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먹을 수 있을 때 사먹지 않는다
휴학 기간에 나는 사실상 전업주부였으나,
남편과 내가 먹을 음식을 조달하기 위해 주로 배달이나 포장을 이용했다.
‘건강도 안 좋은데 요리까지 해야 하나?’
지금 생각해 보면 도저히 앞뒤가 안 맞는 말이지만 당시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매번 밖에서 사 오거나 배달을 시키는 게
뭔가 부자연스럽고 비효율적으로 느껴졌다.
딸깍 하면 집까지 음식이 오는 것 같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배민이나 쿠팡이츠 중에 선택해서 켠 다음, 여러 가게 중에서 메뉴 고르고 리뷰 이벤트 조건 맞춰서 메시지를 남긴 다음에 할인 적용하고 결제하고 ‘문 앞에 두고 문자 주세요’라고 제대로 적었는지 더블체크하고 배달 오는 시간 확인하고 그 시간동안 할 만한 다른 일 하거나 시간 짧아서 아무것도 못하다가 예상보다 배달 빨리 와서 짜증 나고 문 앞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한 뒤에 재빨리 갖고 들어와서 비닐 뜯고 뚜껑 열고 식기 세팅하고 플라스틱 포장에서 튕겨나간 국물 물티슈로 닦아가면서 먹고 나서 음식물 쓰레기와 물티슈 처리하고 용기를 씻은 후 버려야 했다.
특히 배달 시간이 항상 예상보다 이르단 점이
슈퍼 J(계획적) 성향을 가진 나에게는 큰 단점으로 작용했다.
40분 후 도착한다고 떠서 그동안 20분짜리 미국의사시험(USMLE) 강의 2개를 보려고 했는데,
2번째 강의를 켜자마자 배달이 오면 김이 팍 샜다.
게다가 너무 비싸고,
배달 음식 먹었다는 자괴감과 더부룩함도 덤이었다.
밥이랑 반찬이 있다면 바로 꺼내 먹을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았다.
남편은 한끼 요리를 잘 하지만, 반찬을 해놓는 스타일이 아니다.
엄마 집은 멀다.
사먹는 반찬은 달아서 입맛에 안 맞는다.
그럼 어떻게 한다?
“내가 한다.”
처음엔 유명 유튜버들 (윤이련, 이남자의쿡, 딸을위한레시피, 백종원, 소소황, 엄마의 손맛 등)의 레시피를 그대로 가져와서 단맛 나는 조미료만 1/3로 줄였다.
그랬더니 먹을 만 하지만 성에 차지 않는 음식들이 만들어졌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므로 뭔가 깨달음이 올 때까지 이런 방법으로 버텼다.
멸치볶음, 어묵볶음, 진미채무침, 콩나물무침, 배추무침, 오이무침, 제육볶음, 햄감자채볶음,
감자조림, 메추리알조림, 두부조림, 김치찌개, 돼지김치, 깻잎무침
과 같은 반찬 요리에 하나씩 도전해 봤다.
그랬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약간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래는 2024년 초중반 당시에 느낀 변화를 쓴 글이다.
⇒ 화살표에 이어지는 부분은 2025년 6월 시점의 내가 당시 글을 보고 쓴 코멘트이다.
어떤 상황에 어떤 양념을 쓴다는 것이 나름 머릿속에 자리 잡은 듯하고,
간을 보면서 즉흥적으로 양념을 추가해 원하는 맛을 얻어내는 능력이 생겼다.
원하는 맛은 시간이 지나면 바뀌기 때문에 매번 여러 가지 변주를 할 수 있다.
하면 할수록 요리에 걸리는 시간이 줄어들고, 원하는 시간에 맞춰 시작하고 끝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어떤 판을 내가 주무를 수 있다고 느껴질 때 진짜 기분이 좋다.
⇒ 뇌 속에 요리 회로가 새로 만들어지는 모습.
뇌 가소성이 발휘되었다.
단기적으로 보면 좋아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요즘 ‘저속노화’ 개념이 인기를 얻고 있는데,
그 개념을 설파하고 있는 정희원 교수님만큼 청교도적으로 살 자신은 없다.
그래도 100의 속도로 떨어지는 것과 70으로 떨어지는 건 결국 크나큰 차이를 만든다.
매일 유산소운동까지 하고 있어서 더 그런 것 같은데,
사진을 찍어보면 1년 전과 다르게 얼굴에서 광이 난다.
움직일 때 몸이 가볍고 쉽게 피로해지지 않는다.
PMS(월경전증후군)도 덜 심하게 겪는다.
이런 걸 느껴보고 나니 작년에 학기 중에 정말 건강을 내팽개치고
한글자라도 더 외우려고 했던 걸 반성하게 됐다.
‘저속노화’ 채널에도 나오는데 ‘고속노화’ 음식은 뇌 기능 저하나 조기 치매로도 이어진다고 한다.
무서워.. 마트 가서 생선 사 와야겠다.
⇒ 알고 보니 정희원 교수님은 그렇게까지 '청교도적'으로 생활하지 않는다.
또한 '고속노화'라는 표현에서 저속노화 왕초보였음을 알 수 있다.
'가속노화'가 더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해 먹는 게 사 먹는 것보다 건강에 좋은 건 맞다.
우선 초가공식품을 덜 먹게 된다는 게 결정적이다.
외부 음식보다 당을 적게 쓰거나 간을 덜 하게 된다는 점도 좋고
특히 밥 양을 적게 조절할 수 있다는 점도 좋다.
초가공식품에 대해서는 이 브런치북에서 다룰 예정.
백수 생활 초반에는 돈도 남편이 벌고 요리도 남편이 해서,
자신이 그냥 얹혀사는 종이조각처럼 느껴지곤 했다.
이제 저녁 메뉴는 내가 계획하고 장보고 요리하는 경우가 많아서
뭔가 나의 영역이 생긴 것이 든든하다.
어쨌든 주로 장 보는 사람이 내가 되니까 생활비를 좀 더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
⇒ 요즘은 이때보다 좀 더 고도의 생활비 전술을 사용하고 있다.
바로 쿠팡에 연결해 둔 남편 계좌로 재료 결제하기 히히.
하지만 과도한 포장재와 은근히 비싼 가격 때문에
다시 동네 마트를 이용하려고 노력 중이다.
배달 음식 1번 시키면 15000원이 기본으로 나온다.
이 돈으로 저렴한 티셔츠를 하나 사는 게 더욱 만족감을 준다.
물론 장 보는 데에도 돈이 들지만, 그건 매몰비용이니까..
하면서 어물쩡 넘어가기 어떤데?
하지만 마트에서 장 보는 행위 자체가 소비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므로,
충동구매를 오히려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 요즘도, 혹시 외부 음식이 눈에 들어오면 그 돈으로 뭘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하지만 옷 사는 건 약간 자제해 보려고 생각 중이다. (생각만 몇 달째)
옷 한 장을 만들 때 일어나는 환경오염과 사회적 문제가 많다는 것을 책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자금으로 투자 또는 저축을 하거나 책을 사는 쪽으로 운용하려고 한다.
장 보는 행위 자체가 소비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는 말은
배달 음식 시킬 때와 마트에서 장 볼 때
뇌의 같은 영역(보상 회로)에서 비슷한 작용(도파민 분비)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배달 앱을 통한 즉각적 만족은 쇼츠나 릴스를 볼 때처럼 짧고 강렬한 자극을 주고
마트에서 장 보는 행위는 마트까지 가서 고르는 노력이 필요하므로
좀 더 은은하고 지속적인 도파민 분비가 일어날 것으로 생각된다.
느리게 분비되는 도파민이 뇌 건강에는 훨씬 좋다.
나는 집에 한 번 제대로 처박혀 버리면 정말 나가기 싫고 귀찮고
외부세계가 지나칠 정도로 두렵게 느껴지곤 한다.
길에서 차를 피하고 사람과 부딪히지 않게 다니는 행동 하나하나가 지나치게 스트레스로 느껴진다.
이럴 땐 일부러 밖에 나가야 이 상태를 깰 수 있다.
매일 가는 수영도 한몫하지만,
마트에서 장을 보려면 필연적으로 사람과 상호작용을 해야 하므로
이러한 사회공포를 없애는 데에 더 효과가 크다.
⇒ 나는 20대 초중반까지의 인생이
사회 불안 극복 스토리라고 할 정도로 대인관계에 타고 난 소질이 없었다.
그래도 조금씩 내 컴포트 존을 벗어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지금 적당한 사회성을 갖추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집에 가만히 있으면 다시 외부 세계에 대한 불안이 올라오곤 했는데
지금은 그런 증상도 없어졌다.
이건 아무래도 저속노화 습관과 운동 덕분인 것 같다.
이에 대해서도 이 브런치북에서 이야기할 예정.
예전처럼 오랫동안 또는 많이 먹지 않아도 먹는 행위의 만족감에 도달할 수 있다.
어쩌면 내게는 음식을 굳이 입에 넣지 않더라도 음식을 다루고 만지는 시간이 필요했던 걸까.
⇒ 2024년 초중반의 나는 식욕에 대한 이해가 지금만큼 깊지 못했다.
그런데도 경험적으로 뭔가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음식을 감각하는 시간도 뇌에서 포만감을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요리하면서 재료 꼬투리 같은 걸 조금씩 주워 먹다 보니
과자 같은 다른 간식 대신 야채를 먹게 되는 점도 건강에 좋다.
1년이 지난 지금은 비교적 어려운 요리
예) 무말랭이김치, 황태양념구이, 꼴뚜기볶음, 시금치무침, 명이나물장아찌 등
를 한 경험도 생겼고,
레시피 없이도 간단한 소스를 만들 수도 있게 되었다.
또한 좀 더 건강에 초점을 맞춰 요리하고 있다.
주로 참고하는 요리 유튜버는 '김대석 셰프'로 바뀌었다.
이전에 참고하던 채널들 대비 정성이 많이 들고 디테일한 레시피를 알려준다.
그만큼 더 섬세한 요리를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