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없이 중간자로 사는 사람
토요일, 대학교 4학년 중간고사 시험을 치렀다.(나는 재작년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어서 편입을 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전에 한 번도 다뤄보지 않은 주제의 강의를 해야 했다. 일요일 새벽 2시까지 PPT를 완성하고, 새벽 6시에 알람 소리에 겨우 눈을 뜨자 3시간짜리 수업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다행히 별다른 이벤트 없이 무사히 수업을 마쳤다.
월요일 오후, 칼럼 마감 시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짧은 낮잠 한숨이 필요하다고 느껴 이마를 탁탁 두드리며 눈을 붙였지만, 눈을 뜨고 보니 러프하게 완성했다고 믿은 글이 나를 비웃고 있었다. 노트북 앞에 다시 앉아 글을 이리저리 옮기고 문장을 또 다듬느라 몇 시간을 허비하고 나서야 시계를 보니, 벌써 월요일 밤 10시였다.
“아, 맞다. 강의계획서.”
당일에야 요청받은, 100명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큰 강의. 준비할 내용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고민이 깊어질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차라리 바닷바람에 머리를 식히기로 결심했다. 주머니에는 프린트한 칼럼 원고와 볼펜을 챙겨 넣고, 모래 위를 한 걸음씩 내디뎌 바닷가로 향했다.
바닷가로 향해 가는 길, 공중으로 뭔가를 띄워서 불빛이 나는 장난감 같은 물체를 판매하던 아저씨가 외국인에게 열심히 그 물건을 설명하고 있었다.
“노파워, 노파워.”
노파워 노파워.. 중얼거리며 바다를 향해 걸었다.
모레를 따라 걸으니 바다 앞이었다. 바다를 보니 왠지 엄마가 생각이 났다. 엄마는 불교였지만 돌멩이나 물에도 기도를 올리던 분이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며 나도 모래 위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칼럼 반응이 좋았으면…
강의계획서, 제가 최종 1인이 되게 해 주세요…
시험 결과도 잘 나오길…”
그러다 문득, 허무하게도 이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계속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나요?”
혼자 웃음이 터졌다. ‘계속 열심히 살아야 하나’라고 묻고 있는 내가 우스웠다.
사실 나는 뭐든지 앞으로만 가고 싶다. 앞서나가고 싶다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걸어가는 사람이고 싶다. 칼럼이 잘 되든 잘 안되든 내가 어떤 강의를 하게 되든 안 하게 되든 그게 내 삶에서 엄청난 변화를 불러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그 일들을 모두 내 선에서 후회 없이 하고 싶다.
성공을 위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 완수하는 ‘중간자의 삶’을 살고 싶다.
한 시간쯤 파도 소리를 들으며 다리가 저릴 때쯤,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불속으로 파묻혀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화요일 새벽, 6시쯤 눈을 떠서 강의계획서 제출 마감 30분 전에 겨우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니, 온몸의 긴장이 풀려나갔다.
아침이 밝아오자 남편과 함께 마트로 향했다. 진열대 사이를 걸으며 “이게 더 싸네”라고 소소한 티격태격을 나누던 그 순간이 얼마나 반갑고 따스했는지 모른다. 지난 몇 주간은 내 일에 파묻혀 우리의 일상이 사라졌던 터였다. 장을 보고 계산을 마치자, 내 마음에도 다시 평온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종종 미래를 꿈꾸라고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을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싶다. 남편의 미소, 내가 머무르는 공간만의 느낌과 냄새, 그리고 지금 우리를 배부르게 해 줄 음식. 이 모든 것이 모여 내 하루를 버티게 해 주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늘도 나는 여기, 이 자리를 피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간다. 좋은 태도로 하루를 마주하며, 중간자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며.
노 파워 노 파워. 힘을 주지 않아도 쓱, 욕심없이 잠깐 하늘 위 머무르다가 반짝이다 내려오는 그 물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