노선에 없는 길로 들어서고, 아무도 누르지 않은 벨소리가 울리고 아무도 없는 들판에 서서 뒷문을 활짝 열어줬으면 했다. 내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뒷문은 누군가를 기다리듯 계속해서 입을 벌리고 있고, 주저하고 있는 내게 기사가 한 마디 해주기를 바랐다.

내려.

그럼 나는 어정쩡하게 버스에서 내릴 것이다. 내려, 라는 말을 기다린 사람처럼.

나는 아무도 없이, 파릇파릇한 색감 속에 빛나고 있는 풀들 사이에 무채색의 고목처럼 서서 하늘을 봤다. 하늘은 희붐하고 흐릿했다. 마음이 어딘가 부웅, 하고 떠나버린 것처럼 아득해졌다. 너무 멀리 부웅, 하고 떠나버려서 붙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떠나버린 마음도 흐느적, 흔들, 또는 휘청 거리며 내리라는 말을 기다리겠지. 마음이 내리는 곳의 하늘도 희붐하고 흐릿했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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