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당, 인슐린 그리고 뇌 건강
나는 에버랜드를 좋아하지 않는다. 롤러코스터나 자이로드롭 같은 놀이기구를 타면 중력을 거스르거나 자유낙하하는 구간이 있다. 빙글빙글 도는 놀이기구의 경우 중심부를 과도하게 회전시켜 인위적으로 원심력을 만든다.
이렇게 과도한 가속도가 걸리는 느낌이 불쾌하다. 머리가 어지럽고, 화장실로 뛰어가서 소변도 봐야 할 것 같다.
고등학생 때 인근 놀이공원으로 학교 소풍을 갔을 때 나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열기구처럼 생긴 어린이용 놀이기구에 탔다가, 견딜 수가 없어 “내려 주세요!!”하고 소리쳐 한창 회전하던 놀이기구를 멈춰 버렸다. 어린이들이 날 비웃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시 땅을 밟으니 살 것 같았다.
사실 나는 ‘혈당 스파이크’와 ‘불안’이라는, 일견 별개의 것처럼 보이는 롤러코스터에 꽤나 오랫동안 탑승해 있었다.
이 브런치북의 2-3장에서 잠깐 언급했는데, 나는 상태가 안 좋을 때 정신 질환으로 따지면 불안증 쪽의 증상이 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부끄럽게도 정신건강의학과에 내원해 본 적이 없다.
병원에 가보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불안했던 기간이 두 번 정도 있었는데, 심리상담으로 어찌어찌 해결했다.
첫 번째는 20대 초반 서울대 재학 시절이었다. 이 때는 대인 불안이 심해 친하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 못했고, 심지어 인사도 잘 못 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노래는 뻔뻔하게 하면서… 내가 생각해도 모순적인데, 아무래도 특히 사람들이 소규모로 모여 있는 상황에서 비판받는 게 많이 두려웠던 것 같다. 더 이상 집단에서 똑똑한 편도 아니고, 뚱뚱하기까지 한 내 모습을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당시 지금보다 최대 20kg 최소 10kg 정도 더 나갔다.)
두 번째는 20대 중후반에 회사 상사와 갈등이 있을 때, 그리고 약대 편입(PEET) 시험을 준비할 때였다. 이땐 거의 모든 일이 불안했다. 예를 들면 자살하는 사람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질까 봐 아파트 주변을 최대한 피해 다녔다. 또한 길을 건널 때 혹시 나와 관계가 좋지 않은 회사 사람이 운전하는 차와 마주칠 까봐 주변을 경계했다. 날 보면 풀액셀을 밟아 버릴까 봐… 집 밖을 나가서 집에 들어오는 순간까지 차에 치일까 봐, 위에서 떨어지는 물건이나 사람에 맞을까 봐, 맨홀 뚜껑이 빠질까 봐, 엘리베이터가 추락할까 봐 계속 걱정했다.
굳이 따지자면 첫 번째는 대인 불안 또는 사회 불안, 두 번째는 범불안 느낌의 증상이었다.
이때가 아니더라도 나는 습관적으로 두려워하는 경향이 항상 있었다. 내 내면을 모르는 사람은 날 보고 ‘무던하다’, 심지어 ‘대범하다’라고 묘사하기도 하던데, 말수가 적어서 그래 보이는 것 아닌가 싶다.
이 정도면 불안도가 높은 성격이라 할 수 있겠다.
요즘도 아예 불안하지 않은 날은 드물다. 그러나 요즘은 불안이 조금 약하게 오거나, 왔다가 금방 제 갈 길을 가곤 한다.
적어도 심장에 벌레가 타닥타닥 기어 다니는 듯한 불안 상태로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불안이 약해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잠을 충분히 자고, 운동하고, 스트레스를 덜 받고, 잘 먹고…
그런데 그것들이 가리키는 것은 한 방향이다.
바로 뇌 속의 대사 기능이 좋아졌다는 점이다.
내 경우 대사 관련 지표 중에서도 특히 혈당 변동성이 줄어든 것이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공복혈당이나 당화혈색소 등 당뇨병 관련 검사 결과는 항상 정상이었지만, 내 혈당은 수시로 왔다 갔다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 몸의 많은 질환들은 본격적으로 병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애써 정상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툭하면 식사 사이사이에 머리가 멍하고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된 느낌이 들었다. “당 떨어지는” 느낌이다. 특히 월경 전 기간에는 더 심해져서, 당 떨어진 상태에서는 단순한 암산도 힘들 정도였다.
탄수화물을 때려먹어도 금방 탈진 상태가 됐다. 쉴 새 없이 연료를 넣어주고, 체지방도 두둑이 쌓아 뒀는데, 어째선지 뇌와 몸은 에너지를 써먹지 못했다.
차로 말하면 기름을 가득 채워줘도 그걸 연소하지 못하니 굴러가질 않았다. 계기판에도 연료가 부족하다고 떴다.
활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혈당이 오르면 췌장은 인슐린을 빠르게 분비해 일단 당을 지방 형태로 저장한다. 그러다 보니 혈당이 빠르게 올랐다 떨어지는 ‘혈당 스파이크’를 많이 겪으면 지방이 증가하고 악순환이 시작된다.
과도한 지방은 염증성 사이토카인을 분비해 주변 세포에 ‘인슐린 저항성’을 만드는데, 그러면 세포들이 인슐린에 잘 반응하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해 활동 상태에서 당이 공급돼도 근육이나 뇌가 그 에너지를 받아서 쓰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으레 음식 저장 효율이 너무 좋아서 비만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효율이 좋다는 표현은 잘못됐다.
인슐린 저항성은 오히려 음식의 에너지를 활용하는 효율이 떨어지는 상태다. 쓰지를 못해 어딘가에 쌓아두기를 반복하다 보니 계속해서 허기를 느끼고 지방이 증가하기 쉽다.
나 역시, 혈당의 고점과 저점을 오르내리며 20년 이상을 과체중 또는 비만 상태로 지내면서 스멀스멀 인슐린 저항성이 생겼던 것이 아닐까 싶다.
내 불안 증상은 혈당 변동성과 인슐린 저항성이 가장 심했던 때, 즉 대사 건강이 좋지 않을 때에 심각해졌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시기와도 겹친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많이 분비되고, 코르티솔은 내가 먹는 음식을 대부분 복부지방으로 저장하고, 그러면 지방이 독성을 내뿜어 인슐린 저항성이 생기고, 인슐린 저항성 때문에 에너지를 잘 활용하지 못해 계속해서 뭔가를 먹어 혈당 스파이크가 생기고, 그러면 또 살이 찌고, 대사 건강은 더 나빠지고, 스트레스 자체가 우울과 불안을 유발하고, 에너지를 잘 써먹지 못하는 뇌가 우울과 불안에 그대로 무릎 꿇는 식이었다.
위에 언급한 두 시기, 즉 20대 초 서울대 1, 2학년이었을 때와 상사에게 푸대접을 받으며 울며 겨자 먹기로 회사를 다니던 때는 이상할 정도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증상마저 있었다.
분명히 총명했던 적이 있었는데, 학점은 B에서 C가 대부분이었고, 스스로 일머리가 형편없다고 생각했었다.
알고 보니 인슐린 저항성은 정신건강에 직접적으로 악영향을 준다고 한다.
최근 <<브레인 에너지>>라는 정신건강의학 책을 읽었다. 이 책 역시 정희원 교수님 소개로 읽게 됐다.
핵심 내용은 정신질환의 원인이 세포의 대사를 관장하는 기관인 미토콘드리아의 기능 부전이라는 것이다.
대사란 음식을 세포의 성장과 유지 보수에 필요한 재료 또는 에너지로 전환하고 노폐물을 적절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과정이다.(p.122)
미토콘드리아는 우리 몸의 연료인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의 유산소 대사 과정을 통해 ATP 형태의 에너지를 생산하는 세포 소기관이다. 세포 안에 들어있으면서 발전소 역할을 한다.
여기에 문제가 생기면 몸속 여러 기관의 작동이 원활하지 않게 된다.
뇌 역시 몸속 기관이고 신경세포에 무수한 미토콘드리아를 포함하고 있다.
<<브레인 에너지>>의 설명에 따르면
뇌 속 에너지가 부족한 경우 우울증이나 ADHD,
에너지가 과도한 경우 불안증, 조증, 조현병이 나타날 수 있다.
이 책은 대사에 관여하는 여러 호르몬이 뇌에서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알려준다. 그중에는 인슐린도 있다.
인슐린 저항성은 미토콘드리아 기능 부전의 원인이자 결과일 수 있다. (p.289)
당뇨병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인슐린은 뇌 기능에도 직접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인슐린 수용체는 뇌 전역에 위치해 있으며, 전신의 대사, 식욕, 생식 기능, 간 기능, 지방 축적, 체온조절에 관여한다. 뇌세포 내에서 신경전달물질의 활동과 미토콘드리아의 기능도 조절한다. 인슐린 신호체계의 변화는 신경 기능 및 시냅스 형성 능력의 저하와 연관되어 있다고 밝혀지기도 했다. (p.289)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인슐린 저항성은 뇌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이 경우 미토콘드리아 기능부전이 발생하며, 이로 인해 신경전달물질 불균형이 일어나 결국 뉴런의 과활성화와 저활성화 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다. (p.290)
당뇨병 환자는 우울증, 조현병, 뇌전증 같은 정신질환이나 뇌질환을 앓을 위험이 비당뇨인에 비해 몇 배나 높아지고 치료 기간도 더 오래 걸린다.
비만인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울증이나 불안장애에 걸릴 위험이 25% 높아진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대사 시스템의 기능이 망가지는 질환은 뇌에 영향을 미쳐서 정신질환의 발병률을 높일 수 있다.
어쩌면 나는 과체중 또는 비만으로 살아온 20년 이상 서서히 당뇨병으로 가는 수순을 밟고 있었으며, 불안증도 그런 대사적 하락장이 보내는 하나의 신호였을 가능성이 높다.
20대 후반에 다발성 뇌수막종 진단을 받는 건 그리 기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내 뇌에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뇌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아무 망설임 없이 - 어쩌면 필사적으로 - 저속노화 생활로 갈아탈 수 있었다.
그 후 유아기 이후 처음으로 완전한 정상 체중을 유지하게 되었고, 간식을 먹지 않으면 손이 떨리던 증상과, 걸핏하면 심장에 발 많이 달린 벌레가 기어가듯 불안하던 증상이 나를 떠났다.
정말 오랜만에 내 뇌세포 속 미토콘드리아들이 제 기능을 하고 있다. 에너지 대사가 원활해지다 보니 브레인 포그나 불안 같은 장애물들이 뇌 속 에너지 도로에서 잘 청소되고 있는 느낌이다.
뇌 컨디션이 최고조에 오른 게 뇌종양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라니, 인생 참 웃기지 않은가.
여유롭게 가는 저속노화 열차에 올라타고 나니 그제야 저 멀리 ‘혈당 스파이크’와 ‘불안’, '우울'이라는 롤러코스터가 많은 사람을 태우고 폭주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롤러코스터들의 코스는 상당 부분 겹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