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종양 때문은 아님
2023년 말 본과 1학년 2학기의 모든 시험이 끝나고 기초의학종합평가만 남겨둔 시점.
동갑내기 친구 차를 타고 동기 서너 명과 함께 시골 카페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기초의학종합평가: 비교적 중요도가 낮은 과목이다.)
대학에서 시험은 생존과 경쟁의 요소가 있어 터 놓고 말하기 불편한 지점이 있지만
동기들은 어김없이 시험이나 학점 얘기를 꺼낸다.
마치 돈 얘기가 불편해도 결국엔 하게 되는 것처럼.
“저번 학기보다 머리가 안 좋아졌나 봐.”
내가 불쑥 말했더니 침묵이 흐른다.
‘에이, 그럴 리가 있겠냐’라는 대답을 듣고 싶은 티가 났던 걸까.
아니면 시험 얘기를 그만하고 싶은 티가 났던 걸까.
우리 학교 본과 1, 2학년은 방학을 제외한 모든 나날이 시험 기간이다.
월요일에서 목요일은 6시간 이상 수업을 듣고 금요일은 매주 또는 격주 시험을 친다.
교수님은 급박하게 강의 자료를 넘기며 쇼미더머니에 출전한 듯 설명을 쏟아낸다.
시간당 줄글과 표, 해부도가 빼곡하게 들어 찬 강의안 50장에서 100장이 스쳐 지나간다.
의대 시험에서 고득점을 노린다면
강의안, 예상 문제는 기본으로 숙지해야 하고, 과목에 따라 영어책까지 읽어야 할 수도 있다.
의대생이나 의사가 아닌 독자들은 의대 시험이 어떤지 잘 모를 수밖에 없다.
흔히 상상하듯 답만 외우면 되는 방식이 아니다.
예상 문제는 국가고시 기출을 포함해 과목 당 두꺼운 책 두세 권에 달하며,
이것들에 대한 답을 직접 달아야 한다.
시험 문제는 임상 과목 하나당 100~300개 정도다.
강의안, 문제집, 영어책, 과제까지 쳐내기 위해
나는 학기 중에 월~금 4박 5일간 총 20시간도 채 자지 않고 공부했다.
지금 와서야 잠을 줄이는 게 과연 효율적이었을까 의문이 들지만,
당시는 학점을 잘 받으려면 공부라는 행위에만 매진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가만히 두면 8~9시간을 자는 사람이다.
이런데 스스로를 수면 고갈로 밀어 넣었으니 정상일 수가 없었다.
항상 멍한 표정으로 다녔고, 인내심은 바닥났다.
나는 사람은 항상 어느 정도 착한 척을 해야 살만한 세상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신조에 따라 살지 못할 정도로 에너지가 없었다.
그러니까 친구 차 안에서 이 글 제목과 같은 말을 뱉은 걸지도.
24시간 번아웃이었지만 스스로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수면이 부족하면 자신을 돌아보는 능력인 메타인지가 떨어진다고 하던데 딱 그 꼴이다.
몸은, 그러니까 뇌는 정직하다.
소아 시절부터 과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체지방은 더 늘어났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머리가 아팠다.
치은염, 비염, 다래끼, 위염, 질염 등 잊을만하면 염증이 생겼다.
뇌 녀석은 공부하기 싫다고 발버둥 쳤다.
수업 후 복습하며 요약본을 만드는데,
마우스 한 번 딸깍하는 것조차 지구를 떠받치는 것처럼 힘겨웠다.
순간순간 밀어닥치는 권태감을 삭이며 공부한 결과는,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 하겠지만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러 번 본 문제를 틀리거나,
너무나 기본적인 문제의 답이 순간적으로 기억나지 않는 경험이 시험 때마다 늘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