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베일> 그리고 서머싯 몸
서로 다른 궤적을 타고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우리. 인생에 똑 부러진 답은 없다고 하지만, 그럴싸한 발자취들은 괜찮은 선택지로 자주 들먹여지곤 한다. 성공한 인생. 서점에만 가도 자기들이 성공한 삶이라고 소리치는 활자들이 넘쳐난다. 그 소리가 극성이어서인지 아니면 남의 가도를 따르고 싶은 열망이 차곡차곡 쌓여서인지 주인들은 한 매대를 그들에게 넘겼다. 보란 듯이 하나의 장르가 된 그들은 매일마다 성공의 기준에 한 줄씩 덧줄을 친다.
성공하는 방법으로 가득한 책장. 여기저기 울리는 목소리가 넘치는 탓에 그 의미가 닳진 않을까 걱정이다. 이렇게 숱하게 자신의 길을 정도라 외치는 자기주장들 사이에서 서머싯 몸 형은 그런 건 없다고 말한다. <인간의 굴레에서>, <면도날>, <달과 6펜스>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기에 다시 말하는 게 민망할 정도지만, <인생의 베일>을 다시 읽으며 그것을 재차 느끼고야 말았다.
딱 1년 하고도 1개월 전쯤, <인생의 베일>을 처음 접했다. 이전에 읽었던 몸 형의 책들과 달리 사랑 이야기가 전두지휘를 해서 그런지 아아.. 마음 아픈 사랑... 흡하고 훌쩍 넘겨버렸던 것 같은데, 웬일인지 이번엔 그 울림이 다르게 다가왔다.
도. 우리들 중 누구는 아편에서 그 '길'을 찾기도 하고 누구는 신에게서 찾고, 누구는 위스키에서, 누구는 사랑에서 그걸 찾죠. 모두 같은 길이면서도 아무 곳으로도 통하지 않아요. (p. 390, 전자책 ver.)
노자의 도덕경을 얕게나마 한 번 훑어서일까. 위스키를 달고 다니는 통에 진중한지 가벼운지 헷갈렸던 워딩턴의 말이 새롭게 다가온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길을 찾고, 그 길을 걷는다. 그 길엔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다. 목적 없는 길이 방황은 아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생은 꾸미는 것이고, 그것의 무늬를 짜는 데엔 정답이 없다. 민무늬도, 화려한 무늬도 저마다의 특색이 있는 카펫처럼.
난 이런 의문이 듭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한갓 환영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그들의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역겨움 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는 유일한 것은 인간이 이따금씩 혼돈 속에서 창조한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들이 그린 그림, 그들이 지은 음악, 그들이 쓴 책. 그들이 엮은 삶, 이 모든 아름다움 중에서 가장 다채로운 것은 아름다운 삶이죠. 그건 완벽한 예술 작품입니다. (p. 444)
책과 함께 펼쳐지는 두 주인공이 있다. 월터와 키티. 푸른 눈빛에 적당히 잘생긴 얼굴.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표정이 냉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게 월터다. 세균학자란 직업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해도 그의 지적인 풍채를 뒷받침해 준다. 권력욕이 없어 아둔하게 느껴지는 키티의 변호사 아부지도 모처럼 만난 지적인 청년이라며 월터를 칭찬한다.
반면, 키티는 그의 말처럼 그냥 예쁘고 명랑하다. 화려하게 사교계에 등장했지만 적절한 남편감을 찾지 못한 그는 차일피일 결혼을 미루다 턱밑까지 차오른 나이와 자신을 짐짝처럼 대하는 어머니에게 떠밀려 덜컥 결혼한 말괄량이다. 똑똑하지 않고, 감정에 지배를 당한다. 심지어 책의 시작은 키티의 불륜이다! 사람 사는 이야기에서 편들기를 좋아하는 우리는 자연스레 월터의 편에 선다.
사랑에 대한 배신감으로 상처를 입은 월터. 자기 표현력이 약해 끙끙 앓곤 한다. 그러다 숨 한 번 깊게 들이마시고 툭하니 내뱉는 츤데레가 자기 고백을 하면서 철딱서니 키티의 위용은 극에 달한다.
나는 당신에 대해 환상이 없어. 나는 당신이 어리석고 경박한 데다 머리가 텅 비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의 목적과 이상이 쓸데없고 진부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이류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 당신에게 숨기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생각하면 한 편의 코미디야. (p. 153)
배신은 극의 장소를 홍콩에서 메이탄푸로 이끈다. 월터가 역병이 창궐한 도시로 키티를 데리고 지원에 나선 것. 홍콩에서 아흐레는 걸리는 메이탄푸는 문드러지고 있었다. 콜레라가 지위를 막론하고 구불구불한 거리를 따라 구석구석 퍼지고 있었다. 청명한 햇빛을 등에 업고 언덕을 따라 뛰어내리는 소년 시절을 간직할 법한 사내는 지저분한 거리에 한낱 몸뚱이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위풍당당한 전염병의 기세에 잔뜩 웅크리던 도시는 구원병인 세균학자와 그 부인을 품는다.
곳곳에 도사린 죽음들. 키티는 프랑스 수녀원의 초대를 받는다.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내려놓고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수녀들을 보며 키티는 감동을 느낀다. 곧, 그 역시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손을 보탠다. 가난 속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도우며 키티는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행복을 느낀다. 찰스(불륜남)와의 불장난이 무가치하다는 걸 깨달은 지는 오래. 그는 월터와 화해를 원하지만, 월터는 쉽게 응하지 않는다. 키티가 아니라 자신을 경멸한다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와 함께.
어떤 마을에 사는 남자가 잡종개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그 개가 남자를 물자 사람들이 미친개에 물린 남자가 죽을 거라고 법석을 떨지만, 남자는 상처가 낫고 정작 개가 죽었다. <올리버 골드스미스, '미친개의 죽음에 관한 애가'에서>
수녀들을 도우며 내적으로 성장한 키티. 그러나 키티와 월터는 영원히 친구가 될 수 없다. 키티의 성장세는 남 좀 꿰뚫어 본다고 자부했던 월터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메이탄푸에서 자멸할 것 같았던 키티의 영혼은 오히려 활기를 띄고, 오판에서 비롯한 자기경멸은 월터를 갉아 먹는다. 과거에 대해 용서를 갈구하는 키티에게 월터는 말한다. "죽은 건 개였어."
호사가가 되어, 이 사람 참 잘 사네를 책 속에서 꼽자면 누구일까. 얼굴도 괜찮고, 지적미 풀풀 풍기는 월터? 끊임없는 자기 관리로 차기 총독에 오를 거라 언급되는 찰스? 그를 잘 보살피는 도로시? 모든 걸 내려놓고 희생의 삶을 사는 수녀님? 경박하지만 자기 성장을 이룩한 키티? 완독을 했다면 누구 하나 꼽기 어려울 것이다. 저마다의 실로 수놓은 원단에는 비교할 수 없는 자기만의 이야기가 수록돼 있고, 그것을 짜낸 손에는 누구나 바늘에 찔린 상처가 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사는 삶에는 자기 경멸이 스며 있고, 권력을 목전에 둔 삶에는 멍청함이 서려 있다. 마냥 경박하고, 멍청해 보이는 삶에는 언제든지 긍정으로 회복할 수 있는 탄성력과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알겠지만, 평화는 일이나 쾌락, 이 세상이나 수녀원이 아닌 자신의 영혼 속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p. 316)
잘났다고 주장하는 삶은 많아도, 어느 하나 꼽을 수가 없다. 정답은 특정한 결과를 쫓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방식을 따라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삶을 꾸미느냐에 있다.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삶에도 아픈 손가락들이 줄을 지어 서있고, 한없이 불행해 보이는 인생에도 묘하게 웃음 지을 수 있는 순간들이 있다. 그래서일까. 몸 형은 말한다. 인생의 정답은 자신의 영혼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