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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구 Oct 13. 2024

히로인 경화 01

나이 오십, 이경화

*소설입니다.





따르릉,  5시 반에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자 경화가 서둘러 일어났다. 알람이 두 번 이상 울리기 전에 꺼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침잠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하루종일 남편의 면박을 들어야 할 것이었다.


경화의 남편인 한준은 유명 대학의 자연과학대 교수였다. 그중에서도 신생학문인 초능인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연구성과를 여럿 냈다. 그러나 그가 교수로서 저명해질수록 그는 더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졌다. 매일 거르지 않고 챙겨 먹는 아침에도 잔소리가 더 늘었다. 어제는 일주일째 반찬이 똑같다고 해서 오늘은 새로운 반찬을 세 가지 더 만들어야 했다. 슬슬 밥 냄새가 나자 막 일어난 한준이 뭐 트집 잡을 거 없나 인상을 찌푸리고 부엌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래도 까탈스러운 인간이 남편 하나뿐이면 다행일 거다. 옆방에는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딸 지연이 잠들어 있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지금 깨우면 엄청난 짜증이 되돌아올 게 뻔했다. 이왕 아침 먹을 거 남편 먹을 때 같이 나와서 먹으면 좋으련만, 1교시 수업이 있지 않으면 도통 눈을 뜰 생각을 안 했다. 두 번이나 아침상을 차리고 다시 무를 생각에 경화의 눈 밑이 퀭했다.


피곤한 얼굴로 식탁에 앉는 경화에게, 한준이 고압적으로 물었다.


"당신, 나 골프웨어 사이즈 교환하라는 거 했어?"

"아, 맞다. 오늘 할게요."


그렇게 남편한테 거슬리지 않으려고 애썼건만, 중요한 부탁을 또 까먹고 말았다. 단박에 한준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아니! 내가 오늘 학과장님이랑 골프 간다고 했어, 안 했어? 바깥일도 안 하고 집에서 노는 주제에 이런 일 하나 제대로 안 해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아찔해져선 경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한준은 화가 나면 종종 이렇게 본인을 깎아내리곤 했다. 전업주부가 경제활동을 안 하는 건 맞지만 집에서 노는 건 아닌데. 억울함이 차올랐지만 제 잘못도 있고 아침부터 남편과 큰 소릴 내기 싫었다.


"... 알았어. 다음엔 더 잘 챙길게요. 미안해요. 이번만 옛날 옷 입고 가요. 응?"


할 수 없이 경화가 이번에도 한 수 접고 들어간다. 어쩔 수 없이 돈 못 버는 게 죄인이었다. 경화의 빠른 사과에 한준이 누그러져선 눈에 힘을 살짝 풀었다.


"앞으로 잘 좀... 어? 다른 교수들 와이프 좀 보란 말이야. 어디 지 남편 이렇게 대우하나."

"네. 미안해요."

"초능인이면 뭐 하나. 별 돈도 안 되는 쓸모없는 주제에... 쯧..."


하지만 한 번 빈정이 상해버린 한준은 기어이 경화에게 상처를 주고 나서야 분을 풀었다. 늘 있는 일이지만 서러움에 경화가 말없이 찬물만 삼켰다.












올해로 딱 오십된 이경화는 세계 표준에 따라 초능인으로 분류된 텔레파시스트였다. 다만 한준이 늘 그녀를 무시하는 것처럼, 그녀의 초능력은 매우 제한적이고 미약한 수준이었다.


우선 텔레파시는 발신자와 수신자가 모두 초능인이어야만 발동하는 능력이었다. 가끔 능력이 뛰어난 텔레파시스트들은 비초능인들의 전기적 신호도 읽을 수 있다지만 매우 어렵고 극히 드문 케이스였다. 게다가 경화의 능력은 많이 쓰지 않아 쇠퇴한 상태였다. 초능력도 신체적 능력 중 하나라서 꾸준히 갈고닦고 계속 써야만 능력이 유지되는 것인데, 경화는 초능력을 살려 일을 하지도 않고 따로 교육을 받는 것도 없어서 점점 그 능력이 쇠퇴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장 최근 초능력 검사를 했을 때는 F등급이 나왔다. F등급은 거의 초능력을 쓸 수 없는 상태라는 것으로 가장 낮은 등급이었다. 검사에서 수신자에게 텔레파시를 쏴서 빨간 사과를 전달하라고 했는데, 수신자가 받았다는 정보는 아무것도 칠해져 있지 않은 그냥 텅 빈 원이었다. 이제 그녀의 텔레파시로는 간단한 사물 하나도 제대로 전달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한준은 얼마 전 유명 방송의 강연 프로그램에 초청받았다. 안 그래도 청중 앞에서 몇 시간 동안 서서 강연을 한다는 것이 체력을 소모하는 일인데, 방송에 나오는 것이다 보니 배로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진 빠진 상태로 직접 운전하는 것도, 대리 부르는 것도 싫다는 남편 때문에 경화도 꼼짝없이 매니저 신세로 끌려 왔다.


강연장에는 초능인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증명하듯 수많은 청중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그 중에선 어린 자녀를 둔 30대 부모들이 많이 보였다. 일부 초능인들이 뛰어난 능력으로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사례들이 널리 알려지자, 이제 영재교육을 넘어 초능인 교육으로 부모들이 눈을 돌린 것이었다.


“제 아들이 이제 6살인데, 초능인인 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왕이면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초능인 전문 교육을 받게 하고 싶어서요.”


질의응답 시간에 청중 하나가 마이크를 들었다. 기다린 질문이었다는 듯 한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우선 이 자리에 오신 많은 어머님, 아버님들께는 죄송한 얘기지만 초능력은 천부적인 능력입니다. 그러니 초능인이 아닌 자녀가 초능인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초능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리고 쓸 수 있는 초능력의 강도 또한 선천적으로 정해지는 것입니다. 초능인 교육이라는 것은 초능인들이 자신의 능력을 잘 알고 적재적소에 잘 사용하게 하는 것이지 정해진 능력을 기르는 것엔 큰 효과가 없습니다.”


그의 대답에 이번엔 기자 하나가 번쩍 손을 들었다.


“그런데 초능인들에겐 초능력 등급이 있지 않습니까? 능력을 기를 수 없다면 왜 등급이 변하는 것인가요?”

“초능력 등급은 얼마나 초능력을 잘 사용할 수 있는가를 검사해서 수치화한 것이지, 초능력이 얼마나 강력한 지를 측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 힘의 정도는 아직까지 제대로 측정할 수 있는 기술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초능인 교육을 통해 정해진 초능력을 최대한 잘 활용하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F등급이 나왔다고 해도 그것이 초능력이 절대적으로 약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뒤이어 앞줄의 남자도 질문했다.


“그러면 보통 본인이 초능인임을 알게 되는 시기는 언제일까요?”

“보통 2차 성징을 시작하는 초~중학교 때에 초능력도 같이 발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이것도 언제까지나 평균치인 지라 딱 그렇다고 단정할 순 없겠죠. 당연히 초능력의 종류나 개개인의 특성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말해야겠네요.”


2차 성징 전후로 보통 초능력이 발견된다는 한준의 말에 일부 청중들이 술렁였다. 우리 애는 벌써 고1인데... 초능인이길 내심 바랬던 자녀들이 벌써 그 시기를 지났다는 것에 상심하는 듯했다. 반면 아이가 아직 어린 부모들은 희망이 있는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경화는 지연을 떠올렸다. 지연은 이제 스무 살이었다. 초능력은 보통 유전이었고 경화도, 경화의 어머니인 숙자도 초능력이 있었지만 지연은 지금까지 초능력 검사에서 초능력이 발견되지 않았다. 아무리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지만 스무 살 이후에 초능력이 나온다는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지연은 비초능인인 게 틀림없었다. 매사에 자신만만한 남편의 비초능인 유전자가 여기서도 경화의 유전자를 이겨 먹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일까. 지연이 경화처럼 초능인이 아니고, 지 아빠와 같은 비초능인이라 그런 것일까. 지연은 경화와 기름과 물처럼 늘 맞지 않고 섞이지 못하고 계속 겉돌았다. 원래 스무 살쯤 되면 키우기 쉬워지는 거 아니었나. 애가 크면 클수록 더 안 맞고 엇나가는 것은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 지 알 수 없었다.







주머니 속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경화가 서둘러 강연장을 벗어났다. 전화를 받자마자 지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경화를 덮쳤다.


“엄마! 내가 오늘까지 20만 원 보내달라고 했잖아! 왜 아직도 안 보냈어? 이번에 워크샵 가는 거 돈 내야 된다니까?”

“아, 그래? 근데 무슨 워크샵이 20만원이나 하니?”

“아니, 몇 번 말해! 교수님이랑 다 참석하는 무지 중요한 행사라고. 나 거기 안 가면 완전 과에서 아싸 되는 거 몰라? 아 지금 빨리 보내 줘. 선배들이 나만 안 냈다고 난리야.”

“아. 그래. 미안. 근데 그렇게 급한 거면 미리 말하지 그랬어. 엄마 지금 아빠 따라와서 밖인데...”

“내가 어제 말했잖아! 엄마는 아빠가 한 말만 기억해? 진짜 왜 이렇게 내 말을 안 들어? 나 무시해?”


아침엔 한준이 경화를 찌르더니 이번엔 지연이 경화의 가슴을 푹 찌른다. 듣기 싫은 말만 골라서 하는 게 부녀가 똑같다. 경화도 순간적으로 울컥 쌓여왔던 분노가 치밀었다. 그래선 안 됐는데 지연에게 울분을 쏟아냈다.


“뭐? 무시? 너야말로 엄마를 무시하는 거 아냐? 아빠한텐 무서워서 고분고분한 게... 엄마가 까먹을 수도 있지. 너 매번 엄마한테 버릇이 그게 뭐야? 명령하는 것도 아니고... 엄마가 니 ATM이야? 돈 달라면 바로 갖다 바쳐야 하니? 딸이 되어선 상냥하게 엄마한테 부탁할 수 있는 거 아냐?”


얼굴이 벌게져서 강연장 앞에서 소리를 지르다가 지나가는 행인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핀이 빠졌던 경화의 정신이 돌아왔다. 후회가 막심했다. 자신도 모르게 한준에게 받은 스트레스까지 애꿎은 지연에게 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자충수였다. 덕분에 지연의 짜증은 배가 되어 돌아왔다.


“하... 엄마가 이러니까 내가 엄마랑 말이 안 통한다는 거야. 난 엄마의 잘못을 지적했는데 엄마는 내 태도나 물고 늘어지고... 됐다. 그냥 이딴 걸로 트집 잡으면서까지 보내기 싫으면 보내지 마. 내가 워크샵 못 가서 혼자만 소외되고 과 생활 망쳐도 상관없다는 거니까.”


뚝. 지연이 제 할 말만을 던지고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다시 전화를 하려던 경화가 관두고 한숨을 푹 깊게 내쉬었다. 이미 지연과 본인의 대화는 누가 더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지 겨루는 경기처럼 변질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경화는 자신과는 말이 안 통한다는 지연의 말이 계속 생각났다. 그건 사실 경화도 마찬가지였다. 경화는 지연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한때는 자신의 일부 같던 딸이 지금은 너무 어려웠다. 지연이 어떤 생각을 하는 지 도통 알기 어려웠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정작 딸 하나의 마음도 제대로 못 읽는 제까짓게 텔레파시를 쓰는 초능인이라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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