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좀 내버려 둬
지연의 초능력이 뒤늦게 발현했다는 소식에 제일 신이 난 것은 지연도, 경화도 아닌 다름 아닌 한준이었다.
20살이 넘어서 뒤늦게 초능력이 생겼다는 특이케이스에 여러 신문사에서 취재 요청이 쇄도했다. 처음엔 신이 났던 지연도 과도한 관심에 점점 부담스러워하는데, 한준만이 눈을 반짝거리며 반응했다.
“아, 우리 딸아이 말이죠? 다큐멘터리는 조금... 촬영 시간이 길어서... 애가 대학생인데... 조금 수줍음이 많아요.”
쏟아지는 전화를 받으러 나간 한준이 금방 격양된 얼굴로 들어왔다. 지연의 방문에 기대서선 지연의 의사도 묻지 않고 통보하듯 말했다.
“너 금요일에 수업 몇 개라고 했지? 언제 끝나? 아빠랑 작은 신문 인터뷰 하나 하러 가면 좋겠다.”
“뭐? 무슨 인터뷰. 나 그런 거 싫다니까.”
“무슨 소리야! 너 초능인으로서 유명해지는 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 지 몰라? 아마 나중에 기업들에서 너 모셔가려고 할 거다. 그것도 아빠가 유명하니까 이런 요청이라도 들어오지...”
아, 싫은데... 지연의 짜증에도 한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유명세를 중요하게 여기는 한준은 하늘이 주신 기회를 굳이 걷어차려는 지연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디 보자. 너희 학교에서 신문사까지 한 시간 걸리니까... 아빠가 수업 끝나고 너네 학교로 가면 되겠다.”
“뭐? 아빠가? 됐어. 안 그래도 쪽팔린데 학교에 동네방네 광고할 일 있어?”
“뭐가 쪽팔려? 능력 좋은 교수 딸에, 초능인까지 됐는데 자랑하진 못할망정... 이해가 안 되네. 정말 분에 넘치는 투정을 하는구나.”
이 집에서 서열을 따지자면 경화가 맨 아래고, 한준이 맨 위다. 경화에겐 허구한 날 짜증 내는 지연이라도 한준에겐 그럴 수 없었다. 방금도 지연이 조금 짜증을 내자마자, 한준의 표정이 일순간 무섭게 굳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지연은 한준이 조금 무서웠다. 결국 통보하고 가버린 한준에게 더 반항하진 못하고, 지연은 입술만 삐죽 내밀었다.
“너 요즘 유명하더라?”
혼자 강의실로 걸어가는 지연 앞에 수형이 불쑥 나타났다. 놀란 지연이 금세 웃음을 지었다. 내내 여기저기 시달리느라 진이 빠져 있었는데 그나마 수형을 보자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미치겠어. 우리 아빠 완전 관종인가 봐. 자기만 유명해지면 되지. 왜 자꾸 나를 끼는지...”
“힘들겠네. 내가 보기엔 넌 조용한 성격이라 그런 거 싫어하는 것 같은데...”
“맞아. 근데 아빠 딸로 태어난 이상 조용히 살기엔 이미 틀린 것 같아.”
지연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수형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가? 너네 아빠 딸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네가 특별해서 그런 거 아냐? 20살 넘어서 뒤늦게 초능인이 된 것. 너만 가지고 있는 특별함이잖아.”
특별함. 미디어에서 그렇게 특이케이스라고 불러줄 땐 지겹기만 했는데, 수형의 입에서 들은 말은 꽤 심금을 울렸다. 지연이 수줍게 웃었다.
둘은 곧 같이 강의실에 도착했다. 수형은 자연스럽게 지연 옆에 앉았고, 뒤에 앉아있던 동기 무리들이 둘을 보고 수군댔다. 과대표인 수형 때문인지, 초능인인 본인 때문인지 노골적으로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들에 지연이 불편한 듯 고개를 떨궜다.
“텔레파시스트면 이런 수업 안 들어도 되는 거 아닌가? 엄마, 할머니 다 초능인에 아빠는 교수고... 취업 완전 하이패스 아냐?”
“모르지. 초능인도 F등급은 거의 초능력 못 쓴다던데... 이름만 초능인이고 실제론 별 거 없을지도 몰라.”
“어쨌든 우리보단 취업도 유리하고 먹고살기 편할 텐데... 굳이 비초능인들 자리 뺏어야 되나? 다른 초능인들은 거의 대학도 안 다니던데... 쟤는 뒤늦게 초능인이 돼서 그런가.”
거리는 좀 있어도 한 마디 한 마디가 지연에겐 또렷이 들렸다. 텔레파시스트라서 더 그런 걸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가시방석으로 4년이나 학교를 다닐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애써 못 들은 척 지연이 책에 눈을 박는데, 옆자리에서 수형이 자릴 박차고 일어났다.
“조금 작게 얘기해 줄래? 목소리 너무 커서 다 들리거든.”
수형이 일어나서 뒷자리로 가기까지의 시간은 너무도 순식간이었다. 말릴 새도 없이 일이 벌어졌다. 지연의 귀가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그러지 말지. 수형의 마음은 알겠으나 안 그래도 사방에서 주목받는데 아마 더 큰 미움과 질투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어... 그래, 미안.”
그러나 지연의 험담을 하던 그들은 수형의 말에 바로 꼬리를 내렸다. 강의실은 태풍이 쓸고 간 듯 한바탕 고요해졌다.
“앞으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얘기하는 것 그만했으면 좋겠어. 안 그래도 과도한 관심에 힘들어하는 친군데 같은 과에서 먼저 그렇게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미안해. 수형아. 조심할게.”
“지연이한테도 사과해 줘.”
“어. 그래... 알겠어... 사과할게...”
결국 그 무리들은 죄다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진짜 지연에게 따로 사과할 마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수형 앞에서 그들은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부끄러워하는 눈치였다. 수형이 그들에게 한 마디하고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타이밍 좋게 교수님이 들어왔다. 지연은 여전히 본인을 힐끔거리고 있을 수십 개의 눈동자에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수형 덕에 대놓고 본인을 씹는 분위기가 잠깐이나마 사라지겠지 싶었다.
‘고마워.’
지연이 노트 끄트머리에 작게 적은 말을 수형에게 보여줬다. 수형은 미소로 화답했다.
지연이 학교에서, 또 사회에서 어떤 곤란을 겪는지 한준과 경화는 알 턱이 없었다. 한준은 알고 싶지 않았고, 경화는 알 방법이 없었다.
“나 왔어.”
지연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방으로 직행했다. 거실에서 경화가 깎아준 사과나 속 편히 집어먹던 한준이 괜히 한 마디 했다. 잘은 모르지만 저 심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게 아닐까 제발 저리던 차였다.
“김지연! 넌 아빠 얼굴도 안 보고 그냥 들어가냐?”
경화도 얼굴 한 번 안 비추고 그냥 방으로 들어가 버린 지연을 불렀다.
“지연아? 씻고 들어가! 밥은 먹었어? 얼른 씻고 나와서 밥 먹어야지.”
엄마, 아빠가 공세해도 지연은 묵묵부답이었다. 걱정이 된 경화가 일어나 지연의 방문을 돌려보지만 굳게 잠겨 있었다. 어머, 너 문을 잠갔어? 무슨 일 있니? 얘, 지연아!
불과 몇 주 전에 쓰러진 전적도 있는 애라 엄마 입장에선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경화가 놀라서 문을 두드리자 방 안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가! 무슨 일 없으니까 제발 그냥 나 좀 내버려 두라고!”
“알았어. 근데 씻고 밥은 먹어야지!”
“안 먹어! 그깟 밥 안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제발 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울분에 차서 엄마를 밀어내는 지연의 목소리에 경화는 살짝 기분이 상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한데 그냥 엄마한테 속 시원히 털어놓으면 좋으련만. 친구들한테는 미주알고주알 통화도 몇 시간씩 하더니 엄마한테는 할 말이 그렇게도 없는지... 그래도 다 큰 성인 딸과 마찰을 줄이려면 최대한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었다. 한 마디만 더 하고 싶어 입 안이 근질거렸지만, 경화가 지연의 방문 앞에서 그대로 돌아 나왔다. 그 모습을 본 한준이 혀만 끌끌 찼다.
“이제 다 컸다고... 부모 고마운지 모르고 싸가지가 없어. 싸가지가... 지네 아빠가 지 먹여 살리려고 얼마나 쎄빠지게 일하는지는 모르고...”
“냅둬요. 자기도 뭐 프라이버시가 있겠죠. 이제 성인인데...”
“무슨... 고작 스무 살 주제에... 이게 다 당신이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그런 거야. 알았어?”
한준은 늘 지연의 일탈도 결국은 경화의 탓이란다. 억울했지만 경화가 대꾸하기 싫어서 부엌으로 쟁반을 가지고 일어섰다. 그런 경화를 한준이 최대한 비꼬았다.
“웃기는 일이야. 모녀가 둘 다 텔레파시스트인데... 딸이 뭔 생각하는지... 뭐 하고 다니는지... 엄마란 인간이 제일 모른다는 게.”
못 들은 척 경화가 싱크대에 설거지 거리를 내려놓았다. 무덤덤한 척하려고 해도, 한준은 오래 산 세월만큼 경화를 너무 잘 알았다. 그래서 어떻게 그녀를 공격해야 하는 지도. 경화가 다시 굳게 닫힌 지연의 방문을 힐끔거렸다.
텔레파시스트는 상대가 발신하지 않은 정보를 무단으로 수신하면 안 된다는 조항이 있지만 유명무실했다. 컨디션 좋은 텔레파시스트들은 발신능력이 없는 비초능인들의 신호조차도 막 들린다는데... 들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들리는 건 어떡하겠는가. 사실상 개인의 양심에 달린 문제였다.
아마 지연은 자신에게 그 어떤 정보도 보내려 하지 않을 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엄마와 딸인데... 그냥 참고만 하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걱정돼서 그러는 건데...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 경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경화는 불 꺼진 방에 들어가서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거실에선 한준이 틀어놓은 시사프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 이건 그냥 잠깐 듣는 것뿐이야. 밀려오는 죄책감을 합리화한 경화가 조심스럽게 머리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사과 그림 하나 못 보내는 저질 발신 능력이었지만, 그래도 수신 능력은 발신 능력보단 쓸만한 편이었다. 지지직. 이윽고 TV소리인지 말소리인지 모를 뒤엉킨 노이즈가 어지럽게 경화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더욱더 경화가 눈을 질끈 감았다. 뭔가가 더 들리려고 하고 있었다. 어어. 조금만 집중하면 더 들릴 것 같았다.
‘아, 쟤가 그 유명한...’
‘이기적이야...’
‘초능인이면서 비초능인 자리만 뺏고...’
날선 문장들이 한 번 경화에게 들리자, 기다렸다는 듯 숱한 비난들도 뒤이어 경화 귓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확실히 명확하고 깔끔한 게 웅웅 거리는 TV소리는 아닌 게 틀림없었다. 소리들을 듣던 경화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졌다. 이게 지연의 머릿 속이라면, 이건 지연이 실제로 들은 말들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 어쩐지. 그제야 들어오자마자 밥도 안 먹고 침대에 바로 퍼져 버린 지연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학교에서 내내 그런 가시 같은 말에 찔려 왔는데, 밥이 목구멍으로 들어갈 리가 없었다. 원인을 안 이상 엄마로서 경화는 가만두고 볼 수 없었다. 거실에 나와 괜히 한준을 맴돌던 경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 당신 그 방송이니 뭐니 줄일 수 없어요? 애를 위해서라도...”
“뭐?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지연이... 갑자기 너무 관심이 많이 쏠리니까 힘든 것 같고... 그래서요.”
태평하게 누워있던 한준은 코웃음만 쳤다.
“방송 안 하면 돈은 누가 벌어? 패널 출연 한 번에 출연료가 얼만지나 알고 말해.”
“아예 하지 말란 게 아니라... 한참 민감할 땐데 조금 줄이라는 거죠.”
“아니, 갑자기 왜 난리야? 지연이 걔가 지 데리고 나가지 말라고 해서 한창 물 들어오는데도 나 혼자만 나가고 있고만. 이제 나도 나가지 말란 거야? 누가 그래? 지연이가 나가지 말래?”
경화는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혹시라도 지연이 들을까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였다. 아니, 내가 하도 걱정이 돼서... 생각을 좀 읽었는데... 들리는 게 죄다 비난이라... 멋모르는 애들이 뒤에서 욕하고 그런 것 같아서...
“뭐? 누가 김한준 딸을 욕해? 욕할 이유가 뭐가 있는데?”
“질투가 나서 그러는 거겠죠... 근데...”
루저 같은 새끼들. 그러나 분노한 한준은 경화가 말릴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나 지연의 방으로 향했다. 경화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곧이어 일어날 상황들은 뻔했다.
“지연아, 아빠. 잠깐 얘기 좀 하자. 문 좀 열어 봐.”
한준은 지연이 채 문을 열기도 전부터 잔뜩 훈수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한테 욕하는 애들 신경 쓰지 마라. 그런 애들 다 졸업하면 이름도 기억 못 할 루저들이야. 다들 너 질투해서 그러는 거야. 네가 뭐가 모자라서, 김한준 딸이 기가 죽냐? 어?”
지연의 방문에 틈이 벌어졌다. 그 사이로 신나게 떠드는 한준은 안중에도 없고, 지연이 원망스럽다는 듯 뒤에 있는 경화를 쏘아봤다. 경화가 미안한 표정으로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지연은 싸늘했다.
“...내 생각을 기어이 읽었나 봐? 제발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말했는데도...”
“......”
“진짜 극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