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3-3. 대중교통 자리 양보를 거절하던 어르신에 대하여

진심이셨다면, 존경합니다.

by 저삶의

교통약자석에 앉기를 선택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시내버스를 타서 뒤쪽에 들어가려니, 사람들이 창 측을 비워두고 죄다 복도 측 의자에 앉아 있을 때가 있다.

그걸 비집고 들어가느니 차라리 교통약자석을 택한다.


부피가 큰 가방을 들고 탔을 때도 옆 공간이 충분한 교통약자석을 이용하는 게 편하다.


겉보기에 멀쩡한 젊은이가 교통약자석에 엉덩이를 붙이는 건 불안한 일이다.

언제 어르신이 타서 이 자리 옆에 오실지 모르고,

그때가 되면 버스가 더 혼잡해져서 서있는 게 영 유쾌하지 않아 질지도 모른다.


가끔씩 이런 상상이 현실이 된다.

정말로 어르신이 타셨는데 딱히 다른 자리가 없을 때.


1부에서 뇌수막종 진단을 받고 나서 우울 단계를 지나고 있을 땐 심술이 나서 교통약자석을 고집스럽게 꿰찼던 적이 있지만

그런 심한 스트레스 상태가 아니라면 나는 대체로 어르신, 임산부, 아이가 탔을 때 양보하는 편이다.





그런데 가끔 가다 어르신이 앉기를 한사코 거절하시는 경우를 만나곤 한다.


나는 다른 사람의 숨겨진 감정을 바로 알아차릴 정도로 감정 지능이 높지는 않아서

이게 진짜 앉기 싫은 건지, 이 분이 익숙한 방식대로 두세 번 사양하면서 예의를 차리시는 건지 구별을 못 한다.


처음 몇 번 그런 경우를 당했을 땐 한사코 거절하시니 도로 앉아버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어쩐지 찝찝했고 다리가 편한 것 이상으로 속이 불편했다.

그냥 한두 번 사양하시는 건데 내가 옳다구나 하고 다시 앉은 건 아닌지 싶어서.


그러다가 이렇게 생각했다.

‘사람이, 그것도 노인이 앉기를 싫어하는 게 말이 되나?

이건 예의상 사양하는 거야. 거절당해도 끝까지 비키는 게 맞아.’

그러면서 한편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왜 내가 자리 양보를 해주는 입장인데 사양하는 행위의 진의까지 파악하는 감정 노동을 해야 하지?

순둥 하게 생긴 젊은 여자한테는 다들 그런 걸 기대하는 건가?’

또한 다른 젊은 여자들에 비해 내가 정서적 공감능력이 낮은 것에 대한 열등감이 들었다.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눈치를 척척 보고 남의 비위를 맞출 수 있는 사람이 부럽다.

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 감정을 바로바로 읽고 거기에 동화되는 게 정서적 공감,

다른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추측해 알아차릴 수 있는 게 인지적 공감인데

나는 매우 높은 인지적 공감능력에 비해 정서적 공감능력이 형편없다.




돌이켜보면, 정말 앉기를 원치 않는 걸로 보일 정도로 강하게 양보를 거절하신 분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운 좋게 그 나이까지 건강하게 살아 있다면,

그런 ‘기립좋아할머니’ 같은 부류의 노인이 되고 싶다.


지금 그런 ‘기립좋아노인’을 마주치게 된다면 이렇게 생각할 것 같다.

‘이렇게 지혜롭고 건강하게 사시는 분을 길에서 만나다니 정말 행운이다.

이 분의 행복한 여생을 위해 내 양보하는 젊은이 이미지 정도는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다.’


앉기를 원치 않는 데에도 여러 이유가 있을 순 있다.

앉으면 엉덩이가 아픈 질환이 있다거나, 앉으면 가스가 찬다거나,

그래서 서 계실 수밖에 없는 거라면… 유감이다.


그런데 만약 ‘앉는 것보다 서 있는 게 좋아서’가 이유라면 내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뛰면 걷고 싶고, 걸으면 서고 싶고,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로 표현되는,

편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 내지 관성이 있다.


이걸 반대로 하는 걸 좋아하는 노인은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고 그 과정을 즐겼을 가능성이 높다.




많은 젊은이들이 건강을 챙기려고 필라테스를 다니고 PT를 받고 러닝크루에서 활동한다.

운동 시간이 끝나자마자 그들 중 대부분은

지하철이나 아파트를 올라갈 때 멀쩡한 계단을 두고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에 서서 핸드폰을 응시한다.


가끔 지하철에 타면,

폰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되는 규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100%의 사람들이 폰을 보고 있다.

마찬가지로 빈자리에 앉지 않으면 안 되는 규칙은 없는데,

누구든지 앉고 싶어 한다는 게 불문율처럼 되어 있다.


나도 그런 젊은이 중 하나였는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런 부분에서 완전히 딴 사람이 됐다.


첫 번째는 2-6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길 위의 뇌>>나 <<느리게 나이드는 습관>>같은 책을 읽은 경험 덕분이다.

움직임을 통해 뇌가소성과 인지 예비능을 적립해 두는 것이 누구에게나 좋지만,

뇌종양이 있는 나에게는 특히 중요한 일이란 것을 깨달은 것이다.


두 번째는 저속노화 식단을 하고 초가공식품을 끊은 후 8kg 이상 가벼워진 몸의 초석 위에,

규칙적인 러닝으로 심폐체력이 쌓이고 발레를 통해 근육과 균형 감각이 탄탄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지하철 환승을 하다가 기나긴 계단이 나오면 “와 계단 개꿀!” 또는

“여기는 계단이 엄청 좋네.”라고 속으로 외치고 신바람 나게 계단을 오른다.

계단 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에스컬레이터에 가만히 서 있는 것보다 계단이 빠르다는 걸 느낄 것이다.


지하철에서 서있게 되면 눈을 감고 균형 감각을 훈련하거나 발레 를르베(까치발) 연습을 하기도 한다.

10층 이상에 위치한 집에도 어지간하면 두 다리로 올라온다.

목적지와 지하철역이 조금 떨어져 있거나 해서 걷는 거리가 길어지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내 뇌가 건강해질 기회를 주다니.

몸을 움직임으로써 나에게 가장 필요한 뇌가소성이 또 한 번 적립되었구나, 고맙다.




이런 식으로 생각이 바뀐 건 삶의 여러 부분에서 내 태도를 바꾼다.


예를 들어 걸어서 15분 거리의 가게에서 뭔가를 사 와야 한다면

예전에는 ‘아 너무 귀찮아.. 왜 이렇게 멀리 있는 거야? 쉬지도 못하고’라고 생각하며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지금은 ‘물건도 사고 걸을 수도 있다니, 이렇게 운이 좋아도 되는 건가?’라고 생각한다.


운전을 할 때에도 예전 같으면

‘위험하고 귀찮게 운전을 해야 한다니, 도대체 자율주행은 언제 나오는 거야?

난 운전 감각이 없어서 초보 탈출 같은 건 절대 못할 듯’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요즘은 ‘차선 변경하는 게 저번보다 나아졌네. 역시 뇌는 어려운 일에도 적응하는구나.

오늘은 또 어떤 돌발 상황을 극복해서 운전 실력이 더 좋아지려나?’ 한다.


억지로 긍정적인 생각을 유도하는 건 아니다.

다만 몸이 빠릿빠릿해지니 생각도 그에 맞춰가는 걸로 보인다.



가끔 나는 고민에 빠진다.

그다지 거동이 불편해 보이지 않는 노인이 탔을 때 자리를 비켜주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그게 정말 그분을 위하는 일인지,

내가 괜히 그 노인을 꼼짝 못 하게 만들어서

그분이 활동할 시간을 뺏고 치매에 걸릴 위험을 높이는 건 아닐지?


반면 이렇게 약아빠진 생각도 한다.

‘노인 분이 앉는 건 본인 선택이고, 어찌 됐든 일단 기분은 좋으실 테니,

나는 착한 젊은이 이미지와 뇌 건강을 동시에 챙기니까 아무튼 비켜주는 게 이득이다.’


정말로 서있는 게 더 좋아서 앉기를 거절하시는 노인이 있다면

그분은 잠깐의 움직임이 주는 활력과 건강의 의미를 아는 분이지 않을까?

그분이 젊었을 땐, 활동하는 게 뇌에도 좋고 치매 예방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널리 퍼지지도 않았을 텐데.

또한 모두가 당연히 앉는 게 좋다고 믿을 때 독립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분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이가 들어도 끊임없이 생각의 칼날을 예리하게 다듬어 온 분이 아닐까?

내 내면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듯,

그분도 어려움이나 난관이 닥쳤을 때 기회로 받아들이며 살아오지 않았을까?


그런 분이라면 나는 기꺼이 뇌가 건강해질 기회를 그분에게 드리겠다. (그러니까, 내가 앉아있겠다.)

대신 나는 흔치 않은 참어른을 만난 감동 덕분에 스트레스 호르몬이 줄어드는 경험을 할 것이다.


그분이 실제로 그런 분이든 아니든

기립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나는 그분이

우아하게 나이 든 노인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며 미소를 띨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