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의 변화
결국 경화에게 돈을 받아 워크샵에 왔지만, 지연의 맘이 내내 편할 리가 없었다. 홧김에 엄마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쏟아낸 후, 당일까지도 화해하지 못하고 서먹하게 집을 나섰으니 말이다. 그 와중에 엄마가 넣어둔 듯한 가방 안에 비타민을 보니 죄책감이 밀려왔다.
모두가 저녁 준비를 한다고 떠들썩하던 와중이었다. 지연은 속이 울렁거려 숙소 밖의 벤치에 나와 홀로 앉아있었다. 심란한 지연 옆으로 과대 수형이 다가왔다.
“입맛 없어? 아까부터 죽상이네.”
아, 조금 생각이 많아서. 지연이 옆으로 물러나 수형에게 자리를 터줬다. 수형은 얼굴도 훈훈하고 모두에게 친절해서 과 내에서 인기가 좋았다. 지연 또한 그런 수형을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그동안은 늘 수형이 사람들 사이에 있었기에 단둘이 얘기할 기회가 없었다. 지연과 수형 둘 다 이런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 대화를 이어갔다.
“그나저나 나 너네 아버지 강연 들었어. 그 유명한 교수님 맞지? 방송에도 나오는… 김한준 교수님이었나.”
“어... 맞아. 너도 초능인에 관심이 있어?”
“응. 난 아니지만 주변에 친한 초능인들이 많거든. 아, 너희 어머니도 초능인이시라고 하던데.”
지연은 경화의 이야기가 나오자 또 우울한 표정이 됐다. 그 통화 이후 5분도 안 돼서 지연에게 입금된 20만 원. 인터넷 뱅킹 어려워하던 경화가 자기의 말 때문에 불편한 구두를 신고 ATM기까지 뛰어갔을 생각을 하니 답답했다.
“응, 맞아. 텔레파시스트야. 지금은 거의 초능력을 잘 못쓰지만.”
“그래도 대단해.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다는 게.”
그렇겠지. 지연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어쨌든 텔레파시스트가 대단한 건 알지만, 지금은 수형 앞에서 그렇게 엄마를 추켜세우고 싶진 않았다. 아직 냉전 중인 엄마에게 나름 소심한 복수였다. 매번 자신을 화나게 했다가, 또 슬프게 만드는 엄마가 고마우면서 미웠다.
오늘은 경화가 모처럼 자유로운 날이었다. 지연도 워크샵에 갔는데, 한준도 동료 교수들과 컨퍼런스에 참가한다고 했다. 사실은 그렇다고 해도 한준의 성격상 아침부터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심부름을 잔뜩 시켰을 텐데 그러지 않는 덴 이유가 있었다. 냉혈한 한준마저도 오늘이 무슨 날인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경화는 홀로 버스에 올라탔다. 한준은 숙자의 기일에 매번 찾아뵙는 사위는 못 되어도, 적어도 그날만큼은 아내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자신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올해로 경화의 엄마인 숙자가 죽은 것이 벌써 10년이었다.
무료하게 차창 밖을 바라보는 경화 눈에 허무함이 비쳤다. 숙자의 죽음으로 경화는 초능인으로서의 방향성을 잃었다. 숙자는 경화처럼 텔레파시스트였고, 꽤 강력했지만, 그 능력을 너무 과도하게 사용한 탓에 죽고 말았다.
그로 인해 경화에겐 트라우마가 생겼다. 그녀가 텔레파시를 쓰려할 때마다, 초능인은 자신의 능력을 제어하지 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경고가 어른거렸다. 한 순간에 얼굴이 회색빛이 돼서 죽어버린 숙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축복이고 혜택인 줄 알았던 초능력은 알고 보니 저주였고 족쇄였다. 경화는 뛰어난 초능인으로 사는 것을 포기했다. 그녀는 텔레파시스트로 근무하던 직장도 그만두고, 한준의 내조와 지연의 육아에 전념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경화는 이제 단순한 사과 그림 하나도 못 그릴 정도로 무능한 초능인이 되어 있었다.
“엄마, 나 왔어.”
경화가 숙자의 액자 앞에 섰다. 생전 텔레파시스트로서 공헌한 숙자에게 각종 기관에서 내린 상장들이 같이 놓여 있었다.
“엄마, 저번에 초능력 검사받았는데 있지. 나 F등급이 나왔어. 이제 초능인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야. 명색이 심숙자 딸인데 창피하지?”
경화의 이런 넋두리에 숙자가 살아있었다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야속하게도 웃고 있는 숙자의 얼굴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난 진짜 뭐든 잘하고 싶었거든. 근데 난 둘 다 아니야. 엄마처럼 멋있는 초능인도 못 됐고, 애엄마로서도 늘 실수해. 지연이가 초능력이 없는 것도 아마 날 보고 그런 건가 봐. 텔레파시 같은 거 있어봤자 쓸모없다는 거 지도 알아버린 거지.”
“......”
“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해? 응? 엄마.”
경화가 조용히 흐느꼈다. 숙자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었지만, 경화의 까만 속을 털어놓을 사람은 유일하게도 그런 숙자뿐이었다.
3박 4일 워크샵이 끝나고 드디어 지연이 돌아오는 날이었다. 지연이 그랬듯 경화도 떠나기 전 지연에게 화를 냈던 일이 내심 가시처럼 목에 걸려 있었다. 돌아오면 먹고 싶다는 음식이라도 해줘야지. 미운 자식이라도 오랜만에 본다니 묘하게 들떠 경화가 들썩댔다.
그러나 감동적인 재회를 기대했던 것도 잠시, 처음 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은 경화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어머님, 안녕하세요. 지연이랑 같은 과에서 과대표 맡고 있는 김수형이라고 합니다... 다름 아니라 지연이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서 응급실로 실려갔거든요...”
경화에겐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다. 경화는 숙자의 죽음 과정을 모두 지켜봤다. 지연에게 그런 트라우마를 주기 싫어서, 초능력도 쓰지 않고 살던 본인이었는데. 정작 제 딸인 지연이 그렇게 죽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경화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경화가 서둘러 옷을 챙겼다. 맥박이 너무 뛰어 도저히 침착한 행동이 불가능했다. 어렵게 길의 택시를 멈춰 세운 경화가 벌벌 떨며 병원 이름을 말했다. 한준에게도 바로 전화를 했다. 정신이 없어서 뭐라고 말했는 지도 기억나지 않았고, 그저 한준도 일이 끝나는 대로 바로 병원으로 가겠다고 한 대답만 기억났다.
“우리 지연이는요? 김지연이요... 어딨어요? 우리 지연이...”
드넓은 응급실에서도 경화는 곧바로 지연의 베드를 찾아냈다. 아마도 경화에게 전화를 한 장본인으로 보이는 학생 하나와 교수처럼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같이 서 있었다. 정작 있어야 할 환자용 베드는 비어 있었다. 흥분한 경화에게 교수가 상황 설명을 했다.
“다행히 의식은 찾았고... 다만 열나고 두통이 있어서 검사를 몇 개 좀 받으러 갔습니다. 괜찮을 겁니다. 스트레스 때문에 심하게 체한 걸 수도 있고...”
교수의 말에 경화가 힘이 풀려 침대 모서리를 붙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지연은 파리하게 시들어 있었다. 의사는 지연의 열을 떨어뜨려야 한다며, 지연을 병실로 옮기고 해열제를 처방했다. 지연은 경화를 보고도 대꾸할 힘도 없는 듯 침대에 누웠다.
밤이 되자 교수와 과대는 돌아가고, 한준이 왔다. 지연은 수액을 맞으며 계속 땀을 흘렸다. 경화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연의 이마에 맺힌 땀을 수건으로 찍어냈다. 다행히 의식은 찾았다지만 이 원인 모를 열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었다. 경화의 심장은 오늘 하루만 스무 번 넘게 죽다 살아났다.
“당신도 좀 자. 의사가 해열제 처방해 줬으니까 괜찮아지겠지. 지연이 아직 젊고 건강하니까 괜찮을 거야.”
불편한 낯빛으로 병실 안에 서 있던 한준이 보다 못해 경화에게 말했다. 나름 경화를 걱정해서 한 말인데, 경화가 눈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한준을 노려봤다. 평소 순하던 경화답지 않게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만약 안 괜찮아지면? 그럼 어떡해? 애가 이유도 없이 이렇게 열이 난다는데... 당신은 남일처럼 태평하지? 사실은 내일 출근 걱정을 더 하고 있는 거지? 난 그냥 차라리 내가 대신 죽고 싶은 심정인데.”
“뭐? 당신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애 아빠야. 난 당신도 이러다 병날까 봐 걱정돼서 한 말인데... 말하는 꼬락서니가 진짜 참...!”
가뜩이나 자기도 맘이 불편한데 경화가 저렇게 대드니 순간 끓어올랐다. 하지만 아픈 애 앞에 두고 부모가 싸우는 건 할 짓이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눈에 핏줄이 터져 빨갛게 자신을 노려보는 경화를 보니 조금 당황한 것도 있었다. 얼굴도 알려진 본인이 병원에서 큰 소리 내봐야 사람들이 욕할 빌미만 주는 꼴이려니 생각해야지. 뭐라 한 마디 얹으려던 한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병실을 나갔다.
탁. 한준이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에도 경화는 울먹거리며 다시 지연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도저히 사람 이마라곤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뜨겁게 끓고 있었다.
지연이 이상하리만큼 개운한 느낌에 눈을 뜬 건 그날 새벽이었다. 몸은 가벼운데 천장은 매끈하고 매트리스가 이상하게 낯설었다. 창문 밖으로는 갓 동이 터서 파란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눈을 돌리니 경화가 보호자 침대에서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그제야 지연은 본인이 병실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간신히 기억해 냈다.
워크샵에서 오는 길에, 갑자기 불가항력적인 두통이 본인을 덮쳤다. 버스에서 내리는 동시에 길바닥에 고꾸라졌다. 모두가 제 이름을 부르며 달려든 것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그 이후론 필름이 끊긴 듯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다만, 개인병실까지 얻어 누워 있던 걸 보니 꽤 심각하게 아프긴 했던 모양이었다.
‘안 돼, 엄마! 정신 차려봐!’
그러다 순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병실을 둘러보던 지연이 알 수 없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가 TV를 틀어놓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생한 말소리가 귀에 꽂혔다. 하지만 병실엔 엄마와 지연 단 둘 뿐이었고, 옆 병실에서 튼다고 하기엔 음질이 너무 뚜렷하고 정확했다.
‘엄마!!!’
알 수 없는 비명소리가 또 한 번 지연에게 들렸다. 뭐야? 이 새벽에? 결국 소리의 정체를 찾으려던 지연이 수액줄을 빼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밖인가? 조심스럽게 복도로 나가려던 지연이 발걸음을 멈췄다. 이번엔 소리뿐만이 아닌 영상이 훤하게 눈앞에서 재생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상을 본 지연이 놀라서 자고 있는 경화를 돌아봤다.
“... 엄마? 할머니?”
지연은 그제야 경화가 미간을 찌푸리고 힘겹게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한 번 나타난 영상은 계속해서 지연의 눈앞에 펼쳐졌다. 기력을 다 쓴 숙자가 도로 한 복판에서 쓰러져 있고, 경화가 그 옆에서 서럽게 오열하고 있었다. 영상은 급속도로 회색빛으로 굳어 가는 숙자를 재생했다. 그리고 자고 있는 경화의 눈에는 마른 눈물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지금... 엄마 할머니 꿈꾸는구나...”
지연은 경화의 누운 몸 옆에 웅크렸다. 모든 게 명확해졌다. 지연은 바로 경화의 꿈을 보고 들은 것이었다.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엄마가 잠시 안쓰러웠던 것도 잠시, 지연은 놀라움에 탄성이 터지려는 제 입을 꼭 틀어막았다. 근데 그러면...
“나도 발현된 거네? 초능력... 텔레파시!”
모두가 잠든 새벽이라 참으려 하는데도, 틀어막은 손 사이로도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맞았다. 초능인 엄마와 초능력 교수인 아빠 사이에서 귀가 닳도록 들어서 모를 수가 없었다. 영문 모를 고열은 바로 그 징조였다. 지연도 드디어 초능인이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