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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로 May 09. 2023

지구 멸망이 좋겠다




하루 내내 비가 오는 걸 바라봤다. 비는 오소소 내렸다가 와르르 쏟아지길 반복했다. 창 밖에서 빗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밖을 보았고 바닥에 빗물이 고이는 걸 보면서 더 큰 웅덩이가 생기길 바랐다. 그 마음이 뭔가 싶어서 창문을 열고 밖을 오랫동안 보았고, 빗속으로 손을 뻗기도 했다. 손바닥에 빗방울이 모였다. 하늘엔 희뿌연 구름들이 뒤엉키며 떠 있었다. 맑았던 하늘은 너무 멀고 멀어서 닿지 않을 것 같았는데, 수상한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한 먹구름은 닿을 듯 가까웠다. 야트막한 산의 봉우리를 잡아먹고, 높은 지대에 지은 아파트의 꼭지를 삼킨 먹구름은 실재처럼 다가와서 언제라도 아가리를 벌리고 숨겨놓은 자신의 의도를 토해낼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는 먹구름의 수상한 마음을 엿보는 야릇한 기분으로 비를 바라봤다. 와르르 쏟아질 때면 어쩔 줄 모르겠다가도 비가 그치면 실망했다. 해석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지만 하나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촘촘하게 공간을 채우는 빗방울이 멈추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빽빽하게 차오른 빗방울이 출렁거리길 바라는 마음. 그래서 내 일상을 아주 조금 무너뜨리길 바라는, 마음. 그건 아주 이기적인 기도였다. 일상이 무너지길 바라는 마음에는 아주 조금, 이라는 말에 방점이 찍혀 있다.  

비가 무릎까지 차오르길 바랐고, 하수구에서 물이 넘치길 바랐고, 창밖으로 출렁이는 수면 위로 나무가 얼굴만 내민 채 숨을 내뱉길 바랐고, 어디선가 누군가의 신발이 둥둥 떠 있길 바랐고, 길고양이들이 그 신발을 잡으려 물을 첨벙이며 수영하고 있길 바랐고, 매일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는 강아지와 주인은 수영복을 입고 오늘만큼은 줄 없이 서로 나란히 개수영을 하며 산책하길 바랐고, 주차되어 있던 차들이 두둥실 떠오르길 바랐고, 아무도 떠나지 못하고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길 바랐고, 누구도 불행하지 않게 지구가 멸망하길 바랐다.



그러니까, 아주 조금 무너진 일상이 순간의 일탈처럼 다가왔다가 사라지길 바랐다. 아무도 불행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과 지구가 멸망해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충돌하면서 마음 속 어딘가에 큰 분화구를 만들었고, 해석되지 않는 어떤 마음 하나가 멸종했다. 층층이 쌓인 화석을 꺼내서 두루뭉술한 마음을 해석하고, 잊혀지지 않도록 박물관에 전시했다. 전시된 화석에는 내가 불행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 나를 다독이는 마음이 풍화된 채 남아 있다. 누구도 해석하지 못하지만 누군가는 해석하길 바라는 이기적인 바람이었다.

비는 멸망의 전조처럼 다가왔다가 스르륵 사라졌다. 뒤엉켜 있던 먹구름들이 아가리를 벌렸고 그곳에는 지구를 반쯤 잠기게 만들 것이라는 수상한 의도가 아닌 아무도 불행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같은 파란 하늘이 있었다. 그렇게 주말 동안 내리던 비가 그쳤다.


해석되지 않은 마음은 아직 축축하게 젖어 있다. 일상은 여전히 떼굴떼굴 굴러갔고, 지구는 아직 멸망하지 않았으며, 불행은 오소소 내리다 와르르 내리길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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