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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구 Mar 18. 2024

봄이 되면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잘 팔면 영업 덕, 못 팔면 마케팅 탓


추운 걸 못 견뎌서 겨울이 유독 힘들다. 활동성이 현저히 떨어지고 기분도 대체로 다운되어 있다. 해도 짧아서 아침마다 일어나는 것도 고역이다. 이번 겨울도 어김없이 힘들었기에 봄이 되기만을 기다려왔다. 그런데 이상하다. 봄이 되었는데 왜 나는 아직도 한겨울일까? 바깥 온도는 올라가고 옷의 두께는 한 꺼풀 얇아졌는데 마음의 문은 여전히 이중창이다.





회사 다니면 늘 좋은 일만 있을 수 없지만, 내가 하는 일에 회의가 드는 순간이 특히 괴롭다. 최근 몇 가지 사건들에 의해 내가 베푼 호의나 열정들이 무시되고 폄하되는 일들을 겪었었다.


첫 번째로, 영업팀에서 목업 샘플을 요청했는데 마음에 안 든다고 피드백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우리 회사는 목업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팀이 없어서 R&R이 명확하지 않은데, 그동안은 영업에서 직접 하다가 좀 고난도의 제품이라서 할 수 없이 우리 팀에 도움 요청을 하셨다. 하지만 우리 팀도 대단한 노하우나 설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노동력이 몇 명 더 추가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처음엔 본인이 다 하겠다고 하시고서, 나중엔 우리 팀에게 다 만들어오라는 식으로 떠넘기고 결국 그 결과물에 대해 마음에 안 든다고 다소 무례하게 말씀하셔서 매우 속상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것도 영업팀에서 요청한 전용 상품을 하다가 품질팀에 욕먹은 사건이 있었다. 나는 늘 품질이나 생산 등 부서들이 현장에서 제일 고생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업무 요청을 할 때 늘 그들의 입장에서 최대한 맞춰주는 편이다. 그런데 영업에서 요청한 전용 상품을 담당자로 진행하다가, 영업 담당자 실수로 중량을 오인하여 진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진행했던 업무를 싹 다 다시 해야 되는 일이 발생했다. 나 또한 전용 상품이기 때문에 내가 기획한 게 아니라서 영업에서 전달한 내용으로만 업무를 해야 되는 상황인데, 품질팀에서는 그 상황을 몰랐던 건지 아니면 내가 만만해서인지는 몰라도 나한테 그 부분에 대해서 항의하고 약간의 막말도 했다. 그 일로 나도 충격이 컸지만 어떻게든 업무를 지체시키지 않고 최대한 제품이 빨리 나오게 하려고 노력하는데, 앞서 중량을 잘못 알려준 영업 담당자가 제품 출시 일정을 더 당겨달라고 푸시를 했다. 애초 중량 오인 때문에 기간이 늘어난 것도 있고, 내 쪽에서는 단 하루도 지체된 것이 없었고, 나머지는 정말 물리적으로 걸릴 수밖에 없는 시간이라 설명드렸는데 내 말을 끊고 끝까지 파이팅 하라는 (처지지 말라는) 소리를 하셨다. 마치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기간이 지체된 것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세 번째로 오늘 있었던 일인데, 슈퍼마켓 영업을 하는 영업팀에 매출 도움이 되라고 외부 상품을 소싱했는데, 해당 제품을 이미 취급하는 곳이 많아서 영업이 잘 안 되는 상황이란 것을 알았다. 우리 팀의 판단 착오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상품의 재고가 많이 쌓였고 악성재고 때문에 영업팀이 스트레스받는 것은 이해하나, 나한테 업무 관련 전화를 하다가 이 상품을 소싱한 것에 대해 이런저런 안 좋은 소리를 하셨다. 맞는 말이었지만 그 팀을 위해 아주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 가지 실수로 인해 이런 얘기를 듣는 게 썩 유쾌하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다 영업팀과 관련된 내용이긴 한데, 사실 마케팅(특히 BM)과 영업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 같다. '잘 팔면 영업 덕, 못 팔면 마케팅 탓'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듯이 영업은 매출을 위해서 마케팅이 늘 뭔가를 더 해주길 바라고, 그것들이 본인들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면 많이 실망하는 것 같다.


저 위의 사례들 다 각각의 영업 담당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모두 차부장급의 관리자급이고 나와 우리 팀 동료들은 거의 사원~대리급의 주니어가 많기 때문에 저런 갈등 상황 속에서 일방적으로 공격받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영업팀에서 아쉬운 부분은 가감 없이 다 얘기하시지만, 정작 우리 팀에서 서운한 부분은 얘기할 수 없는 구조라는 것.


결국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다 보니, 내가 하는 일 자체에 대해서 근본적인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상품기획으로서 시장조사하고 기획하는 업무보다, 영업팀에 휘둘리며 생산, 품질 눈치 보는 게 내 업무의 대부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사실 지난 1년간 이와 비슷한, 또는 더 서운한 일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그때는 그 분노를 오히려 동력 삼아 어떻게 하면 우리 팀이 더 편하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을지 고민했었다. 그러나 이번엔 좀 다르다. 아무래도 일련의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나를 덮치면서 회복 기능이 작동하지 못한 것 같다. 집에 오면 편히 쉬기보다는 계속 그날의 안 좋았던 일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되기까지 걱정을 하며 잠을 설친다.


"내일은 데이터가 넘어가야 할 텐데..."

"자재팀한테 빨리 발주해 달라고 말해야 되는데..."


하루하루 업무에 대한 설렘과 열정으로 가득하던 내 회사생활이 언제 이렇게 회색빛이 된 걸까? 원래 직장인이 다 그런 걸까? 추워서 그런 걸까? 그러면 꽃이 피면 좀 나아질까? 이 지독하게 긴 노잼시기를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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