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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공부 잘하려면 공부 덜 해야 한다

뇌종양 환자인 의대생의 새로운 공부 원칙

by 저삶의

나는 2025년 5월 초에 미국의사시험(USMLE) 1단계(Step 1) 시험을 치고 합격했다.


이 시험공부를 하면서

학기 중에 몸과 머리를 혹사시키며 했던 공부 습관을 버리고 다른 원칙을 정립했다.

좋은 성적을 받으려면 공부라는 행위만 진득하게 하는 게 능사가 아닌 걸 알게 됐기 때문.


솔직히 어느 정도는 포장이다.

사실 학기 중처럼 피 터지게 공부하지 않는 자신을 질책한 적이 많았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끝까지 잘 마친 듯하다.


피 터지게 공부하면 그냥 피만 터진다.




USMLE Step 1 시험은 휴학 중에 공부했기 때문에 24시간을 내 맘대로 쓸 수 있었다.

2024년 6월쯤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초반에는 공부보다 취미 활동에 더 집중했다.

6시 30분에 일어나 수영 갔다 와서,

낮잠을 자다 일어나서 점심 요리 해 먹고,

유튜브랑 넷플릭스 볼 거 다 보고 책 읽을 거 다 읽고 공부 2~3시간 하다가,

보컬 학원 갔다 와서,

저녁 요리해서 남편 오면 먹고,

같이 유튜브 또는 넷플릭스를 보다가 11시쯤 잠들었다.

집중이 잘 돼서 오래 공부하는 날에는 4시간쯤 했다.


정희원 박사의 최신 저서인 <<저속노화 마인드셋>>을 읽어보면

이런 식으로 뇌에 적절한 휴식을 주고 자기돌봄을 하면서

하루 4시간 정도 일에 집중하는 패턴이 성공으로 이끌어준다고 한다.

흠...정희원 교수님은 논문 읽기를 휴식시간에 넣으니까 좀 다르려나.


아무튼 이런 생활을 2025년 1월까지 계속했다.

중간에 여행도 좀 다녀오고.


2025년 2, 3, 4월 총 3개월 동안은 시험공부를 최우선순위로 뒀다.

2025년 2월에 발레와 달리기를 시작했기에

이 기간은 해당 취미들의 찐 초보 탈출 기간이기도 했다.

아, 초보 얘기를 하다 보니 생각난 건데 운전 연수도 2025년 3월에 받았다.

운전 학원 가는 버스에서 USMLE 모의고사를 훑던 기억이 난다.


이때의 생활을 기준으로 다시 정립한 공부 원칙을 소개한다.

3-1에서 잠깐 보여줬던, 머리와 몸을 소진시키는 공부 습관과는 180도 달라졌다.




(원칙 1) 주 3회 이상 고강도 운동 하기


2~3월은 날씨가 추워 주로 오후에 뛰었다.


정희원 교수님과 정세희 교수님이 <<길 위의 뇌>> 책 홍보차 찍으신 영상에서,

달리다 보면 안 풀리던 문제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말씀을 하셨었다.

굉장히 솔깃했다.


내 방식대로 시도해 봤다.

그건 바로 달리면서 암기하기!


뛰면서 USMLE Step 1 빈출 개념이나 무지성 암기해야 하는 표 같은 것들을 떠올려 봤다.

결과는 소름이었다.

앉아서 백지에 적는다면 10초씩 걸려 생각나거나, 결국 떠올리지 못했을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뛰면서 상기하니 바로바로 답이 떠올랐다.


누가 머릿속에 답을 투척하는 느낌이었다.

뛰는 속도로 굴러가는 기관이었다니.


한바탕 뛰고 나서 주변을 보면

나뭇가지 갈라진 패턴,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의 밝기 변화, 꽃잎의 알록달록한 색깔이 무서울 정도로 선명하게 눈에 각인되어 왔다.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천주당 안의 벽화를 보고

그림 속의 그들이 내 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것 같아 싫었다. 내가 귀로 들어보려고 하자, 굽어보고 올려보며 내 귀에 먼저 속삭이는 것 같다. 나는 그들이 내가 숨기고 있는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김혈조 옮김)

라고 했다.


달리고 나서 공원에 피어있는 튤립을 봤을 때 내 느낌과 비슷하다.

집 앞 공원에 4월이면 빨강, 보라, 노랑, 하양 등 각색의 튤립이 심긴다.

30분 정도 달리고 나서 꽃밭을 보니

그 살아 숨쉬는 채도와 그림자의 각도가 각각 원추세포와 간상세포에 쏟아져 내리고

소리없이 고막에 죽빵을 날리며 들어와 내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범람했다.

밤에 찍은 거
아침에 찍은 거

남편도 감각이 생생해지는 경험을 했다고 하니 나만 이런 건 아닐 듯.

러너라면 달린 후에 주변 사물을 한 번씩 관찰해 보자.


이 정도면 수업을 듣거나 시험 치기 전에 무조건 뛰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러면 배운 내용으로 온몸을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원칙 2) 1시간 30분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 또는 스쿼트 하기


수업이나 시험 전에 ‘무조건’ 뛰는 건 불가능하다.

대신 쉬는 시간에 간단히 몸을 움직여줄 수 있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쉬는 시간에도 ‘자투리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움직이기 귀찮기도 해서 3~4시간 동안 화장실도 안 가고 가만히 앉아 수업을 듣거나 자습을 했던 적이 많다.


스스로의 집중력을 과대평가했던 게 분명하다.

사람의 뇌는 1시간 30분 동안만 집중력 유지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 시간이 지나면 20분 정도 뇌에게 휴식을 줘야 한다.


나는 1년 전까지만 해도 무의식적으로 몸 따로, 뇌 따로 취급했다.

뇌는 결국 혈관과 지방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장기이며 몸의 일부라는 사실이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은 머리가 좋아지려면 몸을 움직여야 한다더라.

뇌가소성이나 아이들의 뇌 발달 측면에서도, 단기적 공부 성과 측면에서도 그렇다.


또한 오래 앉아 있으면 빠른 속도로 근손실이 일어나고 인슐린 저항성이 올라간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 2시간 이상 앉아있게 되면 항상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거나 간단한 운동을 한다.

먼 곳을 바라보거나 책을 읽는 등 뇌를 쉬게 하는 루틴도 추가했다.


USMLE Step1 시험을 앞둔 1달 이내에도 하루 종일 8시간 이상 공부한 날은 드물다.


약대 편입을 준비할 때나 의대 학기 중에 공부할 땐 하루 12시간 이상

한 번 앉아서 서너 시간씩 공부한 걸 뿌듯해 하기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약간 기괴하다.

'나는 이렇게 오래 저효율로 질질끄는 공부를 하면서 자학을 했어요' 하고 자랑하는 꼴이다.


이번에 공부 시간을 잡아 늘이지 않고도 안정적으로 합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작은 습관 변화에도 있지 않았을까.




(원칙 3) 매일 7시간 이상 수면


한편 전날 잠을 설치거나 과도하게 일찍 일어난 날도 있었다.

그러면 달리기 페이스는 물론이고, 공부 페이스 역시 늘어지곤 했다.


예를 들어 문제를 풀다 보면 처음 보는 개념이 나올 때가 있다.

잠을 충분히 잔 날에는 이 부분을 흥미롭게 읽고 정리를 해 두는데,

잠을 못 자면 그 길로 딴짓을 했다.

오전에 딴짓을 시작하면 점심 먹고 유튜브에서 볼 게 없어질 때까지,

오후에 시작하면 자기 전까지 했다.


학기 중에 잠을 줄여가며 공부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딴짓을 하고 싶어도 꾸역꾸역 뭐 하나라도 더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꾸역꾸역에 그쳤다.

공부 시간은 늘어났지만 공부 속도가 줄어들었다.

효율이 줄어드니 또 시간이 늘어지고 잠잘 시간은 더 부족해졌다.

잠을 못 자니 머리에 남는 게 없어서 공부 시간을 또 늘렸다.

그러다 보니 월요일에 6시간 취침 후 점점 줄어들어 금요일 시험 전에는 3시간만 자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시험 전날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술 취한 것과 비슷한 뇌 상태로 시험을 치다 보니

답이 명백한 문제들을 몇 개씩 더 틀렸었나 보다.

그런 식으로 몇 문제를 날려먹고 나니

한 문제라도 더 맞히려고 눈에 핏발을 세워가며 억지로 공부한 몇 시간은

그저 뇌 수명 깎아먹기 타임에 불과했던 것 아닌가 싶다.


만약 잠을 충분히 자고 깨어있는 시간에 좀 더 집중했다면

반복에 시간을 덜 들여도 문제를 맞힐 수 있지 않았을까?


사실 USMLE Step1 시험 전날밤에는 긴장돼서 4시간밖에 잠을 못 잤다.

전날 새벽 5시에 일어나 운동으로 몸을 혹사시키고 9시에 잠들라는 전설적인 조언을 따랐지만 긴장을 이길 수 없었고

결국 이틀치 잠을 제대로 못 잔 채 시험을 쳤다.


그래도 큰 기복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던 건

시험을 집중 준비했던 3개월 간 하루 8~9시간 충분히 잤고

숙면을 취하는 동안 뇌에서 공부한 내용이 장기기억으로 잘 저장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칙 4) 아침은 혈당 스파이크가 없는 음식으로 단백질을 적절히 공급해 주기


저속노화 생활을 하고 깨달은 것 중 또 하나는,

공복에 공부나 운동을 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배고픈 상태를 ‘경계’하는 가정에서 자라서인지 배가 고프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배고프면 더욱 예민해지는 아빠에 대비해,

엄마는 요즘도 외출할 때 과일이나 과자를 다 먹지 못할 정도로 많이 챙긴다.

‘이 사람은 배고프면 부정적으로 변하니까 뭘 먹여야 한다.’라는 생각에서 나온 습관인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아빠와는 다르게 꼭 배고픔을 해결해야만 다른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배고픔을 허용하지 않는 환경에 익숙해져 있었다.


계속해서 연료를 주입하지 않으면 당이 떨어지고 뇌 정지가 오는 줄 알았다.

그래서 틈만 나면 단순당과 정제곡물을 아무 생각 없이 먹곤 했다.

그러다 보니 20대 후반에는

아침에 탄수화물 덩어리를 먹지 않거나 오후 간식을 거르면 실제로 손이 떨리고 짜증이 나고 집중이 안 됐다.

슬금슬금 생긴 인슐린 저항성 때문이었던 걸로 추측된다.


하지만 사람 몸은 며칠 정도는 공복을 버틸 수 있게 되어 있다.

오히려 뭔가를 먹는 상태보다 공복이 기본 세팅이다.

보통 사람에서 브레인 포그(brain fog; 머리가 안개 낀 것처럼 멍한 상태)는

공복보다는 혈당이 급격히 올랐다 내리는 순간에 생긴다.


2025년부터는 간헐적 단식도 할 겸 아침 공복 상태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정말로 7~8시에 시작해 9시 30분에 첫 끼를 먹을 때까지 집중이 가장 잘 되었다.

9시 30분경에는 방울토마토, 사과, 블루베리 같은 과일과 두유, 땅콩버터 같은 단백질류를 같이 먹었다.

가끔 식욕이 오르면 에그타르트, 휘낭시에 같은 디저트를 곁들이기도 했다.

그러면 점심을 먹는 1시 30분까지 가벼운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시험 날에는 외부 음식 반입이 가능한 시험장 근처 카페에 갔다.

거기서 무가당 말차 두유 음료를 시켜, 가져간 삶은 계란 및 방울토마토와 함께 먹었다.

시험 치는 7시간 동안 혈당이 안정적이기를 기원하며.

(하지만 잠을 못 자서 혈당이 다소 불안정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원칙 5) 점심은 꼭꼭 씹어 먹고, 남는 시간에는 몸을 움직이기


이 원칙은 복학 이후를 대비해 만들어 뒀다.

학 기간은 점심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딱히 지킬 필요가 없다.


학기 중에는 1~2주마다 시험이 다가온다.

평소 점심시간은 짧으면 20분, 길면 1시간 조금 넘는다.

시험공부를 많이 못 했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점심을 빨리 먹고 다시 강의실에 앉아 공부를 하거나, 점심을 먹으면서 공부 자료를 봤다.


점심 식사의 맛을 음미하면서 질감을 느끼며 씹어 먹을 시간이 없었다.

또는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부도 덜 했는데 밥이 넘어가냐?’라는 자책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도 밥을 거르거나 대충 먹는 분위기여서 그에 맞춰지기도 했다.


앞으로 학교에서 점심을 먹을 땐 먹기에 열중해야겠다.

그래야 뇌가 무언가를 먹었다는 인식을 하게 되고 포만감을 느낀다.

포만감 신호가 있어야 오후 내내 저녁 식사에 대한 갈망에 집중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점심 먹고 남는 시간에는 짧게 뛰거나 줄넘기를 할 생각이다.

자투리 공부보다 신체 활동을 적립하는 게 더 나은 학업 효율로 이어질 거라 기대한다.


사실 복학 후 이 원칙을 아주 잘 지킬 자신은 없다.

그러나 원칙을 어기게 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다시 기본값으로 돌아오자는 마음가짐이 있다.




다른 완벽주의자들과 나의 차별점이 있다면,

원칙을 명심하되 지키지 못할 가능성을 항상 계산에 넣는다는 점이다.


휴학 중에 세운 원칙들이기 때문에 학기 중의 실제 상황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어떤 변수가 있어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날도 있을 것이다.

아마 그런 날은 생각보다 많을 거다.


but!!

몇 번 못 지켰다고 끝난 게 아니다.

오히려 '또 운동 안 했네! 망했어. 그냥 막살자' 같은 마인드가 진짜 위험하다.

운동을 하루 빼먹어도, 몇 끼 과식하고 디저트까지 먹었어도

그저 다시 평소의 생활로 돌아오면 된다.

점점 타락하는 것만 경계하면 된다.

뭐가 됐든 2023년의 공부 습관보다는 낫겠지.


이렇게 생활의,

그러니까 뇌의 기본 설정을 바꾸어둔 건 내가 휴학 중에 이룬 아주 큰 성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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