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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Mar 29. 2023

근검절약 달인의 오해


  수경의 집 거실은 늘 어둡다. 속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벽걸이형 대형 TV가 있는 그녀의 거실이  영화관 같아서 좋겠다며 부러운 시선을 보내는데, 수경은 이런 상황이 꼭 싫은 건 아니면서도 왠지 찜찜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얼떨결에 그녀의 거실이 영화관이 된 것은 모두 시어머니 강 여사의 근거 없는 절약정신 때문인데... 이로 인해 젊은 날의 수경은 상처 아닌 상처를 받곤 했었다. 


  강 여사는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꼭 거실로 나온다. 그녀의 방에도 50인치 텔레비전이 있지만, 거실 TV가 더 크다는 이유로 늘 거실에 나와 채널권을 독점하고 있다. 그나마 요즘에는 더 악화된 청력 때문에 아예 TV볼륨을 최소로 해 놓았지만, 예전에는 집안이 떠나갈 듯 볼륨을 높여서 TV를 틀어놓는 바람에 온 식구들이 소음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음에 몇 시간 시달리다 보면 머리가 띵해져서 죽을 것 같았는데, 착한 식구들은 강 여사어 딱한 처지를 생각해서 아무 말도 못 했었다. 결국, 집에 놀러 왔던 시누이가 노발대발하며, 식구들 좀 그만 괴롭히라고 강 여사에게 한바탕 난리를 한 다음에야 소음 고문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문제는 요즘도 가끔 강 여사가 수경과 둘이 있을 때 볼륨을 60까지 올린다는 것. 예전의 수경은 눈물을 머금고 참았지만 요즘의 수경은 가차 없이 리모컨을 들고 볼륨을 줄이는 과감성을 발휘한다.)


  강 여사는 거실에서 TV를 볼 때마다 거실등을 다 꺼버린다. 불빛이 싫다는 이유 반. 전기를 절약해야 한다는 이유가 반이다. 그녀의 전기 절약정신은 부엌 식탁등을 향해서도 마수의 손길을 뻗힌다. LED등이라 전기요금이 얼마 안 나온다고 몇 번을 말해도 소용없다. 거실이 어두워서 켜놓은 식탁등까지 꺼버리니 집안에는 TV불빛만 반짝이게 된다.


 "또 식탁등을 켜놨네? 쯧쯧쯧 전기요금 무서운 줄도 모르고"


  전기요금이 무섭다는 강 여사는 안방이며 거실까지 온통 TV를 켜놓고 산다. 귀도 안 들리는 양반이 TV를 틀어놓고 신문을 읽으며, 천하태평이다. 평범한 사람들이야  눈으로 신문을 읽으며 귀로는 TV를 듣는다지만,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 강 여사에게는 불가능한 일일 텐데 말이다.  


  전기요금에 관한 강 여사의 모순은 하나 더 있다. 믹스커피와 따뜻한 물을 즐겨 마시는 강 여사는 전기주전자를 수시로 쓰는데, 문제는 물을 끓일 때마다 주전자에 물을 가득가득 담아 놓는다는 것이다. 수경이 강 여사에게 "어머니, 제발 쓰실 만큼만 물을 끓이세요."라고, 백 번을 넘게 말해도 소용없었다. 

  전기주전자에 물이 가득하면 다음에 물을 끓일 사람이 곤란해진다고 읍소를 하면 강 여사는 마지못해 "그래 알았다."라고 대답은 하지만, 그뿐이었다. 늘 실천은 없었고, 뒷감당은 수경의 몫이었다. 물을 빨리 끓이려면 주전자에 담긴 물을 쏟아버려야 하는데, 아까운 생수를 그냥 버릴 수 없으니, 커다란 그릇에 주전자에 담긴 물을 따라 놓고 나머지 물을 끓이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했다. 


  "어머니, 전기주전자에 물을 가득 넣고 끓이시면 전기요금이 많이 나가요."

 

  참다못한 어느 날, 수경은 강 여사가 늘 주장하는 전기요금을 언급한 적도 있었다. 조금 치사했지만, 그렇게라도 하면 전기요금에 벌벌 떠는 강 여사가 전기주전자에 물을 조금 넣으실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근검절약의 달인 강 여사가 의외로 세게 나왔다.


  "그깟 거 몇 푼이나 한다고."


  순간, 사르르 수경이 가슴이 저려왔다. 몇 푼 안 되는 전기요금 때문에 시어머니 강 여사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던 아주아주 오래된 옛날 기억 하나가 불쑥 그녀를 덮쳤다. 윤재가 돌도 안된 시절 이야기니... 오래돼도 아주아주 오래된 기억이지만, 수경에게는 바로 어제 일어난 일 같았던 일이었다. 





  어린 시절 윤재는 동네가 떠들썩한 까탈이었다. 입이 짧아서 잘 먹지도 않고, 예민한 성격 때문에 잠도 잘 못 잤다. 밤에는 한두 시간 간격으로 일어나 울어댔는데, 아이가 울기 시작하면 수경은 얼른 주방으로 달려가 윤재 분유부터 타야 했다. 요즘에야 거의 자판기 수준으로 분유를 타는 기계까지 나왔다지만, 35년 전에는 가스불에 물을 끓이고, 끓인 물을 젖병에 넣고 분유를 넣은 다음에 찬물에 젖병을 식혀서 알맞게 식었다 싶을 때, 아이에게 분유병을 물리곤 했었다. 그 사이, 배고픈 아이는 울고불고 난리를 하고 있으니, 수경의 마음은 늘 콩닥콩닥이었다. 배고픈 아이 걱정과 우는 아이 때문에 식구들이 깰까 봐 노심초사해야 했다. 사실 그렇게 분유를 만들어 주어도 아들은 눈곱만큼만 먹고는 젖병을 밀어내며, 분유를 안 먹겠다고 울어댔었다. 지금은 세상 둘도 없는 순둥이 녀석이 그 당시에는 왜 그렇게 까탈을 부렸는지...   


  그렇게 매일 마음을 졸이던 수경은 어느 날, 나름의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아이가 먹을 물을 저녁에 미리 끓여 놓고, 아이가 깨어나 울면, 젖병에 끓인 물과 분유를 넣고 잘 섞어서 전자레인지에 30초 정도 데우면, 시간을 엄청나게 절약할 수 있다는... 그야말로 그 당시에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 당시에는 전자레인지가 있는 집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수경은 전자레인지가 있어서 가능한 자신의 계획에 내심 흡족했고, 전자레인지를 혼수로 가져온 자신이 뿌듯하기도 했었다. 

  다음 날, 수경은 당장 실천에 나섰다. 어김없이 새벽에 깬 윤재가 배고프다고 울어댔고, 수경은 전날 미리 끓여놓은 물을 젖병에 담고 분유를 넣고 잘 흔들어서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땡! 경쾌한 소리와 함께 그녀가 따뜻하게 데워진 젖병을 전자레인지에서 꺼내려고 할 때었다. 평소에는 아이가 울어대도 세상모르고 주무시던 시어머니가 그날따라 주방으로 나오고 있었다.


  "새아가. 너, 지금 뭐 하는 거니?"

  "윤재 젖병 데워요."

  "그러니까 왜, 윤재 젖병을 전자레인지에 데우는 거냐고?"

  "윤재에게 빨리 분유를 먹이려고요. 이렇게 하니까 훨씬 빠르거든요."

  "너, 정말 정신이 있는 애니, 없는 애니?"

  "네? �"


  사실, 시어머니는 "윤재 젖병을 왜 전자레인지에 데우느냐"는 부분부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잔뜩 화가 난 얼굴이었지만 수경은 애써 외면했었다. 방에서 죽어라 울어대는 아이에게 빨리 분유를 먹일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강 여사는 수경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애지중지하는 손자가 우는 것도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전기요금이 얼마나 비싼데 전자레인지로 분유를 데워?"


  이미, 강 여사의 눈은 화가 가득했고 얼굴에서는 비난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뭐라고 대꾸를 했다가는 말이 길어질 게 뻔했다. 지금 같으면 강 여사가 전기요금에 대해 오해하는 것을 바로잡아주고, 그깟 전기요금 나와봤지 얼마나 나오겠느냐며, 말대꾸라도 하겠지만 그 시절 수경은 호랑이 시어머니 앞에서 꼼짝 못 하고 벌벌 떠는 토끼 같은 존재였다. 그날 새벽, 수경은 눈물이 쏙 빠지도록 강 여사에게 야단을 맞았다.  다시는 전기요금이 많이 나오는 전자레인지로 윤재 분유를 데우지 않겠다는 항복선언을 하고서야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수경은 남편에게 그날의 일을 털어놓은 적 있었다. 사실, 그날 남편도 집에 있었만 한 번 잠이 들면 세상이 무너져도 모르던 남편은 그날 새벽에 고부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남편에게 그날의 서러움을 말하지 않은 그녀의 탓도 있었지만... 그 시절 수경은 구구절절 남편에게 시어머니의 만행을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나름 그녀가 남편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가끔 그녀의 배려와 사랑을 몰라주는 남편 때문에 서운하지만 그것마저도 수경은 감수했다. 어쨌든 30년 세월이 지난 다음 털어놓은 그날의 일화를 들은 남편의 반응은 엉뚱했다.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아마, 전자레인지에 젖병을 데우면 환경호르몬 나오니까 그러신 걸 거야.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가 은근히 과학적이셨네. 하하하"


  수경도 안다. 남편의 말에 악의가 없었다는 것을. 자기 엄마 때문에 상처받았을 아내를 위로하려니 그것마저 쑥스러워서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는 것을. 펄펄 끓인 뜨거운 물을 플라스틱 젖병에 넣어도 환경호르몬이 나오고, 전자레인지에 플라스틱 젖병을 넣고 물을 덥혀도 환경호르몬에 노출된다는 것을. 

  문제의 핵심은 환경호르몬이 아니라 강 여사가 요상한 전기요금 절약 상식이라는 것을, 남편도 물론 알 것이다. 알아도 효자 남편은 시어머니 강 여사를 끝까지 두둔할 것이다. 강 여사로 인해 거실이 어두워도, 그녀가 방에 TV를 켜놓고 나와서 전기를 절약한다고 거실의 LED등을 꺼버려도, 무조건 강 여사가 하는 일을 옹호할 거다. 수경은 강 여사가 부럽다. 동시에 서럽다. 역시 남편은 남의 편이었고, 그 남은 바로 시어머니라는 현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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