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에 좋다는데 어떻게 안 해
남편은 회식을 하러 간 2024년 여름 저녁.
굵고 쫀득한 쌀 가래떡과 탱글한 당면을 넣고 고추장 소스에 매콤하고 노릇하게 볶아 슈레드 치즈를 녹진하게 올린 떡볶이 겸 비빔당면을 점심부터 두 끼 째 즐기는 중이었다.
늘 그랬듯 거실 TV로 유튜브를 틀어놓고 먹으려는데 한 동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썸네일에는 “밥 먹고 졸리면 위험한 걸까?”라는 글씨와 함께
안경 쓴 범생이 느낌의 아저씨가 나와 있었다.
제목으로 되어 있는 ‘혈당 스파이크’에 대해 이 분이 설명을 해주는 영상일 것 같았다.
https://youtu.be/AcHpPET-Mwk?si=UCg9nSdvgsq0W35U
‘이 분 의사인가? 뭐라고 하는지 한 번 보자.’
수영을 빡세게 해서 그런지 당시 밥 먹고 항상 낮잠을 잤는데,
이거 혹시 혈당 문제는 아닐까 싶어 영상을 재생했다.
정희원 교수님이 설명하시는 저속노화 이론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슐린이 조직에서 작용하는 경로와 생물학적 노화 기전이 같다.
인슐린은 에너지를 체내에 저장하는 역할을 하는 호르몬이다.
단순당과 정제곡물, 즉 흰빵, 흰밥, 면처럼 당부하가 높은 음식을 먹어서 혈당 스파이크가 생긴다면
췌장 베타 세포는 이에 반응해 인슐린을 쫙 분비한다.
과도한 당은 내장지방이나 근내지방 형태로 저장되는데,
이런 형태의 지방은 인슐린 저항성을 만든다.
인슐린 저항성이란 같은 양의 인슐린에도 근육이 잘 반응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면 근육에 에너지가 잘 들어가지 못하고,
남는 에너지는 다시 내장지방이나 근내지방으로 쌓이며,
몸은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느껴 허기가 지게 된다.
이런 악순환 사이클이 반복되는 게 가속노화다.
이것들은 프로틴 보충용 식품의 주원료 중 하나로, 근성장에 필수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근성장과 가속노화의 메커니즘이 겹친다는 것이다.
BCAA는 mTORC라는 수용체를 자극해 세포 분열을 일으키고
근육 세포도 자극해 근성장을 일으킨다.
이 과정이 과도하게 일어나면 세포 분열도 많아진다.
세포 분열이 많으면 그 과정에서 확률에 따라 일어나는 유전자 변이의 횟수 또한 많아진다.
유전자 변이로 인해 기능을 상실한 세포가 늘어나는 현상은 곧 노화다.
또한 BCAA를 많이 섭취하면 단기적으로는 근육이 성장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동화저항 현상이 발생한다.
동화저항이란 같은 양의 단백질을 섭취해도 근육이 잘 만들어지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동화저항 상태에서는 젊은 나이에도 근손실이 잘 올 수 있다.
여기까지 들었을 땐
‘그렇구나, 그럼 이 분이 말씀하시는 저속노화 생활을 하면 건강에 좋긴 하겠네.’라고 생각했다.
“MIND 식사를 한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을 비교했을 때
전자에서 뇌 노화 속도가 1/4까지 줄어들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실제로 알츠하이머는 제3형 당뇨병으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뇌 노화’라는 단어가 귀에 꽂히자,
마치 정희원 교수님이 내 이름을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영상을 노려보게 되었다.
저녁으로 섭취하던 맵고 짜고 질겅거리는 정제탄수화물 덩어리가 목구멍을 조여 왔다.
며칠 후, 나는 ‘정희원의 저속노화’ 채널에 올라온 모든 영상을 눌러보기 시작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익숙한 안경 쓴 아저씨로 점점 도배되어 갔다.
나는 없어서 못 볼 때까지 그가 출연한 영상을 닥치는 대로 틀었다.
인터뷰, 대중 강연, 학술 강연 가리지 않고.
https://youtu.be/rL1eo4Oe8Uw?si=UxflhBnYOzVoDVJ5
그 바람에 남편도 한동안 저녁 먹을 때마다 정희원 교수님의 해맑은 표정을 만나야 했다.
정신 차려 보니 마트 다녀오는 내 장바구니에 렌틸콩이 담겨 있었다.
이전에 식단 조절을 하다가 한 방에 무너지고 포기한 경험이 몇 번 있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방탕한 생활’로 돌아와 있는 자신이 한심하다.
결국 자기 합리화를 하게 된다.
‘다시는 식단 안 해, 못 해! 난 건강한 음식을 안 좋아하도록 타고났어.’
요렇게 생각해 왔었는데, 저속노화가 그 고집을 이긴 비결이 뭘까?
뇌수막종은, 암은 아니지만 암과 같은 ‘종양’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여 있다.
다시 말해 다른 곳으로 전이되거나 주변 조직을 침윤하지는 않지만 증식성이 존재한다.
노화를 촉진하는 mTORC나 인슐린/IGF-1 경로의 핵심은 결국 과도한 세포 분열이다.
이 과정에서 망가진 유전자를 제때 고치지 못해 세포가 기능을 잃거나 (노화),
불필요한 증식성을 갖게 된다 (종양 = neoplasm).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뇌막 세포 일부는 유전자가 망가져서 종양이 됐다.
보통 뇌수막종 환자의 나이는 50대 이상인데,
20대 후반에 종양이 발병한 나는
일종의 가속노화를 거친 것 아닐까?
만약 내가 계속해서 가속노화 생활을 한다면 병의 경과에 좋은 영향을 주진 않겠구나 싶었다.
저속노화가 종양의 성장을 막아준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가속노화 습관은 끊어야지.
혹시 모를 오해를 막기 위해 덧붙여 본다.
뇌수막종은 중~노년에서 잘 발생하는 질환이라서 위와 같이 추측한 것일 뿐이다.
또한 인체 노화가 시작되는 시점을 대충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잡는데,
내가 진단 받은 시점은 그 안에 포함되기 때문에
가속노화가 아닐까 ‘의심’하는 것일 뿐
가속노화 때문이라고 확신하지 않는다.
이런 질환들은 가속노화와 관련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나처럼 20대 후반에서 30대에 뇌수막종을 진단 받은 환자분이라도
가속노화 때문이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젊은 나이에서 뇌수막종 발병과 가속노화 습관의 관계'를 밝힌 논문 따위 없다.
어쨌든 저속노화 생활이 전반적으로 건강을 좋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에헴, 다시 이어가 보자.
식단 조절을 하다 무너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니!
이게 무슨 구원 같은 소리야?
당은 뇌에서 도파민 분비를 자극하는데,
저속노화 생활을 하면 혈당 변동성이 적어진다.
따라서 도파민이 폭발적으로 분비되었다가 떨어지는 현상도 줄어들고,
계속하다 보면 낮은 수준의 도파민에도 충분히 지속적인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좋아하는 음식 종류도 혈당 변동성이 낮은 품목으로 바뀌게 된다.
건강한 입맛을 가진 친구들이 내심 부러웠고,
떡볶이와 빵의 노예로 사는 게 은근히 고통스러웠는데.
나도 그들처럼 될 수 있다는 건가?
그렇다면 이건 미쳤다.
가공육은 발암물질로 분류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진단 후 가공육을 피하고 싶었는데,
남편은 우리가 먹는 수준에서 큰 영향이 있겠냐며 회의적으로 반응했다.
“그런 거 오히려 먼저 먹지 말자고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내가 먹지 말자고 계속 설득해야 하는데? "
가공육을 먹기 싫어서 남편을 끌고 돼지고기를 사러 가는 중에 내가 말했다.
환자인 것도 서러운데 먹는 걸로 직접 유난까지 떨어야 하는 게 다소 비참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데 저속노화 영상을 달린 후로
우리는 집에 쌓여 있는 스팸을 입에 댄 적이 없다.
내가 골백번 주장하는 것보다 교수님의 명쾌한 설명 한 방이 더 효과적이었음…
남편도 나와 마찬가지로 논리로 움직이는 부류인데,
어떤 물질이 어떤 기전으로 얼마나 건강에 영향을 주는지
빼도 박도 못하게 알려주니까 무시할 수 없었나 보다.
이쯤 쓰니까 무슨 광고 같다.
여기저기 광고하고 싶은 마음은 있다.
혼합잡곡과 렌틸콩을 2:1로 섞은 우리 집 특제 렌틸콩밥은 고소하고 씹는 맛이 좋다.
볶음밥에 넣으면 중동이나 아프리카 - 이를테면 모로코 요리 같은 이국적인 맛이 살아났다.
가본 적은 없지만, 어쩐지 힙한 음식을 먹어서 힙한 사람이 되는 느낌이었다.
점점 흰밥, 흰빵은 어딘가 맛이 비어있다고 느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