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
위인의 생애 속에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금세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떠밀리고 마는 여성들에게도 그들만의 눈짓과 웃음, 어쩌면 눈물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저는 가끔씩 떠올려요. (p. 110, 전자책 ver. 이하 동일)
우리 집 현관을 유치원 모래밭으로 칠할 즈음부터 줄기차게 인명사전과 위인전을 읽었다. 하도 뒤적거리니 당시엔 책에 나온 인물들의 생몰연도까지 외울 정도였다. 책들은 본디 누나의 물건이었는데, 누나는 머리통이 커지고 나서 관심을 끊은지라 내가 독차지할 수 있었다. 이것들을 살필 때면 끈질기게 궁금했지만,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던 의문이 있었다. 남자는 많은데, 여자는 왜 적을까. 간혹 페이지 한쪽에 숨어있는 그들을 찾을 때면, 동그랗게 표시를 했다. 혹시 모를 그들만의 공통점을 찾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들은 쉽게 입을 열려고들 하지 않았다.
여성이어서 펜 하나의 무게가 유독 무거웠고, 여성이기에 목소리를 애써 집어삼켜야 했던 시대가 있었다는 걸 이제는 알겠다. 온갖 곤욕과 역경을 버텨 인명사전에 겨우 공간을 마련한 그들이 전보다 더 존경스러운 건 당연지사. 여전히 과도기적인 단계라 갈길은 멀지만, 오늘이 있기까지 무수한 여자들이 차별적 시선을 딛고, 자신을 드러냈다. 그중 한 명이 버지니아 울프다. 그는 자신의 연설을 담은 에세이 <자기만의 방>을 통해 차별 뒤에 숨은 혐오란 작자를 밝히고, 여성들에게 그만의 색채를 입힌 자유로운 상상을 요구했다.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시대가 있었다. 때문에 여성에겐 남성과 동일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기회를 만지작거리는 것만으로도 못 미더운 취급을 받곤 했다. 그런 현실을 버지니아 울프는 셰익스피어에게 누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의미심장한 상상으로 꾸며낸다. 그는 셰익스피어 못지않게 재능을 지녔지만, 그것을 드러낼 방도가 없었다. 그가 가진 자질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만,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다. 참을 수 없던 그는 신혼집을 나와 무작정 런던으로 나선다. 어찌어찌 연극과 관련된 일은 하지만, 당시는 여성이 극에서 여성 역할도 맡을 수 없었던 상황. 갖은 비웃음 속에 그는 자살하고, 길거리에 묻힌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러한 차별의 원인 중 하나를 남성에게서 찾는다. 신문에서 교수가 여성이 열등하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고, 나폴레옹과 무솔리니가 여성의 열등성을 주장한 이유. 그것은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다.
여성이 열등하지 않으면 그들은 더 이상 커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중간 생략) 여성이 진실을 말하기 시작하면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작아질 테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신감이라는 자질 또한 줄어들 테니까요. (p. 86)
정복과 지배가 보편적 가치던 시절이 있었다. 칼을 빼내기 위해선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은 필수였고, 인류의 절반이 선천적으로 열등하다는 인식은 이에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가치는 시간이 흐르듯 언제든 변한다. 퇴색한 가치가 옳냐 그르냐를 훗날에 와서야 왈가왈부하는 건 의미 없는 일. 버지니아 울프는 "어떤 재능이 어떤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더라도 결국 그런 가치는 변할 테고, 한 세기 뒤에는 틀림없이 완전히 달라져 있을 테니까요"(p. 96)라 말하며, 해묵은 논리에 휘둘리지 말 것을 주장한다. 대신 이제라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망설일 게 아니라 당당히 나설 것을 요구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보호받아야 된다는 생각이 사라지면 무슨 일이든지 가능할 거(p. 97)라는 신념과 함께.
버지니아 울프는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인류 전체에 손해라 주장한다. 문학을 살펴보자. 여성이 책을 낸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로 여겨져 왔다. 아름다운 운율로 문장을 구사해도 지인들끼리 나누며 숨길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글을 쓸 공간도 없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져야 하는 원고지는 그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자질구레한 잡일들이 하루에도 여러 번 반복되는 공유공간 속에서 여성들은 펜을 쥘 책상 하나, 의자 하나 갖지 못했다. 그렇게 진가를 볼 수 없었던 재능들은 주인공 중심의 역사에 나서지도 못한 채 뒤안길을 따라 나가야 했다.
두 사람(제인 오스틴, 샬럿 브론테)은 남성의 글쓰기를 모방하지 않고 여성다운 글을 썼어요. 동시대에 소설을 쓴 수많은 여성 가운데 이 두 사람만이 영원불멸한 현학자의 끊임없는 잔소리를 철저히 무시했어요. 이 두 사람만이 그 끈질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요. (p. 180)
그럼에도 글을 써낸 여성들이 있었다. 아프라 벤(Aphra Behn)과 앤 핀치(Anne Finch)는 여성들이 출간을 하기 위한 초석을 다졌고, 제인 오스틴(Jane Austen)과 샬럿 브론테(Charlotte Bronte)는 그 재능을 세상에 뽐냈다. 그들은 남성 중심의 글쓰기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방식으로 문장을 꾸렸고, 오늘날까지 만인에게 사랑받는다.
만약 여성에게도 애초부터 글 쓸 여지를 주고, 사회적 시선을 떠나 출간의 자유를 보장했으면 어땠을까. 역사학자는 베일에 가려진 옛 여성들의 삶을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더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지면 곳곳을 굴러다녔을 것이다. 특히, 우리들의 책장 속에 꽂힐 풍부한 명저들로 인류의 자산은 그 가치를 늘렸을 것이다. 절반의 입을 다물게 함으로써 우리는 더한 상상력과 지혜를 쌓을 기회를 날리고 말았다.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세상 그리고 지금 역시 성별로 인한 다툼은 여전히 흔하고, 차별은 군데군데 숨어 있다. 성별만이 아니다. 세대 간 간극은 점차 벌어지고 있으며, 여러 소수자들은 자신들에게 마땅한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데 맞서고 있다. 이러한 다툼들은 미디어에서 자주 다뤄지고, 여전히 논쟁적이다. 때론 논리 없는 언어들 일색이라 가파른 갈등의 골은 영영 메울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택시에 오르는 남녀 한 쌍을 보는 순간, 그때까지 분열되어 있던 제 마음이 다시 한데 뭉치며 자연스럽게 융합하는 듯 느껴졌어요. 그 까닭은 틀림없이 여성과 남성이 서로 협력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일 거예요. 우리에게는 남녀의 결합을 통해 최고의 만족과 완벽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이론에 동조하려는, 어쩌면 비이성적일 수도 있는 뿌리 깊은 본능이 있어요. (p. 233-234)
이때 버지니아 울프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서로 함께 살아야 그 가치를 발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밑도 끝도 없는 논쟁도 있지만, 우린 늘 같이 존재해 왔다. 여성과 남성이 있었기에 인류는 지속할 수 있었고, 이전 세대가 있었기에 오늘의 세대까지 이을 수 있었다. A를 잘하는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B를 잘하는 사람도 있다. 다름이 갑자기 툭 튀어나와 주먹다짐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 사이엔 언제나 다름이 있었고, 이들의 조화가 사회를 지속해 오고 있었다.
그렇기에 버지니아 울프는 외친다. 돈을 벌고 자기만의 방을 가지라고. 현실성과 함께 살아가라고, 활기찬 삶을 살아가라고(p. 264). 다름은 다툼을 불러오곤 했지만, 결국 그 다름이 각자 목소리를 냈을 때, 사회는 발전을 이루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올곧게 고민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에서 목소리를 그리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울프의 목소리가 향하고 있는 여성들은 물론, 다름으로 인해 고통받는 누구든지 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