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논하려다 지옥에 떨어져 버린 글
올여름이었던가. 신박한 형태의 유튜브 채널이 상승세를 탔다. 남아시아 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컨셉이었다. 선생님 역할을 맡은 사람이 한 문장을 알려주면, 학생들이 '우가우가' 하듯 춤을 추며 그 문장을 따라 했다. 문장은 한국인들에게 신청을 받았다. 생일 축하 메시지부터 친구들끼리 할 법한 장난스러운 어구들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 영상을 보니 자막으로 만원 대에 원하는 문구로 동영상을 만들어 주겠다고 한다. 정글에서나 볼 법한 사람들이 한국어를 이렇게 활용한다는 게 신기하고, 이러한 수입창출 방식이 새롭게 느껴져 친한 친구들에게 공유하려 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이런 것에 웃어도 되는 걸까.'
어쩌다 나는 우리가 웃는 이유에 대한 논리를 살핀 적이 있었다. 수업이었는지 우연히 훑은 책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J. 모리얼이 분류한 것으로 우리가 웃는 이유를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1) 우월감을 느꼈기 때문에 2)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3) 긴장감이 해소됐기 때문이다. 이런 분야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이론이 옳은지 혹은 옳지 않은지 판단하긴 어려웠다. 다만, 우리가 유튜브 채널을 보고 웃은 이유가 알량한 우월감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친구들에게 공유하지 않았다. 공자 형님이 즐겨 내세우던 '기소불욕 물시어인', 즉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도 시키지 말아라를 들어보자. 한국인이 우리 언어를 가지고 이런 식으로 동영상을 만들면 어땠을까를 고려했을 때, 썩 반갑지만은 않았다.
이렇게 지극히 자의적인 결론을 내리면서도 혼란스러운 건 여전했다. 당장의 결론은 '친구들에게 공유를 하지 말고, 나도 굳이 보진 말자' 정도였지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동영상을 소비하는 게 옳을까에 대해선 여전히 답보 상태였기 때문이다. 영상 소비에 께름칙하면서도 확답을 내리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월감이 웃음의 원인이 아닐 수 있고, 혹여 그렇다고 해도 해당 영상을 즐겨본다는 것만으로 문화에 대한 우월의식으로 이어질지 확실하지 않았다. 한편으론, 다른 유머에 우월감을 느끼면서 깔깔거리길 그치질 않으면서 단지 다른 문화라는 이유로 엄격하게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해당 채널을 통해 그 문화의 구성원이 경제적 이익을 취할 수 있는데, 마냥 부정적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참신한 외화벌이를 두고 그 문화권에 속하는 지역 주민들이 싫다고나 할까. 요래조래 갈팡질팡하는 사이 이런 사소한 웃음거리에도 도덕적 잣대를 두고 고민하는 내가 너무 피곤한 삶을 사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책 <불온한 것들의 미학>을 읽으며, 짧게나마 치열했던 그때의 고민이 다시금 떠올랐다. 미학을 기반으로 농담에 관한 논의를 펼친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농담에 따른 유머를 도덕적으로 고찰해본다는 점에서 본질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판단했다. 아무튼 저자의 논리를 부족하게나마 내 방식대로, 주야장천 언급했던, 한 유튜브 채널을 시청하는 게 옳을까에 적용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해당 채널이 시청자에게 미치는 영향이나 효과적 측면이 있겠다. 예를 들면, 내가 그 채널을 시청함으로써 한 문화를 일종의 하등 문화로 본다던가, 쓸데없는 편견이 생길까 염려했던 것처럼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는 우연적이다. 그때 누군가가 인류학 책을 즐겨 읽고 있던 터라 소수 문화에 대해 친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희화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채널에 대해 반감을 느낄 수 있겠다. 반면에, 여러 문화를 접할 기회가 부족했던 사람들은 해당 채널이 그 문화를 친근하게 느끼는 발판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보는 시청자에 따라 우연적으로 다채로운 결과를 낳을 수 있으므로, 해당 채널이 시청자에게 미치는 영향적 측면에서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엔 무리가 있다.
한편으론, 창작자의 의도도 있겠다. 어떤 예술적 작품이 성차별이나 인종차별의 목적을 두고 만들어진 거라면 윤리적으로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반면, 인종차별적 묘사를 통해 인종차별에 대한 경고를 내리는 거라면, 도덕적 결함 가득한 작품으로 보긴 어렵다. 이와 같은 방식을 해당 유튜브 채널에 적용해보면, 그렇게 문제 될 건 없어 보인다. 유튜브 채널을 잠깐 살피더라도 해당 문화와 우리나라와의 우애를 다루는 콘텐츠가 군데군데 있는 것을 보면 재미를 수단 삼아 양문화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이 보인다. 자신의 문화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창작자가 자신의 문화를 악의적으로 활용한다고 판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설익은 결론을 내리자면, 도덕적 이유로 해당 채널을 시청하기를 망설일 이유는 크게 없다고 본다.
관점이 불분명하고 논쟁적이더라도 이들이 인간의 욕망, 가족, 인간 존엄 같은 윤리적으로 묵직한 주제들에 대해 숙고하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의 도덕적 가치는 충분하다. (p. 248)
얄팍한 결론을 내리면서, 날카롭게만 느껴지던 보편적인 윤리적 잣대는 의외로 뭉툭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판단을 내리는 기준을 쉽사리 세울 수 없기 때문이랄까. 한 유튜브 채널을 바라보는 관점도 개개인의 백그라운드에 따라 이해를 하는 과정과 따르는 생각 그리고 감정이 천차만별인데, 옳고 그른가를 따질 수 있는 것일까. 한편으론 비록 미학에 관한 책이지만, 거기서 차용한 논리를 근래 들어 비판받고 있는 여러 SNS 채널에 적용했을 때, 무작정 부정적이라고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에도 의문이 든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 자신을 곱씹어 본다는 것만으로도 도덕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변호한다면, 다분히 의도적인 채널만 아니라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생각할수록 얽히고설키기만하는 듯한 기분. 철학은 떠올릴수록 지옥에서 온 논리를 다루는 분야인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