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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Jun 19. 2022

결혼했고, 아이가 세 살입니다

  스물여섯 살 수경은 밀물처럼 밀려드는 삶에 정신없이 쫓기고 있었다.

  양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좋아하던 일을 내던지고, 시집살이까지 자처하며 강행한 결혼의 대가는 혹독했다. 허니문 베이비로 윤재를 임신하고, 출산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거기까지는 참을 만했다. 문제는 그녀가 윤재를 낳고 한 달만에 터졌다.

  평소,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세상 고민을 다 짊어진 사람처럼 힘들어하던 그녀의 남편이 덜컥 회사를 그만둬버렸다. 가족들과 상의도 없이 대기업에 사표를 던지고 나온 수경의 남편은 자신만의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어리석은 수재의 전형과 같은 남자였다. 똑똑하고 공부는 잘했지만 사업수단은 완전 꽝인 사람. 호기롭게 시작한 그의 사업은 몇 달만에 투자금을 모두 날리고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가량 수경의 남편은 벌여놓은 사업을 어떻게든 살리려 노력하다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처참한 실패였지만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뼈저린 교훈을 얻었으니, 수경은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환장하게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현실을 견딜 수 있고, 더는 상처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그때 수경은 그렇게 믿었다.  

  다행인 것은 어렵지 않게 그녀의 남편이 재취업했다는 사실이었다. 수경은 비로소 안도했다. 사실, 남편이 덜컥 회사를 그만두고, 수경은 의료보험이 제일 걱정이었다. 당시는 직장이 없으면 의료보험도 없던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지역 의료보험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마음고생을 하지 않았겠지만, 의료보험도 없이 신생아를 키우는 일상은 불안의 연속이었기에, 그녀는 남편이 다시 취직하고 매일 출퇴근을 하는 일상을 갖게 된 것에 감사했다.




  그러나 전업주부로서 수경의 삶은 불행했다.

  매일 반복되는 가사노동과 육아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티가 나지 않았다. 수경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묵묵하게 해내는 일에 점점 지쳐갔다. 게다가 그녀는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못했다. 새 옷을 사는 일은 엄두도 못 냈고, 오랜만에 친구에게 만나자는 전화가 오면 슬쩍 지갑부터 열어보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야 했다. 밥을 굶을 정도로 힘든 삶은 아니었지만, 그녀만의 돈주머니가 없다는 현실이 수경을 힘 빠지게 했고, 주눅 들게 했다. 

  당시 모든 집안의 경제권, 곳간 열쇠는 시어머니 강 여사가 쥐고 있었다. 갓 시집 온 새색시 수경에게 큰살림을 맡길 수 없다는 이유로 수경 남편의 월급은 봉투채 강 여사에게로 갔다. 시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힘겨운 시간을 보냈던 시어머니는 돈에 대해서 묘한 집착을 갖고 있었다. 다시는 가난해지지 않겠다는 의지로 근검절약에 앞장섰고, 수중에 들어온 돈은 무조건 통장으로 직행했다. 시어머니는 인색하다 싶을 정도로 그녀에게 돈 한 푼 주지 않았다. 아들의 월급을 고스란히 가져가 놓고, 아들 부부가 딴 주머니라도 차고 있는 양 생각했다. 강 여사의 수중으로 들어간 돈은 절대로 나오지 않았고, 시어머니는 늘 "돈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 시어머니한테 감히 용돈을 달라는 말을 할 며느리가 어디 있었을까? 수경은 애꿎은 남편만 닦달했다.  


  "나, 돈 좀 줘."

  "어휴, 내가 돈이 어딨어. 월급봉투채 엄마 다 드렸잖아. 당신이 직접 엄마한테 달라고 해."

  "아이 참. 나, 어머니한테 돈 달라는 말 못 하겠단 말이야."

  "왜 못해?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이상했다. 분명 수경의 남편이 벌어온 돈인데, 수경은 시어머니한테 남편이 벌어온 돈을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어렵고 무섭기도 했지만, 알량한 자존심 때문인지, 수경은 강 여사에게 돈을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결혼하며 비상금으로 가져왔던 알토란 같은 돈을 남편 사업에 밀어 넣고 빈털터리가 돼서 용돈이 필요했지만, 시어머니에게 용돈을 달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허튼 돈은 절대로 쓰지 않는 시어머니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더 그랬다.  

  강 여사는 외아들이 사업을 하겠다고 했을 때도 저축한 돈을 못 건드리게 할 정도로 돈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막내 시누이 결혼할 때 쓸 돈이라며,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돈이라며 시어머니는 돈주머니를 움켜쥐었다. 강 여사의 고집이 아니었더라면, 그 돈마저 다 날려버렸을 테니 결론적으로는 잘 된 일이었지만, 그때 수경은 그런 시어머니에게 조금 섭섭했었다.




  수경이 일을 찾아 나선건 용돈이 필요해서보다 전업주부의 삶에서 가치를 찾지 못해서였다. 살림이 재미없고, 요리에도 취미가 없는 수경의 성향 탓도 있었다. 시어머니의 지시를 받으며, 시어머니의 잔소리 아래에서 매일매일 노동을 반복하는 일은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밖에 나가서 이렇게 일하면 돈이라도 벌고 대우라도 받을 텐데...'  이런 마음이 들 때마다 수경은 우울했다. 회사 가기 싫다고 투덜거리며 매일 출근하는 시누이가 눈물 나게 부러웠고, 가끔씩 전화해서 회사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선주가 괜히 샘나서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즈음 수경은 주변의 모든 것이 부러웠다. 하다못해 일요일마다, 놀이터에서 만나는 윤재 친구 엄마도 부러웠다. 여상을 나와서 작은 회사 경리를 한다는 그녀에게선 커리어우먼의 향기가 뿜뿜 풍기는 듯해서 저절로 기가 죽곤 했었다. 전업주부의 삶은 그녀가 원하고 꿈꾸던 삶이 아니었다. 남편을 만나 벼락같이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비참한 삶을 살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그녀를 짓눌렀다.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누군가 툭, 손가락 하나만 갖다 대도 넘어질 것처럼 그녀의 삶은 위태로웠다. 무언가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더 큰 재앙을 초래할 것 같은 불안이 지속됐다.  


  수경은 조용히 일을 찾기 시작했다. 다시 공채에 도전해서 당당하게 자신을 찾고 싶었다. 마침, 6월 민주항쟁을 거치면서 새롭게 창간하는 신문사, 잡지사들이 소소하게 있었다. 조간신문을 뒤젹여 '기자 모집 공고'를 본 수경은 우선 가족들에게 아무 말하지 않고 원서를 냈다. 괜히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취직을 못하게 될 경우, 민망할 것 같아서 우선은 비밀 아닌 비밀로 했다. 서류전형에 합격하고 필기시험을 치게 되면,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둘러대고 시험장으로 갔다. 그렇게 최종면접까지 올라간 회사가 다섯 군데였다.


  "이력서가 좀 이상하네요. 자부? 자부(子婦)라면?"

  "네. 결혼했고, 아이가 세 살입니다."


  자소서가 없던 그 시절, 수경은 가족관계와 학력, 경력을 적어놓은 이력서에서 꼭 걸려 넘어졌다. 가족관계 란에 세대주이던 시아버지 이름을 적고, 그와의 관계를 며느리, '자부(子婦)'라고 적은 지점에서, 면접관들은 꼭 걸고넘어졌다. 그럴 거면 1차 서류전형에서 걸러내지, 왜 최종면접까지 와서 결혼한 사실을 들춰내며 시비를 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면접관들은 수경이 결혼한 사실에 놀라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과 동시에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바쁜 기자생활을 유부녀가 그것도 3살 난 아이를 둔 엄마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며 반문했다.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시부모님이 아이를 봐줘서 괜찮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야근이 잦은 직업인데 결혼한 여자가 어떻게 기자 일을 하겠느냐며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면접장을 나설 때마다 수경의 어깨는 축축 처지고 자존감은 뚝뚝 떨어졌다. 결혼한 여자라는 이유로 그녀를 받아주지 않는 사회가 야속했다. 

  비로소 수경은 결혼을 앞두고 회사에서 해고 통지를 받았을 때, 끝까지 버티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세상은 넓고 일자리는 많지만, 결혼한 여자에게는 그 모든 것이 예외라는 것을, 알면서도 간과해버린 그녀가 얼마나 얼치지 바보였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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