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가소성이라는 비빌 업힐
요즘 러닝 열풍이 불고 있는데, 나도 거기 탑승한 지 5개월째.
내가 달리기를 취미로 한다니, 믿을 수 없다.
운동회에서 꼴찌 아닌 적이 없었고
오래 달리기에서는 최선을 다해 뛰는데 체육 선생님에게 ‘왜 성의 없이 뛰냐’ 며 꾸중을 먹기도 했다.
최대한 안 뛰려고 버팅기면서 살았는데
역시 사람은 난관이 닥쳐야 바뀌는 건가?
달리기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뇌에 좋기 때문이다.
맞아, 나 뇌에 좋다고 검증된 거 다 한다.
자칭 저속노화 학파인 나는 ‘정희원의 저속노화’ 채널 영상을 올라오는 대로 시청한다.
책 소개 코너에 나오는 <<길 위의 뇌>> 저자 인터뷰도 당연히 봤다.
소개되는 책은 보통 구매해서 정신없이 읽는다.
이 책의 저자는 20년 동안 달리기를 해 온 재활의학과 의사 정세희 교수님이다.
이 분은 재활 환자 중에서도 특히 뇌질환이나 뇌 손상 후 인지기능, 신체기능이 저하된 케이스를 주로 본다.
정세희 교수님은 환자들에게 운동 처방을 설명하기 위해 진료 시간을 많이 들인다고 한다.
그러면 운동 숙제를 해 오는 환자도, 안 하는 환자도 있는데, 꼬박꼬박 하는 환자의 재활 경과가 더 좋다고 한다.
이 책은 전체가 인상 깊었다고 할 정도로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선 저작권에 걸리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로 많은 인용을 하게 됐다.
우리가 믿고 있는 뇌가소성. 병에서 회복하기 위한, 혹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뇌가소성은 나이가 들수록 떨어지고 분명한 한계가 있으며 병이 있거나 나이 든 뇌는 그만큼 뇌가소성도 떨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시간을 들여 노력하는 것이다. 뇌가소성은 절대 그냥, 공짜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디 건강하고 힘이 있을 때, 운동할 수 있을 때 해 두자. (p.22)
다행히 우리는 뇌가소성을 지닌 덕분에 뇌질환으로 잃은 기능을 되찾을 수 있다. 그래서 신세 한탄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 기능을 되찾기 위해서는 새로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시작해야 한다. 뇌가소성은 시간이 지나면 급격히 없어지기 때문이다. (p.39)
운동으로 크게 변하는 장기 중 하나가 바로 뇌다. 유산소운동은 뇌 안의 NVU를 건강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유산소운동은 뇌세포의 건강을 유지시키고 뇌세포가 잘 일하게끔 만드는 행위이다. (p.135)
나는 태어나서부터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가정과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받고 자랐다.
아마 많은 독자분들도 그랬을 듯.
누군가를 편하게 해준다는 건
그 사람이 최대한 몸을 움직이지 않고
근육을 사용하지 않도록 해주는 것과 같다.
그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건
누군가를 위하는 일이다.
누군가가 움직이게 하는 건
그 사람을 부려먹는 일이다.
by 고정관념
아침에 누워 있으면 알아서 얼굴을 닦아주고 붕 떠서 강의실로 주인을 날라주는 침대처럼,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되는 환경을 동경했다.
엄마는 다른 가족들이 가만히 있게 한 후
본인이 무리해 가며 완벽하게 집안일해두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러면서 편하게 쉬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짜증을 내곤 했다.
나는 그런 모습을 자주 보면서
‘집안일은 괴로운 거구나. 최대한 가만히 있는 게 좋은 거구나’
라고 인식하게 됐다.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인 줄 알았다.
움직이는 것이 몸에 맞지 않는.
움직일수록 소진되는 존재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다.
혹시 움직이는 걸 즐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다른 부류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특수한' 유전자를 타고나지 않았다고.
심지어 하루에 3시간 정도 운동하고 틈만 나면 나가는 아빠를 두었지만
그 유전자가 나에게 전달되지 않은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은 뛰기 위해 만들어져 있고, 현대 사회에서 과도한 운동이란 없다는
영어식으로 표현하자면 ‘아무리 운동해도 지나치지 않다’라는 사실!
왜 이걸 지금까지 아무도 안 알려준 거야?
우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만들어진 몸을 가지고 180도 달라진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 결과로 조상들과 똑같은 몸과 유전자를 지니고서 조상들은 걸리지 않았던 병에 걸리고 죽는다. 현대사회는 천적과 자연재해가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습의 위험이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혁신과 발전이라는 세련된 가면을 쓰고 있는 위험이다. 우리의 몸에는 몇백만 년 동안 달렸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현대의 새로운 위험에 대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끊임없이 각성하고 노력해야 한다. 오래 달려 살아남았고 번성했던 인류는 지금도 여전히 ‘달릴 운명’인 것이다. (p.288)
특히 나는 앞으로 개두술 받을 수도 있으니까
운동으로 좋아질 수 있다는 뇌가소성이 남들보다 더 많이 필요할 것 같다.
뇌가소성은 뇌 속 신경 회로의 유연성
즉 기존에 있던 연결을 수정해 바뀐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성질을 의미하고
인지 예비능이라는 개념과도 연결된다.
특정 뇌 부위에 구조적 손상이 있어도 주변 부위에서 그 기능을 대신 해줄 수 있는 능력을 인지 예비능이라 한다.
게다가 공부를 잘하려면 뇌혈관이 튼튼해야 하고 그러려면 유산소 운동 필수다.
어려운 운동, 고강도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게 어쨌든 나에게 좋은 일이다.
운동한다고 무조건 수술 부작용을 덜 겪거나 공부가 더 수월해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최소한 확실히 안 좋아지는 길은 피해야지!
저속노화 습관을 시작할 때와 비슷한 논리다.
이 책에는 뇌 질환에 걸려 침상 생활을 했지만 다시 일어서는 환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게 언젠가 내 얘기가 될지도 모른다.
리브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병이 완치된 건 아니기 때문이다. ‘관해’라는 단계일 뿐이다. 여전히 암이 재발할 가능성은 꽤 높다. 그래서 구불구불한 길을 계속 가야 한다. 가다가 낙석을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 길 위에서 오른발 앞에 왼발, 다시 왼발 앞에 오른발을 놓으면서 나아갈 것이다. (p.84-5)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고 본인이 지금 병원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그를, 3년 만에 걷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테니스공을 좇던 집중력, 공의 저항을 이겨 라켓을 휘두르던 근력, 경기에 임하던 마음가짐, 젊었을 적 갈고닦았을 체력, 어려운 훈련을 참아낸 근성, 이기고자 했던 투지. 나에겐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 그것이 근성이나 의지든, 습관이든, 관성이든, 체력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일생에 걸친 습관은 몸이나 혼에 새겨져 위기 때 힘으로 발휘된다. (p.244)
그럴 가능성은 아주 적지만
나도 나중에 혹시 가족도 못 알아볼 정도로 심한 뇌 손상이 온다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걷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서울대를 나오고, 의대에서 장학금 받고,
이러쿵 저러쿵 했던 과거와의 연속성이 없어진다고 해도
뇌가 싹 리셋되어 버린다고 해도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은 게 2025년 1월쯤인데
마침 수영을 10개월 정도 해서 상급반까지 올라가니 새로 배우는 것이 적어지고 뺑뺑이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미숙한 접영 물잡기 때문에 어깨도 아파 왔다.
큰맘 먹고 주종목을 발레와 달리기로 바꾸기로 했다.
그러길 잘했다.
발레와 달리기가 수영보다 뇌에 좋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수영도 뇌에 아주 좋다.
그러나 이미 수영에 꽤나 익숙해진 내 뇌에는 새롭게 극복할 거리가 필요했다.
발레는 매 시간 ‘극복’ 해야 하는 운동이다.
매번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동작을 배운다.
이를테면 지금 배우고 있는 ‘피루엣 턴’이 있다.
양팔로 앙아방(가슴 앞쪽으로 둥글게 안은 팔),
한쪽 다리로 파쉐(다리를 외회전 한 상태로 접어 반대쪽 다리 무릎 부분에 발끝을 닿게 하는 동작)를 만든 채
반대 다리 까치발로 서서 도는 동작이다.
대충 흉내만 내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제대로 하려면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고관절 각도, 발 모양과 위치, 무릎이 잘 펴졌는지, 팔꿈치의 위치, 흉곽의 크기, 등이 판판한지, 복근, 시선…
이전의 나라면 ‘나는 발레에 맞지 않는 사람이다. 발레는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다.’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뇌 가소성 덕분에 대부분의 운동, 일, 공부는 어느 정도 하다 보면 된다는 사실을.
주 1회 나오는 사람도 척척 하지만 주 3회 다니는 내가 못 하는 동작이 있더라도 굴하지 않는다.
대신 수업 전후에 혼자 연습을 한다.
그러다 보면 회차를 거듭할수록 안 되던 게 되고, 엉성했던 동작이 모양을 갖추어 간다.
운동은 나의 컴포트존을 넓히는 과정이다. 심폐체력, 근력, 자율신경계 조절, 대사 기능, 면역 기능 등 신체건강 관점에서도 그렇지만 힘듦을 참고 견디는 정신력,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는 의지, 불편과 고통에도 굴하지 않는 근성도 운동을 통해 키울 수 있다. 웬만한 스트레스는 잘 버틸 힘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은가, 아니면 조금만 힘들거나 불편해도 바로 포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전자를 바란다면 운동, 그것도 내 컴포트존을 넓혀줄 운동을 해야 한다. 쉬운 운동만 하면 컴포트존과 회복탄력성은 결코 확장되지 않는다. (p.309)
발레 수업이 없는 날에는 러닝을 한다.
달리기는 유산소 운동 위주라는 점에서 수영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몇 가지 포인트에서 내 상황에는 수영보다 더 적합하다.
의대에서 가까운 수영장은 없다.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긴 하지만 강습 시간을 맞춰야 매일 운동을 할 수 있다.
반면 달리기는 학교 운동장, 가까운 헬스장, 혹은 길에서 쉽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의대 복학 후에도 유산소 운동을 꾸준히 하려면 달리기 습관을 잡아 두는 게 도움이 된다.
수영을 하려면 옷 입고 선크림 바르고 수영장 가서 씻고 수영복 입고 준비운동 해야 한다.
이 과정은 평균 40분 정도다.
달리기를 하려면 운동복 입고 선크림 바르고 준비운동 후 달리는 장소로 나가야 한다.
이건 약 20분 정도다.
수영도 그렇긴 하지만, 달리기는 운동량과 속도에 따라 좀 더 차이가 극명하다.
익숙해질수록 페이스가 빨라지고 같은 운동량에 드는 시간은 줄어든다.
원한다면 운동량을 늘리기도 더 쉽다.
수영은 물 무게를 버티며 4대 영법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근육이 붙는데,
달리기는 점점 더 빠르게 혹은 멀리 갈수록 조금씩 근육이 더 발달한다.
어쩌면 발레라는 근력 운동을 병행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수영장은 반이 올라갈수록 다른 회원들에게 잘 보여야 수월한 운동이 가능하다.
오래 다닌 회원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이다.
또한 찻길처럼 앞사람이 헤엄쳐서 가야 뒷사람도 갈 수 있는 구조다.
때문에 눈치 봐야 할 일이 은근히 많다.
특히 내 애매한 신분을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을 때 계속 거짓말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수영장 인간관계는 삶의 활력소가 될 수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처럼 매일 사람을 만날 필요가 없을 때 한정이다.
복학 후를 생각하면 매일 학교 사람들만 만나도 방전된다.
반면 달리기는 그냥 혼자 나가서 뛰면 되고, 남편과 같이 하기도 좋다.
혹여 지나가는 사람과 인사를 해도 금방 스쳐 지나간다.
요즘은 주 3회 발레, 주 4회 달리기를 하며 지낸다.
운동을 통해 느낀 심신의 변화는 3부에서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복학 후에도 주 3회 이상 달려야겠다.
이렇게 적립해 둔 내 뇌가소성이 필요할 때 잘 발휘되기를.
뇌질환을 치료하는 의사라고 해서 병을 얻지 말라는 법도 당연히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 출근 전에도, 또 어제도 달렸다. 오늘의 달리기는 나이 든 내가 병에 걸렸을 때 쓸 약이 되어줄 것이다. 오늘의 운동 덕분에 병이 하루라도 늦게 찾아온다면 그것은 더욱 좋은 일이다. 운동은 미래에 당신을 치료해 줄 약이다. 쓸 약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 놓기를 권한다. 하루라도 일찍. (p.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