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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Jul 09. 2023

곳간 열쇠를 사수하라 2

결혼 7년 만에, 강 여사와 치열한 갈등과 싸움 끝에 수경은 드디어 곳간열쇠를 거머쥐었다. 남들에게는 별 일도 아닌, 처음부터 시부모를 모시지 않고 살았던 그녀의 친구들에게는 당연했던 일이 수경에게는 7년 만에 일어난 것인데,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어렵게 재취업한 신문사가 폐업하고, 일자리를 잃은 수경은 우연찮게 번역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처음엔 애니메이션 같은 영상번역을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출판사 편집자를 통해 본격적으로 책 번역을 시작했다. 큰돈을 벌지는 못해도 꾸준하게 수입이 이어졌다. 당연하다든 듯, 강 여사는 수경의 원고료도 차압하려고 들었다. 수경이 일하는 사이에, 윤재를 봐준다는 빌미로 그녀에게 돈을 요구했다.


"맞벌이한다고 흥청망청하면 절대로 돈을 못 모은다. 이제부터 새아기 네가 번 돈으로 살림하고, 윤재아비 월급은 모두 저금하자."


그녀의 월급에도 마수의 손길을 뻗히는 강 여사의 당당함에 수경은 당황했지만 곧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가진 것 없는 수경 부부가 시부모 부양까지 하며 살려면, 근검절약만이 살길이라는 강 여사의 말이 백 번 천 번 옳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수경부부의 미래를 걱정해 주고, 챙겨주는 시어머니가 고맙기도 했다.

강 여사도 가정 경제를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 예전에 수경이 출근할 때, 집안일을 다 해놓고 나가라던 시어머니가 순순히 살림을 맡겠다고 나섰다. 윤재까지 봐주신다니, 수경은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다. 물론 그녀의 착각이었지만. 그래도 강 여사는 예전보다 수경을 대신해서 집안일을 많이 거들어주었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대신 수경은 번역료로 받은 돈 가운데 일정액의 돈을 강 여사에게 생활비로 주었다. 생활비로 책정한 금액이 넉넉했고(실제 수경은 수입의 90% 이상을 생활비로 내놓았다), 윤재가 유치원에 들어갈 때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윤재가 유치원생이 되고, 돈 들어갈 일이 많아지자 강 여사는 지금 생활비로는 윤재 유치원 비용까지 감당할 수 없다며 다시 돈타령을 시작했다. 수경에게 생활비를 더 내놓으라는 건데, 수경 입장에서는 시어머니한테 더 드릴 돈이 없었다.


"어머니, 저는 생활비를 더 드릴 여유가 없어요. 그러니까 윤재아빠 월급에서 돈을 좀 찾아 쓰세요."

"그건 절대로 안 된다."

"왜요?"

"윤재아비 월급은 고스란히 저축할 거야."
"그럼, 윤재 유치원을 보내지 말까요?"

"네가 생활비를 더 주면 되잖니?"

"아이참, 몇 번을 말씀드려요. 드릴 돈이 없다니까요?"


사실, 수경에게 돈이 조금 있기는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을 조금 더 벌기는 했다. 그즈음 수경은 친정아버지가 다시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친정을 돕느라 아르바이트로 다른 일을 병행하고 있었다. 야속하게도 곳간 열쇠를 거머쥐고 있던 시어머니는 수경의 친정이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돈 병원비에 보태라고 돈 한 푼 주지 않았다. 수경은 그런 시어머니가 서운했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강 여사는 늘 돈이 부족한 삶을 살고 있기에 남에게 줄 돈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수경은 시댁 식구들에게 표 나지 않게 친정을 돕고 싶었다. 가난한 친정을 둔 자격지심도 있었지만, 돈 벌어서 친정에 다 가져다준다는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수경은 백방으로 일자리를 알아봤고, 마침 유명 여성 잡지사에서 프리랜서 기자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남편은 물론이고 시댁식구 몰래 일하느라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수경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힘든 동안에 시어머니는 물론이고 남편조차 그녀의 집안일을 도와주지 않았으니, 피장파장이었다. 수경이 잠을 줄여가며 번 돈이기에 친정으로 돈을 보내면서도 그녀는 당당했었다. 비밀리에 일을 한 건 미안했지만, 그 일을 하느라 집안일에 소홀하지 않았으니까. 


솔직히 강 여사가 도와주는 집안일은 비양심적이었다. 수경이 번역작업을 마치고 도서관에서 돌아오면, 그 순간부터 강 여사는 며느리에게 모든 집안일을 맡기고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주말에는 무조건 쉬겠다는 강 여사 때문에 수경은 주말마다 집안청소부터 빨래, 밥까지 모든 일을 하느라 허우적거려야 했다. 강 여사는 또, 윤재를 보살피다가도 딸들이 급한 일이 생겼다고 엄마를 부르면, 시아버지한테 윤재를 맡기고 딸네 집으로 바람처럼 가버리곤 했었다. 그래서 일거리를 싸들고 도서관에 가려던 수경이 집안일로 발목을 잡힐 때가 종종 있었다. 수경이 도서관에서 일하는 동안 시어머니가 딸네 집으로 가버린 경우도 왕왕 있었는데, 그때마다 시아버지는 갑자기 손주를 맡게 되는 것이 불만이었는지, 수경에게 일을 그만두라며 심술을 부리기도 했었다.    






"고얀 것! 너, 지금까지 나를 속였구나?"


번역거리를 챙겨 들고 도서관으로 출근하려던 수경 앞을 강 여사가 막아서며 언성을 높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수경이 놀란 눈으로 시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네, 통장에 찍힌 돈! 00 잡지사에서 매달 돈이 들어오던데, 그건 뭐니?"


수경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강 여사가 수경의 통장을 뒤져봤다는 사실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어머니, 제 통장을 뒤져보셨어요?"

"그래. 네 방 청소하다가 방바닥에 떨어진 통장을 봤다. 왜?"


그럴 리 없었다. 평소, 강 여사는 수경의 방을 청소해주지 않았고, 수경이 통장을 방바닥에 떨어트릴 일은 더더욱 없었다. 괜히 시댁식구들 몰래 아르바이트하는 것이 미안해서, 행여 남편이라도 볼까 봐 수경은 통장을 서랍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두고 살았다. 서랍 속에 꽁꽁 감춰둔 통장이 제 발로 걸어 나와서 방바닥에 널브러질 리도 없었다. 결론은 하나. 그녀가 없는 사이에 강 여사가 수경의 방을 뒤졌다는 것. 부르르 떨리는 몸을 겨우 진정시키며 수경이 낮은 목소리로 또 물었다.


"어머니, 정말로 제 서랍을 뒤져서 통장을 보신 거 아니세요?"

"글쎄, 방바닥에 떨어져 있었다니까.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하니, 넌 내가 그렇게 윤재 유치원비가 필요하다고 생활비 좀 더 달라고 했는데, 돈 없다고 딱 잡아뗐더구나? 참 뻔뻔하기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시어머니라는 이름으로 그간 수경에게 저지른 강 여사의 만행을 며느리라는 이름으로 꾹꾹 눌러 참아온 것이 너무 억울했다. 마음 같아서는 소리소리 지르고 시어머니를 상대로 한바탕 전쟁이라도 치르고 싶었지만, 수경의 이성이 그녀를 붙잡았다. 참아야 한다. 그래도 어른인데, 어른한테 예의는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화를 눌러 참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화를 억지로 누르려니 수경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수경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가만히 강 여사를 응시했다. 감추려고 애썼지만, 수경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네. 돈 없었어요. 어머니 드릴 돈, 없었어요. 어머니도 잘 아시잖아요. 지금 제 친정 상황이 어떤지. 거기 급한 불부터 꺼야 하잖아요."

"그렇다고 시에미가 필요하다는 돈은 나 몰라라 하니?"

"윤재 유치원비는 윤재아빠 월급에서 내면 되잖아요. 통장에 쌓인 돈 좀 찾아서 쓰면 뭐가 어때서 그러세요?"

"얘는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아니? 윤재아비 월급은 절대로 건드릴 생각하지 말라니까?"

"왜요? 왜, 건드리면 안 되는데요?"

"그래야 돈을 모으지!"

"어머니는 지금 돈 모으는 것만 중요하세요? 우리가 빚을 갚아야 할 것도 아니고,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아파트에 살고, 어머니 아들은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어요. 근데 왜 맨날 돈에 쫓기고 시달리면서 살아야 해요?"

"아니, 친정으로 돈이나 빼돌린 주제에 뭘 잘했다고? 뭘 잘했다고 시어머니한테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들어?"

"제가 뭘 빼돌렸어요? 제가 번 돈을 친정에 좀 나눠준 건데, 그게 뭐 그렇게 잘 못한 일인가요?"


괜히 며느리를 잡으려다 본전도 못 찾은 강 여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막무가내로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늘어놓으며 며느리 군기를 잡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주된 레퍼토리는 일하는 며느리를 대신해서 살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윤재를 봐주기가 얼마나 고된지, 며느리가 주는 적은 생활비로 다섯 식구 먹거리를 비롯해 살림을 꾸려나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는 거였다. 제대로 열받은 수경은 강 여사의 억지에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마지막 승부수를 띄었다.


"어머니, 그렇게 힘드시면 이제 그만하세요. 살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제 없는 돈으로 생활비 꾸리느라 더는 고생하지 마세요."


말은 부드럽게 했지만, 수경은 이 기회에 곳간열쇠를 가져오고 싶었다. 더는 돈돈 하면서 그녀를 괴롭히는 강 여사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수경의 태도에 화가 난 강 여사가 발끈해서 서랍에 넣어둔 통장을 꺼내 그녀 앞으로 던졌다. 그래, 네 까짓게 살림을 하면 얼마나 잘하겠느냐는 악담과 함께. 그렇게 수경은 결혼 7년 만에 곳간열쇠를 쟁취(?)했다.  





홧김에 수경에게 통장을 내준 강 여사는 다음 날, 가출(?)을 감행했다. 생전 처음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드는 며느리가 밉고 서운했던 강 여사는 시위라도 하듯 집을 나갔다. 시어머니의 부재로 수경은 당장 일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시아버지께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윤재를 받아달라고 부탁했지만, 늘 그렇듯 비협조적인 시아버지는 약속이 있다며 휘리릭 나가버렸다. 수경도 오기가 났다. 친정에 전화해서 여동생에게 SOS를 쳤다. 천사표 여동생이 한걸음에 달려와 윤재를 맡아주었다. 수경은 강 여사와 벌인 곳간열쇠 다툼을 남편은 물론이고 시댁식구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남편은 시어머니 강 여사가 왜 집에 없는지 묻지도 않았다. 평소처럼 딸네 집에 갔나 보다 생각했던 것 같다. 시아버지도 수경에게 강 여사가 어디 갔는지 묻지 않았다. 서로 극도로 싫어하던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한 집에 살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무시하고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강 여사의 가출이 일주일로 접어들 무렵, 큰 시누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올케. 엄마 계셔?"

"아뇨. 지금 안 계세요."

"엄마가 안 계시는데도 올케 목소리가 평화롭네?"

"네?"

"만약에 엄마한테 무슨 일 생기면, 나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

"명심해. 우리 엄마한테 조금이라도 일이 생기면..."


큰 시누이의 협박(?) 전화가 끊어지자, 둘째 시누이의 전화가 이어졌다.


"수경 씨! 내가 정말 미안해. 우리 엄마 때문에 고생이 많지?"

"아뇨. 저도 잘한 거 없는데요, 뭐."

"아니야. 내가 누구보다 우리 엄마 잘 알잖아. 그런 엄마를 모시고 사는 올케한테 늘 고맙고 미안해. 사실, 우리도 지금 엄마가 어디 계셨는지 잘 몰라서 찾고 있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 곧 돌아오실 거니까."


달라도 너무 다른 시누이들의 전화는 또 이어졌다. 셋째 시누이도 수경에게 미안해하며, 그간 고생했을 그녀를 위로했지만, 막내시누이는 냅다 소리를 질러가며 수경에게 화를 냈다. 수경보다 나이도 어린 시누이가 "너 때문에 우리 엄마가 우리한테 연락도 없이 사라지셨잖아? 너, 우리 엄마한테 무슨 일 생기면 내가 가만 안 놔둘 거야!"라며 악을 썼다.


강 여사의 가출사건은 열흘 만에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났다. 어느 날, 강 여사가 백기를 들고 투항하듯 집으로 들어오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흐지부지 마무리됐다. 수경은 강 여사에게 어디 가셨었는지 묻지 않았고, 강 여사 또한 지난 열흘간 어디에 있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딸들과 전화 연락은 한 것 같은데, 강 여사는 딸들에게도 있는 곳을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강 여사는 그녀의 가출로 인해 수경 부부가 싸움을 하고, 효자 아들이 그녀를 찾아서 여기저기 수소문해 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문제는 효자 아들이 엄마의 존재에 무심했다는 것. 수경이 강 여사의 가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일까, 무심한 성격의 수경 남편은 평소처럼 강 여사가 딸네 집에 갔나 보다 생각했었단다. 20년쯤 지나서 수경이 무심코 그날의 사건을 남편에게 이야기해 주자, 남편은 전혀 몰랐다는 얼굴로  


"어? 그런 일이 있었어? 난 당신이랑 엄마는 고부갈등 같은 건 전혀 모르고 산 줄 알았는데..."


라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참 속없이 편안한 남편이다. 수경은 혼자서 태평세월을 살아온 남편이 질투 나게 부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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