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OXA 매거진 May 22. 2020

왜 페터 한트케에게 노벨상을 주어야 하는가?

페터 한트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왜 페터 한트케에게 노벨상을 주어야 하는가?


201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페터 한트케(Peter Handke)에 대해 말하면서 그에 관한 아무런 논란이 없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것은 기만이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인종학살을 자행한 전범 밀로셰비치를 옹호하는 행보를 보였으며, 2006년에는 밀로셰비치의 장례식에 참석해 직접 추도사를 읊기도 했다. 이로 인해 한트케는 무수한 논란에 휩싸였으며, 작년에는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유럽 각계에서 터져 나오기도 했다.


Peter Handke (1942~ )


페터 한트케의 노벨상 수상은, 이제는 좀 사라져 줬으면 하는 구시대적인 말싸움을 다시 불러왔다. "작가와 작품을 분리하여 평가할 수 있는가?" 지겨운 질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예."와 "아니오." 중 무엇을 고르더라도, 한트케는 노벨상을 타서는 안 된다.


작가와 작품을 완전히 분리할 수 있다고 치자. 그리하여 페터 한트케의 정치적 행보와 무관하게, 그의 작품들이 성취해 낸 나름의 성과를 인정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대체 왜 한트케에게 노벨상을 주어야 하는가? 작품이 성취해 낸 성과인데, 어째서 작가를 치하해야 하는가? 평가의 단계에선 작품과 작가를 철저히 분리하는 것처럼 굴면서, 시상의 단계에선 작품과 작가를 스리슬쩍 엮으려 드는 것은 어째서인가?


보스니아의 학살 생존자들이 페터 한트케의 노벨상 수상을 반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작가와 작품은 분리될 수 없는가? 작품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일부로만 평가되어야 하는가? 그렇다고 치자. 그리하여 전쟁범죄자를 옹호한 한트케와 그의 작품을 고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하자. 그럼 도대체 누굴 치하할 수 있단 말인가? 사생활에 아무런 추문과 논란도 따라붙지 않는 작가만을 골라 공로를 치하해야 한다면, 그러한 비평적 작업을 과연 '문학적'인 것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 공허한 말싸움이 아직도 출현하는 이유는, 문학 작품이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완결적인 의미를 가지는 무언가라는 인식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나 전혀 그렇지 않다. 문학은 책이 아니다. 책은 독립적인 물질이지만, 문학은 오직 인간의 언어적 의사소통 위에서만 존재하는 무언가다. "한 편의 작품은 페이지에 적힌 검은 글자들에 대한 개개인의 재창조적인 반응으로만 거기 있으며, 그러한 반응들이 서로 만날 수 있게 되는 어떤 것이 작품이다." 영국의 비평가 프랭크 리비스(Frank. R. Leavis)는 1972년에 이미 이와 같이 말했다.


Frank Raymond Leavis (1895~1978)


다시 말해, 한트케의 작품은 한트케라는 인간과 구분 혹은 결합시켜야 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은 한트케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평등하게 공유하는 무언가로, 오직 이에 대한 대화들, 무수한 칭찬과 비난들 사이에서 비로소 존재(화)할 수 있는 무언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겐 여전히 한트케의 작품을 읽을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의 작품을 무작정 칭송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고 성을 내며 치워 버려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우리는 오직, '읽고 말해야' 한다.




언어의 불완전성과 소통의 불가능성 :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한트케의 작품은 불친절하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은 희곡 〈관객모독〉(Publikumsbeschimpfung)인데, 우리나라에서도 수 차례 상연된 바 있는 이 희곡에는 줄거리가 없다. 명확하게 정해진 대사도 없다. 오직 4명의 배우들이 언어유희나 모순들을 즉흥적으로 쏟아내는 것뿐이다. 나중에는 관객들에게 욕을 퍼붓기도 하고, 연출자에 따라 관객에게 물을 끼얹기도 한다.


〈Publikumsbeschimpfung〉 performed at 'Theater in der Arche Noe' in 2014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역시 불친절하기는 마찬가지다. 소설의 서술은 무미건조하고 딱딱할 뿐만 아니라 혼란스럽다. 일반적인 기승전결 따위는 찾아볼 수 없으며, 서술의 초점은 시시각각 변화한다. 서술하고자 하는 내용조차 혼란스러운 이 소설에서 간신히 파악할 수 있는 줄거리라고는, 주인공 '블로흐'가 자신과 하룻밤을 보낸 여성을 살해하고 국경 근처의 마을로 달아났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 앙상한 줄거리는 소설을 독해하는 데 그리 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줄거리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서술 그 자체다. '문학은 언어가 가리키는 사물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라는 한트케의 발언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을 읽는 데 좋은 지침이 된다.



여관방에서 그는 먼동이 트기 직전에 잠이 깼다. 갑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 그는 안정된 평상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세워 둔 자동차 위에 덮개가 여유롭게 덮여 있었다. 방안 벽에는 수도관 두 개가 있었다. 이 두 개의 관은, 위로는 천장까지, 밑으로는 바닥까지 평행으로 뻗어 있었다. 그가 본 모든 것은 최악의 방식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구역질은 멈추지 않고 그를 괴롭혔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마치 강제로 하는 것처럼, 모든 대상에 대한 단어를 생각하게 되었다. 대상을 보면 단어가 떠오른다. 의자, 옷걸이, 열쇠.


블로흐는 소설 내내 타인과의 소통에 실패하는 인물이다. 블로흐와 사람들은 서로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거나 오해한다. 그리하여 이들의 대화는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블로흐가 거는 통화는 연결되지 않으며, 연결되더라도 대화는 역시 성립되지 않는다. 그는 아주 가끔 대화다운 대화를 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주먹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그는 한 여성과 "한 몸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를 살해하기도 했다.


in the Film 〈Die Angst des Tormanns beim Elfmeter〉, 1972


이러한 소통의 좌절은 블로흐의 잘못인가? 아니면 타인들의 잘못인가? 아니,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소설은, 소통이란 애초에 좌절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블로흐가 밝고 조용한 방 안에서 "안정된 평상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바라본다고 해도, 그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대상에 대한 단어" 뿐이다. 그는 결코 대상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


사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우리는 언어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언어들이 대상 그 자체와 동일한 것인가? 우리가 어떤 귀여운 네발짐승을 보고 그것을 '고양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그 동물이 '고양이'이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그러한 네발짐승을 '고양이'라고 부르자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언어는 대상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의 편의를 위해 자의적으로 제작된 것이며, 그렇기에 결코 대상 그 자체가 될 수 없는 무언가다(한트케가 소쉬르의 언어학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은 자명하다).


블로흐의 "구역질"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어떤 대상을 명확하게 인식하려 할수록, 그는 더욱더 많은 "단어들"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그는 '수도관'이라는 추상적 단어로는 표현되지 않는 수도관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위로는', '천장까지', '밑으로는', '바닥까지', '평행으로', '뻗어', '있었다' 등의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더 많은 언어의 사용은 결국 더 많은 추상의 사용일 뿐이다. 수도관을 명확하게 인식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그를 수도관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한다. 그의 "구역질"은 이러한 아이러니에서 비롯된 멀미다.


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


블로흐는 오히려 무언가를 명확하게 인식하거나 표현하려고 하지 않을 때 자연스러움을 느낀다. "그가 더 이상 아는 것이 없어 말을 중단하고 표현 가능한 문장을 찾으려고 할 때, 주변이 다시 눈에 들어왔고 여기저기에서 개별적인 것들이 보였다. (…) 차츰차츰 블로흐는, 머리 밑동은 검게 남긴 채 탈색한 머리 대신, 목에 걸린 각각의 브로치 대신, (…) 다시 주변의 윤곽, 움직임, 목소리, 외침, 그리고 사람을 전체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갑자기 탁자에서 쓰러지려는 손가방을 조용하고 신속하게 붙잡아 바르게 세워 놓았다. 첫 번째 여종업원이 그에게 빵 한 조각을 잘라 내밀자,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서 한 입 베어물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이 생길 수 있다. 인간은 진정한 소통을 위해 언어를 버려야 하는가? 그러나 그것은 한케의 의도가 아닐 것이다. 바로 위의 인용부에서도 블로흐는 어떻게든 언어를 통해 대화를 하고 있으며, 한트케 본인 또한 언어를 통해 이를 서술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그가 언어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책이고 희곡이고 때려치우면 될 일이다. 평생 입 다물고 살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언어를 사용하는 일은 언어를 버리는 일보다 숭고하다.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비록 완전한 소통이 불가능할지라도 끊임없이 그에 도전하는 일인 반면, 언어를 버리는 것은 완전한 소통 따윈 불가능하니 포기해버리자는 일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완전한 소통, 완전한 하나됨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소임이라고, 소설은 말하는 듯하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는 어째서 불안해 하나


그러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리 낭만적인 일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주 위험할 수 있다. 언어가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구성물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언어는 그 자체로도 특정한 의도나 이데올로기를 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단지 그것을 사용하는 것만으로 "이것은 하라, 저것은 하지 마라 하는 요구"를 담은, 이데올로기의 "행동 규칙들"이 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어 강제 교육은 일본어의 단순한 사용을 넘어 민족문화의 말살을 꾀하는 수작이었다.



이를 거부하기라도 하듯, 블로흐는 관습적인 언어를 멀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는 사람을 "아이스크림 컵" 같은 사물의 이름으로 부르거나, 아니면 기존의 언어를 사용하는 대신 자신이 만들어 낸 독자적인 기호를 통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의도적으로 문장의 일부분을 비워 두기도 한다. 그러나 오래가진 않는다. 그는 결국 관습적인 언어로 다시 돌아온다. 물론 이는 독자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이기도 하겠으나,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페널티킥이 선언되었다. 관중들은 골문 뒤로 달려갔다.
"골키퍼는 저쪽 선수가 어느 쪽으로 찰 것인지 숙고하지요." 하고 블로흐가 말했다. "그가 키커를 잘 안다면 어느 방향을 택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죠. 그러나 페널티킥을 차는 선수도 골키퍼의 생각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골키퍼는, 오늘은 다른 방향으로 공이 오리라고 다시 생각합니다. 그러나 키커도 골키퍼와 똑같이 생각을 해서 원래 방향대로 차야겠다고 마음을 바꿔 먹겠죠? 이어 계속해서, 또 계속해서……."


소설의 말미에서, 블로흐는 골키퍼와 키커의 심리전을 이야기한다. 페널티킥을 막기 위해 골키퍼는 키커의 생각을 예측해야 한다. 키커는 그런 골키퍼의 생각을 예측해야 하고, 골키퍼는 다시 그런 키커의 생각을 예측해야 한다. 심리전은 무한히 계속된다.


이것은 언어를 주고받는 두 인간에 대한 기묘한 비유임에 틀림없다. 결국 의사소통이란 인간과 인간을 매개하기 위한 고군분투가 아니던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가 아니다. 아무리 참신하고 독창적인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소통의 근본적 불가능성은 해소되지 않는다. 의사소통의 간극은, 모순적인 말이지만, 치열한 의사소통을 통해서만 줄일 수 있다. 불완전한 언어를 통해 상대를 헤아리고, 그리하여 나를 헤아리는 그 모든 불완전한 행위가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킬 가능성을 낳는다.


in the Film 〈Die Angst des Tormanns beim Elfmeter〉, 1972


물론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가 '불안'한 이유는 그래서다. 페널티킥은 골키퍼에게 대단히 불리한 룰이기 때문이다. 블로흐가 말하듯, 키커가 달려 나오면 골키퍼는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기 마련이고, 키커는 그것을 보고 반대 방향으로 공을 다. "골키퍼에게는 한 줄기 지푸라기로 문을 막으려는 것과 똑같아요."


그러나 기억하라. 골키퍼는 종종 페널티킥을 막는다. 그것이 아주 드문 일임에도 불구하고, 골키퍼와 키커는 종종 같은 방향을 선택하곤 한다. 우리 또한 그러하다. 정확히는, 그러할 수 있다. 그러니 너무 불안해하지 말도록 하자. 페널티킥을 많이 막기 위해서는, 페널티킥 앞에 많이 서 보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