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폭력이든 폭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어떻게 들어야 할지 모르는 것 같다. 폭력은 간단해 보이지만 실은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당신에게 폭력을 행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 곁에 남을 수도 있으며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완전히 낯선 이에게 폭력을 당할 수도 있다. 당신은 너무나 끔찍한 방식으로도 너무나 친밀한 방식으로도 폭력을 당하고 해를 입게 될 수 있다. 굳이 내 이야기를 공유하려는 이유는 폭력의 역사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 개인의 폭력의 역사를 말하기는 주저했으나 그 역사는 지금의 나라는 인간, 내가 쓰는 글의 내용, 내가 글을 쓰는 방식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알려준다. 내가 어떻게 이 세상을 헤쳐나가고 있는지도 알려준다. 내가 어떻게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에게 나를 사랑하도록 허락했는지도 알려준다. 폭력의 역사는 모든 것을 알려준다." (록산 게이의 '헝거' 중에서)
"안녕하세요. 저는 하리타입니다. 지금 저는 록산 게이의 '헝거' 이야기에 화답하는 의미에서, 또 여러분과 제 이야기를 나누는 의미에서 어렸을 적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에게는 오랫동안 두 가지 성폭력 트라우마 기억이 있어요. 물론 그걸 트라우마라고 부르고, 또 두 가지로 정해서 이야기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요. 그전까지는 제 마음속에 남아있는 어떤 아픈 기억이었고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미스터리이기도 했습니다.
첫 번째 성폭력 경험은 6살 때쯤에 제가 살던 집 아파트 경비원에 의한 것이었어요. 그 사람은 복도식 아파트 1층에 입구 바로 옆에 있는 방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군청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위쪽 어금니 부분에 금니가 굉장히 반짝이는 사람이었어요.
여름철로 기억하는데, 1층에 있던 집을 드나들 때마다 사탕을 한 손에 들고 그걸 내밀고 금니를 보이면서, '흐흐' 웃으며 오라고 했어요. 사탕이 먹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어른이 부르니까 그 말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가간 거죠. 그 사람은 무릎에 저를 앉게 했어요. 여름이니까 치마를 입고 있었던 제 허벅지를 더듬고 올라오는 거죠. 때로는 팬티 위로 성기를 만지기도 하고요. 대부분 굉장히 짧은 시간이었어요. 왜냐면 당장 불편함을 느끼고 제가 몸을 비틀면서 나가고 싶어 하니까요.
그런데 다음번에도 지나갈 때 사탕을 내밀고 또 내밀고.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을 피해 다녔죠. 그 경비실 바로 옆이 계단이라면, 저희 집 쪽에서 더 가까운 쪽에 경사로가 있었어요. 항상 집을 나가기 전에 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보고 그 아저씨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거나 자리에 없으면 쏜살같이 경사로를 달려내려 가는 거죠. 그렇게 지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는 가물가물해요. 떠올릴 수가 없는데, 그랬죠.
그런데 어느 날은 엄마 아빠가 굉장히 중대한 이야기를 할 것처럼 분위기를 잡고서 저랑 언니에게 그랬어요. 경비 아저씨 둘 중에 한 분, 교대 근무니까, 한 사람이 저희 집 옆 옆에 있던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을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문을 따고 들어가서 강간을 했다고요. 표현은 그렇지 않았겠죠?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데 하필 그 여자애가 그 일을 당한 건 평소에도 좀 행실이 그래 보였다? 그런 이야기도 기억에 나고요. 그 언니는 저도 알고 지냈던 언니죠. 그 뒤로는 본 기억이 없고요.
당시에 저는 '그 사람이 나한테도 그랬어'라는 말을 했어요. 부모님은 굉장히 얼어붙어서 어안이 벙벙하고 충격을 받았다가 다음 순간에 '어떻게 했는데 너한테?'라고 해서 어떻게든 대강 설명을 했겠죠. 그 설명을 듣고서 부모님은 오히려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아 그건 별 거 아니야. 그건 천만다행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황급히 자리를 마무리하셨죠. 그런데 그때 저는 좀 억울했어요. '아니 나한테도 그랬다고. 그게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야'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6살, 저에게는 그걸 끝까지 항변하거나 더 이야기를 들어주고 요구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일은 그렇게 넘어갔습니다.
첫 번째 기억에 대해서 저는 28살~29살 때쯤 제가 살고 있는 독일에서 심리치료를 받았어요. 제가 받았던 치료는 EMDR이라는 기법이었는데요. 쉽게 말하면 뇌 상태를 꿈꿀 때 상태처럼 만드는 거예요. 마치 꿈꾸는 동안 뇌가 기억을 처리하고 안전하게 저장하듯이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기존의 기억을 어떤 새로운 형태로 바꾸는 그런 치료였어요.
그 치료를 통해서 바뀐, 혹은 덧붙여진 저의 트라우마 기억은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다 성장한 성인이 된 제가 그 경비원 앞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그런 상황이 연출이 되더라고요. 경비 아저씨가 그 자리에 앉아있고, 어린 버전의 저는 경사로로 도망가서 움츠리고 있었고, 성인이 된 저는 그 사람 앞에 가서 굉장히 화를 내면서 따지고 협박하고, 또 잘못을 지적한 거죠.
제가 저희 집 현관문을 두드렸어요 그런데 그때 나온 젊은 엄마는 다 큰 저를 알아보지 못하죠. 저도 그래서 내색하지 않고 '아줌마'라고 부르면서 이런저런 일이 있고 아이가 위험에 처해있는데 나와서 어떻게 좀 하시라고, 하고 엄마 손을 끌고 경비원 앞으로 갔어요.
그런데 엄마는 무기력하더라고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답답했어요. 나중에는 엄마를 어린 제가 있는 쪽으로 보내고, 제가 직접 관리사무소에 전화해서 이 사실을 폭로했어요. 그 사람을 쫓아내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됐고요. 당시에도 경찰에 신고할 생각을 하지 않은 이유는 90년대 초중반이고 온갖 성폭력에 대한 인식, 경찰의 대응 같은 게 지금보다도 훨씬 미흡하다, 피해자 중심이 아니다, 이런 생각 때문이었죠.
두 번째로 갖고 있었던 성폭력 트라우마 기억은 친족과 관련된 겁니다. 외삼촌에 아들, 저의 사촌 오빠에 의한 것인데 11살 때 명절에 가족들이랑 같이 그 집에 갔습니다. 드문드문 만나는 사촌들이어서 하루가 짧더라고요. 그날은 컴퓨터를 잘하는 고등학생 오빠가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을 보여줬어요. 저는 거기에 즉각 빠져들었죠.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프린세스 메이커는 과거 판타지 세계에서 어떤 용사가 소녀를 입양하는 그런 내용이에요. 그래서 그 소녀를 딸로 삼아서 키우는 내용인데, 사촌 오빠는 당시 18살 고등학생이고 어떤 그런 성적인 호기심 때문에 여성에 대한 그 게임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단순한 게임인데도 불구하고.
저를 옆에 앉혀놓고 게임 설정을 보여주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프린세스를 만들 수 있나를 이야기하는 데 저를 무릎에 앉히고 싶어 하더라고요. 제가 괜찮다고 옆에 앉겠다고 하는데도 저를 무릎에 앉혀서 제가 입고 있던 코르덴 타이츠 위로 허벅지를 주무르기도 하고 또 자기 무릎과 제 허벅지 사이로 손을 넣어서 엉덩이를 주무르기도 하고, 또 제 사타구니 사이로 깍지를 끼기도 하고, 그렇게 은근히 계속 그 부근을 만지는 거죠.
그런데 역시 즉시 불편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저는 내려가려고 했고 실제로 내려왔어요. 그러면 사촌 오빠의 눈은 항상 그냥 화면에 고정돼있어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저를 자꾸 끌어당기는 거죠. 제가 3일 동안 그 집에 머무르면서 몇 번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밤중에 혼자 고민을 했죠. 이 오빠가 이렇게 나를 대하는 거, 이렇게 만지는 건 옳지 않고 싫은데 어떻게 내가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그래서 말을 고르고 또 고르고 고민을 많이 하다가 셋째 날에 이렇게 말했어요.
"오빠는 날 인형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이 한 마디를 고르고 골라서 했어요. 그런데 그 오빠는 굉장히 일순간 차가워지더니 화가 난 표정으로 방을 떠나고 그 뒤로 제가 집에 가는 다음 날까지 딱 한 번 말을 걸었어요. "내가 너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라고 한마디 한 거죠. 그 오빠가 저를 무시했고 불안했고 집에 가고 싶었어요. 외삼촌 집에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잖아요. 친하지 않은 친척이니까.
그러고 나서 그 사촌 오빠는 딱 두 번 만났어요. 11살 이후로 지금까지. 만나고 싶지 않아서 제가 의식적으로 피했던 것들이 많고 또 생각지 못해서 맞닥뜨렸을 때는 아주 어색하고요. 제 마음에는 온갖 분노와 갈등과 혼란과 충동. 이 사건을 모두 앞에서 말하고 싶다는 충동. 혹은 지금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다는 충동. 그 뻔뻔함을 벗기고 싶은 어떤 그런 마음.
이 기억을 들고 심리치료실에 갔을 때 역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일어났습니다. 저희 아빠와 외삼촌이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왔어요. 그리고 아빠랑 저랑 지하철을 타고 강을 건넜어요. 고요한 한강물, 굉장히 넓은 강이 보이고 저는 그냥 아빠 옆에 앉아있어요. 아빠는 얼굴은 보이지 않고 그냥 차분해요. 저도 화난 것도 아니고 그냥 조용히 있었고 집에 와서는 집에 와서는 목욕을 해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탕 목욕을 좋아했거든요. 집에 있는 욕조에서 목욕을 하고 따뜻한 우유, 설탕을 타서 우유를 마시고 그리고 언니랑 같이 자던 제 방에서 편안히 잠드는 그런 새로운 기억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기억에 대해서도 역시 저는 반발심이 많이 들었어요 처음에. 이런 걸 결코 원하지 않았다고. 그동안 수없이 수백 번 그렸던 어떤 응징. 이 사실을 가족들이 다 알게 되고 친척들이 그래서 그 오빠가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사과를 하고 나는 부끄러울 게 없으니까. 이런 방식, 이런 생각이었는데 심리 치료라는 건 사실 논리적인 것이 아니잖아요. 그것보다는 정말 제 마음에 안정이나 치유나 평화 같은 거죠.
그런 측면을 다시 생각해봤을 때, 제가 그렇게 힘들었던 이유는 성폭력, 성추행 그 자체보다는 그 일이 있은 이후에 혼자 고립됐고 불안함 속에 떨었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제가 심리치료 과정에 대해 책을 내면서 가족들도 이제는 다 알게 됐습니다. 알지만 우리가 그걸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진 않아요. 그렇지만 이제는 그 친척 그 가족에 대해서는 가족들이 저에게 알리지 않고 제 앞에서 그 사람들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심리치료 이야기를 할 때 많은 분들이 저에게 그래서 치료받기 전과 후가 어땠어? 이렇게 물어보세요. 그런데 그걸 굉장히 명쾌하게 도식적으로 제가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지금도. 내가 어떤 나의 트라우마를 집중적으로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나누고 있다는 것. 이렇게 여러분께 들려드리고 또 거기에 대해서 되돌아보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설명하고 해석하고 마음을 다시 다잡는 그런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것. 그런 부분이 저를 변화시켰습니다. 굉장히 근본적으로.
그리고 부모에 대한 어떤 원망의 마음, 혹은 고립된 마음 같은 것도 아직 전부는 아니지만 많이 바뀌고 있는 것 같아요. 당시 엄마가 제가 그 사촌 오빠와의 일화를 살짝 스무 살 넘어서 한 번 이야기했을 때 그랬거든요 엄마가.
아니. 그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엄마는 남자들이 그렇게 득실거리는 시골집에서 살았고 우리 집에 머슴도 엄청 드나들었는데 그런 일이 없었겠냐고. 숱하게 있었지. 이렇게 넘어가셨거든요. 물론 굉장히 구체적인 묘사나 상황은 모르셨어요. 그걸 아셨으면 달랐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은 그 말이 너무나 마음에 걸려요.
엄마가 겪은 일들은 뭐였을까. 엄마는 아직도 마비되고 있고 겁먹고 있구나. 엄마가 평생 가도 그 이야기를 저한테 안 해줄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이야기는 엄마에게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제 친구에게도 있고 여러분께도 있고 엄마의 엄마들에게도 있고. 때로는 당사자들의 이야기로도 들을 수 있고. 때로는 눈빛이나 지나가는 말로도 들을 수 있고. 그리고 때로는 듣지 않아도 알아요. 저는 그 듣지 않은 혹은 들은 이야기들 때문에 이렇게 저의 내밀한 이야기를 아픈 이야기를 쓰고 말하는 사람이 됐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록산 게이의 책을 읽는 내내 가장 마음에 남았던 단어는 '강인하다'라는 표현이었어요. 록산 게이의 성폭력 경험은 지속적이었잖아요. 그 이야기를 또 하고 할 수 있는 어떤 용기? 바닥까지 내려가는 고통? 그런데 죽지 않고 다음 날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몸 때문에 좌절하고 몸 때문에 호텔 방에서 혼자 몇 시간씩 울고 그런데도 또 다음날 일어나 세상으로 나와서 또 말하고 글을 쓰는 작가로 살아가는 것. 그건 강함인 것 같아요. 저는 제 안에도 여러분 안에도 강함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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