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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의정 갈등 같은 걸 끼얹나?

의대생이자 환자로서 모두 억까 당하다

by 저삶의


1) 이 글은 ‘필수의료패키지’에 반대 의견을 주장하거나, 해당 정책에 대해 설명하거나, 독자분들을 설득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닙니다.
2) 정책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독자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그러면서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설명하고 주장할 자신이 없습니다.
3) 대신 제가 작년부터 의대생이자 뇌종양 환자로서 다방면으로 느끼고 있는 막막함과 불안에 초점을 맞춰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의대생인 나

필수의료패키지, 의대생 2000명 증원이라니, 이게 다 뭐야..?

이거 다 시행되면 난 의대 왜 왔지?

대한민국에서 의사로 살 수 있으려나?

내가 좋아하고 잘 하는 일을 만나려고 들인 시간이 몇 년인데,

나 진짜 이제 앞날 걱정 끝난 줄 알았다고.

의대 학기 중에 하루 5시간씩 자고, 면역력 떨어져서 각종 염증 걸리고,

버스 타고 이동하면서도 아이패드 들고 공부한 결과가

이렇게 정책 한 방으로 미래가 다시 불안정해지는 거라니.

너무 속상하고 억울해…


환자인 나

전공의 선배님들도 많이 그만두고 계시고, 교수님들도 나가서 개원한다고 하는데.

다행히 나 봐주시는 교수님은 그대로 계시네…

이렇게 다 나가 버리면 병원 운영에 차질 생기겠지?

그럼 혹시라도 갑자기 종양 커져서 뇌압 올라가면 어떡하지? 나 응급수술 못 받아서 죽는거 아니야?

뭐, 그럴 확률은 낮지만 불안하네… 나보다 위급한 환자도 많을텐데 큰일이네.


의대생인 나

지금 당장 처치가 필요하지 않은 게 다행이지 뭐. 일단 추적관찰 하기로 했잖아.

환자니까 하루 종일 건강만 챙길거야?

지금 나 먹여 살려 주고 있는 남편한테 좀 미안하잖아, 돈 벌 계획도 있어야지.

…근데 나는 일 자체에 푹 빠져야 그걸 잘 할 수 있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또 멋진 사람 한번 돼보겠다고 갈아넣다가 크게 좌절할 것 같은데.


환자인 나

왜 좌절해?


의대생인 나

의료 환경이 앞으로 안좋아질 게 빤히 보이니까 그렇지.

사명감으로 환경 못 이겨.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후…일단 전문성이라도 갖출 수 있을지 모르겠음.


환자인 나

전문성 가지려면 전문의 해야 하잖아.

안 그래도 건강에 문제 있는데, 이러면 인턴, 레지던트 보통 최소 주 88시간 일하는데 어떻게 버티냐?

내가 또 어디가서 대충 일하고 욕 먹느니 차라리 슈르스트뢰밍을 취두부와 곁들여 먹겠는 사람임.

열심히 하고 싶은 환경과 미래가 있어야 수련을 받지,

그런 것도 없는데 몸 갈아가며 수련 받다가 건강 더 나빠지기는 싫어.

그것도 그렇고, 내가 갑자기 응급수술 받아야 할 가능성보다는

몇 년씩 추적 관찰하다가 개두술 받을 확률이 높은데.

그러면 나 계속 봐줄 실력 좋은 신경외과 의사가 있어야 하는데.

그만둔 신경외과 전공의 쌤들이 사태 해결된다고 다시 올 것 같지도 않고, 난감하네.


의대생인 나

하 그러니까.

신경외과 가려던 의대생들도 다른 쪽으로 엄청 돌리지 않을까.

특히 뇌 쪽은 생명과 직결되는데,

소송 부담이 크고 수술할수록 적자인 구조가 안 바뀐 상태에서

이것저것 임시방편만 시행하면 할 사람이 있을까?

차라리 의사 안 하고 말지.


환자인 나

제대로 치료 받고 싶은데…


의대생인 나

전문의도 되고 싶고 일하면서 사명감이나 보람도 느끼고 싶고 돈도 벌고 싶은데.

애도 낳고 싶은데.

다 욕심인가.


환자인 나

애 낳는 건 진로 문제보다는 건강 문제가 큰 듯.

여성호르몬 때문에 뇌수막종이 커질 수도 있잖아.


의대생인데 환자인 나

아무튼 평생 관리받아야 할 질환도 있고, 진로 면에서도 그렇고 제발 이 정책들 다 취소되면 좋겠다.

안 되면 어떡하지? 생각도 하기 싫다.

이 나이에 뇌수막종 있는 것도 속상한데 날 좀 가만히 놔둬 줘.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예. (단호)

그럼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그래.

내가 물리, 천문학 열심히 안 했던 거,

인간관계 서툴렀던 거,

인성 안 좋은 상사들 비위 못 맞춰준 거,

주말부부 감수하고 의대 간 거,

학기 중에 건강 내팽개치고 공부했던 거,

다 내가 잘못했다.

내 팔자 내가 꼬았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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