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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젊은 채로 죽고 싶다고?

정신 차리는 데 도움 준 노래와 책들

by 저삶의

콜드플레이Viva La Vida라는 노래를 좋아하는데, 이 가사에 깊이 공감하게 될 줄이야.

만약 내가 뇌 손상이 온다면, 그전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노래할 것 같다.

이 가사의 화자인 전직 프랑스 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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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used to rule the world
Seas would rise when I gave the word
Now in the morning I sleep alone
Sweep the streets I used to own
나는 세상을 지배했었네
내가 명하면 바다도 일어났지
이제 난 아침에 홀로 잠자고
내 소유였던 길을 청소해
: 번역 by 뉴로살별




온라인에서 죽고 싶다는 하소연을 읽으면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면 그 증상으로 자기도 모르게 자살 사고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분했다.

그럼 뇌종양 한번 걸려 보시든가.’


적당히 살고 젊은 채로, 늙기 전에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글을 보면 코웃음이 났다.

원하실 대로 30~40대에 죽을병에 걸린다면 저 사람, 과연 순순히 받아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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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내 삶이 끝나도
아쉬울 게 없다고 했던
그때의 난 사실 잘난 체를 했었네
Now I realise
: 이찬혁 노래 ‘A Day’ 중에서


찬혁이의 가사처럼, 나는 그게 잘난 척으로 들렸다.

본인은 그때까지는 무조건 건강하고 사고도 안 날 거라서

스스로 죽을 날과 방법쯤은 선택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거지 뭐.


나도 그런 잘난 척이 너무나 하고 싶었다.


길을 걷다가도 뇌 기능 상실에 대한 공포가 서늘하게 등골을 그었다.


버스 교통약자석에 앉아 누가 봐도 우환 있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눈치 주는 사람이 없었다.

노인이 서 있어도 그저 오래 살아 계신 게 부러워 시기심이 들뿐이었다.

나는 노인이 못 될지도 모르는데,

겉으로는 젊고 건강한 사람이 앉아있으니

나만 나쁜 년으로 보일 것 같아 억울하기도 했다.

그래서 더 비켜드리기가 싫었다.


젊어도,

어디가 부러지지 않아도,

머리털 성하고 낯빛 훤해도 환자일 수 있는데.




가끔 본가에 내려가서 염치없이 부모님께 이런 심정을 토로하곤 했다.

아빠가 책 한 권을 쥐어줬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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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유대인 정신과 의사가 자신의 수감 시절을 기록한 내용이다.

행복은 비교해서 얻는 게 아니라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살 것 같았다.

나보다 열악한 환경에 놓인 사람들이 어떻게 버텼을지 너무나 궁금했다. 필사적으로 책장을 넘겼다.


이름도, 인생도 박탈 당하고 매일 일터와 가스실에서 잔혹하게 사람이 죽어나가는 수용소.

사람들은 죽음과 잔인함에 점점 무감각해졌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거나 유머, 예술을 주고받아가며 버텼다.

풍전등화 같은 정신적 수명을 하루하루 되살리는 모습이 아주 인간적이고 존엄하게 다가왔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p.139)


나도, 온전할 때 만이라도, 온전하지 않다면 그만큼이라도

스스로의 존엄성은 지키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어요’ 란 명언은 참 어처구니가 없다 생각했는데,

조금 공감되는 듯했다.




고등학교 친구 K는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라는 책을 추천해 줬다.

저자는 폐암 말기 진단을 받은 미국 외과 의사였다.

칼라니티는 수술과 항암을 거치면서도 마지막까지 환자를 돌보며 하루하루 정성을 다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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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순간 없이 오래 연명하다 가는 삶과,

짧지만 거성처럼 빛났던 칼라니티의 삶 중에서 고르라고 한다면

솔직히 눈물을 머금고 전자를 고를 것이다.

그러나 가능한 선택이 후자밖에 없다면 그 시간 안에 더욱 강렬하게 빛을 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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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별의 그림자가
돌덩이에 지나지 않더라도
밝게 타올라 궤도에 존재하고 싶어
: 윤하 노래 ‘살별’ 중에서

자연대 시절에 내가 잠깐 연구하던 살별(혜성의 순우리말)은

화려한 이온 꼬리와 먼지 꼬리를 자랑하며 날아다니는 천체다.

언젠가 지구 대기에 부딪혀 무미건조한 돌덩이가 되더라도

비행하는 동안은 자신을 이루는 각종 원소를 불태우는 살별.


유한함의 굴레에서 내가 조금의 빛이라도 내려면 결국 하던 걸 해야 했다.

배우기,

그리고 배움을 지속하기 위한 신체적 조건을 연장시키기.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일단 놀 거 다 놀고, 먹을 거 다 먹겠다는 태도로 서너 달을 보냈었다.


이제 거기선 나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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