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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호 Jul 09. 2021

영화 <스파이의 아내> 창이 보이고 두 세계가 잇닿았다

[영화의 단상] <스파이의 아내>(2020)

일본 제국이 중국 대륙과 동남아시아로 팽창하며 검은 야욕을 드러내던 1940년. 고베에서 무역회사를 경영하는 유사쿠(다카하시 잇세이)는 아내 사토코(아오이 유우)와 단란한 부부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어느 날 유사쿠는 만주로 출장을 떠나는데 그곳에서 의도치 않게 관동군(만주국에 주둔한 일본 육군)의 생체실험을 목격한다. 이후 일본으로 귀국한 유사쿠는 코스모폴리탄(세계 시민)을 자처하며 관동군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할 계획을 세운다. 남편(유사쿠)의 은밀한 계획이 가정에 한바탕 폭풍을 가져오리라 직감한 사토코는 부부의 안위를 걱정하나 곧 남편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한편 헌병대가 유사쿠의 수상쩍은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스파이의 아내>(구로사와 기요시, 2020)는 2020년 6월 NHK에서 방영된 동명의 스페셜 드라마를 재보정을 거쳐 영화화한 작품이다. 제77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감독상-은사자상을 수상했고 제94회 키네마 준보(일본의 영화 전문지) 일본 영화-베스트 10 1위를 차지했다.(참고로 같은 회 해외 영화-베스트 10 1위가 <기생충>, 2위가 <벌새>다)


<스파이의 아내> 보다 직접적으로 당대 상을 언급하는  장면이 있다. 하나는 사토코와 유사쿠의 극장 신이고 다른 하나는 사토코와 노자키 교수(사사노 타카시) 면회 신이다. 앞선 장면에서 사토코와 유사쿠는 일본군의 남태평양 진출을 선전하는 뉴스릴을 접한다. 뒤의 장면, 사토코는 정신병동에 면회  노자키 교수에게 “이곳은 검열된 신문만   있다 푸념한다.  신이 고발하는 1940년대 일본 정부의 선전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외부 정보는 차단하고 자체 정보를 유통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영화가 세계를 통제하는 방식도 ‘외부 정보 차단과 내부 정보 생산이라는 점이다.


<스파이의 아내>가 바깥 정보를 소거하는 방식은 꽤 간단하다. 프레임 안에 들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유사쿠와 후미오(반도 료타)가 만주로 떠날 때 카메라는 항구 밖까지 그들을 쫓지 않는다. 숙질이 영화 안으로 재진입한 시점은 그들이 몇 달간 여행을 마치고 고베로 돌아왔을 때다. 두 인물이 만주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영화는 끝까지 관객에게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가 더 어울리는 표현이겠다. 만주에서의 그들은 영화 바깥에 있었으니까. 영화가 용인하는 공간적 토대는 오로지 고베로 국한된다. 유사쿠와 후미오가 목도한 참상은 한참 후에야 이들이 촬영한 필름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부 정보 생산은 어떠한가. ‘밀도 높은 실내극’이라는 세간의 평처럼 <스파이의 아내>는 농밀한 미장센이 흐드러져 시각적인 풍요로움을 형성한다. 더욱이 모든 대사에는 문장 하나에 정보 하나 이상을 꿰어놓아 오디오의 효율을 빠듯하게 활용한다. 영화의 주 무대는 사토코의 집, 유사쿠의 사무실, 헌병대 본부로 상술한 정보 생산은 모두 실내에서 이루어진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영화 속 실내 공간에 바깥 풍경을 엿볼 수 있는 창문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어쩌다 창이 있더라도 밖에서 강하게 쏘아붙이는 빛이 아득한 분위기를 드리우며 외부세계의 정보를 모조리 막는다. 희뿌연 빛의 장막이 높은 정세도의 공간을 감싸 밀도 있는 실내악을 완성하는 것이다. 결국 <스파이의 아내>에서 창문의 용법은 정보 차단을 위한 간접 조명인 셈이다. 극 중 인물들은 이러한 세계의 운동방식에 이미 익숙하다는 듯 창밖을 내다보거나 창을 여는 법이 없다. 이처럼 영화가 구현한 실내의 장악력과 그것에 순응하는 인물들의 군상은 1940년대 일본 사회의 초상이기도 하다.


<스파이의 아내>는 바깥 세계와 조우를 철저히 봉쇄하는 목적으로 창문을 사용하지만 단 한번 예외가 있다. 사토코가 여관에 칩거하는 후미오를 만날 때다. 사토코는 여관에 들어서기 전 2층을 올려 본다. 다음 숏에서 카메라는 객실 창가에 밭게 몸을 붙여 앉은 후미오를 비춘다. 이때 후미오와 사토코는 창문을 사이에 두고 눈이 마주친다. 그렇다, 사토코의 시선은 지금 창문을 관통하고 있다. 여관의 창문은 상기한 창들과 달리 투명해 사토코가 유리 너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지금껏 고베시 안에서만, 그것도 좁은 실내에 주로 기거하던 주인공은 관동군 만행의 목격자를 조우하고 참상의 기록물을 전달받을 예정이다. 사토코는 이제까지 그의 눈을 가리던 창문을 과감히 뚫고 여관 안에 숨겨져 있는 외부세계의 단서를 응시한 채 발걸음을 옮긴다. 시대의 중력은 언제나 알게 모르게 개인을 역사의 핵으로 끌어당긴다.


여관 신을 기점으로 사토코는 위험천만한 파노라마의 진주인공으로 거듭난다. 후미오의 역할이 외부세계의 비밀을 손에 넣어 영화 디제시스로 안전하게 반입하는 것이라면 반대로 사토코는 해당 비밀을 외부세계에 널리 알리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바깥에서 안으로, 안에서 바깥으로,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두 인물의 시선이 교차하는 찰나에 영화는 창문의 불투명을 해제한다. 잠시나마 투명해진 창문처럼 영화는 짧은 시간 동안 외부세계와 내부세계의 정보 교류를 묵인한다. 사토코와 후미오의 여관 재회는 내부세계와 외부세계가 잇닿는 순간이며 비밀 문건이 영화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과정의 첫 단계다. 절제된 양식과 한정된 구획 안에서 모든 정보를 만들어 주고받던 <스파이의 아내>는 이처럼 단 한순간 통제력의 예외를 두어 주인공들의 계책을 조용히 돕는다. 이후 사토코는 살짝 상기되어 여관을 빠져나오는데 카메라는 그의 정면을 딥 포커스로 담는다. 후경의 크기에 비해 한참 작은 체구를 지닌 사토코가 힘을 주어 걸음을 내딛는다. <스파이의 아내>는 평범한 제국 구성원에서 인도주의적 스파이로 이행하는 작은 영웅을 또렷한 초점으로 응원한다.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출연: 아오이 유우, 다카하시 잇세이, 히가시데 마사히로

쿠키: 없음

수상: 제77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 키네마 준보 일본 영화-베스트 10 1위

이용가능플랫폼: 유튜브, 웨이브, 네이버 시리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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