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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로 Jun 20. 2023

걷고 또 걷고



요즘 퇴근 후 걸어서 집에 돌아오고 있다. 해가 너무 뜨거워서 뒷목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아직까지 무리일 정도는 아닌 느낌이었다. 해가 들지 않는 그늘에 서면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땀이 식으면서 느껴지는 약간의 나른함도 나쁘지 않았다. 운동 겸 시작한 걷기였지만 일을 마친 뒤에 걷는 건 꽤 힘이 들었고, 집에 도착하면 땀에 절어 잠시 쓰러져 있었다. 그래봐야 하루의 절반 정도 지난 건데, 마치 하루를 마감한 듯 몸에 힘이 다 빠져나갔다. 그래서 가끔은, 아니 사실은 자주, 다녀온 뒤 샤워를 하고 잠에 들었다. 몇 시간 정도 자고 나면 홀로 마감했던 하루에 도장을 찍듯 정말로 하루가 끝나갔고, 나는 멍하니 자괴했다. 하루를 허비했다는 생각. 하루를 허비한 뒤 다시 또 하루를 허비해서, 겹겹이 쌓인 허비로 인해 속이 전부 텅 비어버렸다는 생각. 그리고 텅 텅 빈속을 채우는 자괴. 걸어온 곳에 존재하는 게 자괴 뿐이라 또 자괴.



그 중 가장 큰 덩어리는, 내가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 나는 도대체 무얼 해야 할까. 해야 할 일들은 많은데 정작 무얼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어서, 눈을 감고 잠에 취하고 뻐근해진 몸으로 걸었다. 그냥 걷고 또 걸었다. 뜨거운 해를 받으면서 자괴감을 바짝바짝 태우고, 땀으로 눅눅하게 절인 다음 가슴 한 가운데에 잘 묻어두었다. 발효가 된 자괴감이 어떻게 변형되어서 나타날지를 생각하며, 가슴 깊숙한 곳까지 파고 또 팠다. 언젠가 좋아질 때가 되면 마음 깊숙이 묻어두었던 많은 자괴와 후회들을 꺼내 보고 싶었다. 언젠가는 언제나 언젠가로 남아 있을 테지만, 기약 없는 세계 속 나에게 언제나 약속했다. 언젠가 너는 괜찮아질 거라고. 그때 쯤 네가 꺼낸 자괴와 후회는 맛있게 발효된 김치처럼, 웃으면서 바라볼 수 있을 거라고. 아니 이미 자괴와 후회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러니까 몇 번 씹고 삼켜 소화시킬 수 있는 추억 정도로 남을 거라고. 그리고 언젠가의 나에게 모든 짐을 던져줘서, 미안하다고.



걸어도 걸어도 도착지는 오지 않는 산책을 매일 하고 있다. 산책은 출발지와 도착지가 명확한데 나는 출발지와 도착지가 모두 사라진 산책을 했다. 매일 매일 땅을 보며 산책을 하다 보면 오르막과 내리막이 나왔다. 오르막이 나오면, 곧 내리막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오르막 뒤에 오르막이 나오는 경우가 빈번했고, 숨은 점점 차올랐다. 주저앉고 싶어서 의자를 찾아 두리번거려도 의자는 나오지 않았고, 가끔은 낮은 턱에 주저앉아 멍하게 있었다. 얼굴에 달아오른 열에 얼굴이 붉게 물들고 오르막 뒤에 내리막이 나올 거라는 대책 없는 희망을 품으며 다시 일어났다. 내리막이 오면 조금 편하겠지. 또 오르막이 나올 테지만, 내리막을 내려가는 동안에는 잠시 편안할 테니. 어디든 도착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대책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걸었다.


발맞춰 걸을 누군가가 없음에도, 나의 걸음이 도망의 걸음이라고 비난 받음에도, 그곳에 낙원이 없음에도, 휘청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다시 걷고 또 걷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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