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은 수용성
뭐라도 해 보기 위해 5년 만에 동네 수영장에 들렀다.
의대 주변에는 마땅한 수영장이 없어,
남편과 같이 사는 집에서 생활하는 휴학 기간은 수영을 다닐 절호의 기회였다.
9시 30분쯤 일어나던 사람이 7시에 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결심이 필요했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옷을 주섬주섬 입고 수영 가방을 챙겨서, 일찍 출근하는 남편보다 먼저 집을 나갔다.
이왕 다니기로 했으니 제대로 익히고 싶었다.
5년 전에 자유형까지 어느 정도 배웠지만 다 잊어버렸다.
언제 의정 사태가 해결될지 알 수 없었으므로 최대한 진도를 빨리 나가고 싶어 매일반으로 등록했다.
오랜만에 수영을 하려니 설명을 들어도 팔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 좋으니까 괜찮아’라고 자신을 속이면서도
나는 모자란 운동신경이 내심 부끄러웠는데,
이번에도 내 일거수일투족이 머쓱했다.
10년 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더 큰 머쓱함을 향해 기꺼이 나아갔다는 거?
나는 매일 10분 일찍 물속에 들어가고 수업이 끝나고 10분 늦게 나가며 20분의 연습 시간을 확보했다.
휘적휘적 첨벙첨벙 꼬르륵…
왠지 수치스러웠고 근육통도 왔다.
그래도 어쩐지 행복해졌다.
뇌종양이 있는 머리를 물에 집어넣을 땐 괜스레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관자놀이를 휘감는 물이 시원하고 부드러웠다.
지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느낌!
나는 지금 살아있다!
체지방 30% 중반의 몸에 킥판 잡고 자유형 발차기는 아주 어려웠다.
그래도 몇 주씩 다니다 보니 둔근과 대퇴사두근이 조금 단단해진 느낌이 들었다.
초급반 터줏대감이신 중년 언니들과도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내 차례는 조금씩 앞으로 당겨졌다.
4개월쯤 다니고 정신 차려 보니 초급반 1번이 되어 있었다.
(1번은 그 반에서 가장 빠른 회원으로,
수영 선생님의 사인을 받고 알맞은 영법과 속도로 출발해 예정된 바퀴 수를 채우면 정지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다.)
점점 수친자가 되어 갈수록,
진단 후 마음 한편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우울 덩어리가 물에 녹아 없어진 것처럼 매일이 상쾌해졌다.
팔을 돌리며 물을 가를 땐 손끝이 물고기의 뾰족한 주둥이가 된 듯했고,
‘나 지금 철갑상어처럼 귀엽지?’
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유산소 운동을 하면 세로토닌,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등
신경전달물질을 조절하는 뇌의 기능이 향상되어 긍정적 감정이 샘솟는다.
때문에 우울증 환자가 매일 30분 이상 숨차게 걷는 것만으로 도움이 된다고 한다.
수영의 여러 다른 특징들도 하루를 기분 좋게 보내는 데 보태준다.
수영장에 다니면 매일 여러 사람과 말을 섞게 된다.
사람을 많이 좋아하지는 않는 나 같은 성격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상호작용이 삶에 활기를 부여한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매일 아침 자연스레 햇빛을 쬐다 보니 생체 리듬을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조금씩 따뜻해지거나 선선해지는 계절의 변화도 느껴진다.
비나 눈이 오는 날에도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하는데,
젖거나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집중하다 보면 과거의 슬픔과 미래에 대한 걱정은 뒷전이 된다.
의도하지 않아도 마음 챙김 명상이 된달까?
매일 성실히 출석하고 주말에도 자유수영을 다니며,
수영복 쇼핑몰을 들락거리며 수영에 미쳤었다.
중급반에 올라가고, 거기서 다시 1번을 거쳐 상급반이 된 후에도 몇 개월 더 수영을 다니며
나는 더 이상 운동 신경이 뒤떨어지는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