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지연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이상하게 개운하고 산뜻한 날. 늘 이른 알람 때문에 퀭한 얼굴로 일어나던 경화였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저절로 눈이 떠져 기지개를 한 번 피고 나니, 정신도 말똥하고 아픈 곳도 없었다. 시계를 보니, 마침 알람이 울리기 딱 10분 전이었다.
냉장고를 열고 경화가 눈을 꿈뻑였다. 문득 어제 장 봐 온 목살이 눈에 띄었다. 김치찌개를 하려고 사뒀던 것이지만 구워 먹어도 좋지 않을까. 분명 아침부터 더부룩하게 웬 고기냐고 한준이 면박을 주겠지만, 고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지연은 좋아할 것이다. 어제 지연을 속상하게 한 것이 내심 맘에 걸리기도 했기 때문에... 조금만 구워 먹지 뭐. 결심한 경화가 씩 웃으며 고기를 꺼냈다.
“당신, 내 하늘색 셔츠 다려놨어?”
“네. 그거 건조대에 걸어놨어요.”
국을 데우는 경화 뒤로 막 일어난 한준이 미간을 찌푸리고 다가왔다.
“아휴, 아침부터 또 뭔 고기를 구워? 냄새나게. 난 그냥 국에 밥만 줘.”
네, 알았어요. 건성으로 대답한 경화는 한준을 놔두고 먼저 지연의 방으로 향했다. 고기 냄새가 진동하는데도 일어나지 않는 게 꽤 깊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수업도 없는데 깨웠다고 싫어하겠지만, 고기가 식기 전에 깨워서 아침을 맛있게 먹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지연아! 일어나! 아침 먹자. 엄마가 고기 구웠어.”
대놓고 지연을 깨우는데도 웬일로 칭얼거리는 소리가 없었다. 깊이 잠들었나? 경화가 머리끝까지 덮인 이불을 살짝 걷어냈다. 어? 경화의 발이 그대로 굳었다. 그러고 보니 평소 같으면 미역처럼 길게 늘어져 있을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았다.
“당신, 뭐 해? 국이랑 밥 빨리 달라니까?”
경화의 당황스러움을 알 리 없는 한준은 그저 태평하게 국을 떠다 달라고 난리였다. 설마, 아닐 거다. 남은 이불을 한 번에 잡아 내렸다. 웅크린 지연이 자고 있었을 자리에는 베개들만 이중 삼중으로 쌓여 있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동시에 경화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있을 리가 없는 걸 알지만, 괜히 경화가 베개를 이리저리 들췄다. 당연히 지연은 감쪽같이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곧 경화의 시선이 닿은 곳은 지연의 책상이었다. 텅 빈 책상 위에 보란 듯이 펼치고 간 노트 한 장의 메모가 남아 있었다.
‘맘대로 딸 생각이나 훔쳐보는 엄마랑 같이 못 있겠어. 나한테 두 번 다시 텔레파시 쓰지 마.’
하, 경화가 탄식을 토했다. 정말 기가 차고 황당했다. 잊었던 두통이 다시 오는 느낌이었다.
이로써 지연이 집을 스스로 나간 건 확실해졌다. 아마 이른 아침부터 안 보이는 걸 보니 늦은 밤이나 새벽에 몰래 나갔을 것이다. 어떡하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일단 한준이 계속 재촉하니 방 밖으로 나와야 했다.
“뭐야? 지연이는? 걔 주려고 고기 구운 거 아니었어?”
그게... 경화가 잠시 망설였다. 한준에게 솔직하게 말해야 했다. 그래도 엄연히 아빠인데 이 중요한 사실을 알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쉽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지연이 집을 나간 이유가 경화 때문이라는데, 한준이 얼마나 또 난리를 필지 생각도 하기 싫었다.
“... 피곤한가 봐요. 안 일어나네요. 어제 좀 기분도 안 좋았고 해서...”
“뭐야... 굳이 애 먹인다고 구워놓고... 그냥 밥 먹고 다시 자라고 하지. 하여튼 애한테 꼼짝도 못 하고...”
한준은 지연에게 꼼짝 못 하고 물러터진 경화가 한심하다며 혀를 찼다. 다행히도 별 관심이 없는지 구박 한 번 하고는 신문을 펼쳐 보기 시작했다. 아침이라 공기가 찬데도, 경화는 등이 다 젖을 것처럼 식은땀이 났다.
“아, 그리고 이따가 서재 청소 좀 하지? 먼지가 너무 많아서 책 꺼내기가 싫어.”
태평하게 신문까지 다 읽은 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알았어요. 경화가 순순히 대답하며 뒤따랐다. 혹시라도 한준이 지연에게 인사라도 하고 간다고 할까 봐, 등으로 교묘히 지연의 방문을 가려야 했다.
“오늘 저녁 먹고 올 거니까 그렇게 알고.”
한결같은 한준의 일방적 통보를 마지막으로 현관문이 쾅 닫혔다. 들키지 않았다는 것에 경화가 깊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딸에게 무관심한 남편이 고마운 적은 또 처음이었다.
그러나 모든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경화는 텅 빈 지연의 침대를 믿기지 않는다는 듯 쳐다봤다.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떠도 막막한 현실은 그대로였다.
‘사랑하는 딸 (10)’
밖은 하얀 한낮이지만, 속은 새까맣게 탔다. 처음엔 지연이도 화가 나서 그랬으려니 생각했다. 본인도 화가 풀리면 집에 오든지 전화를 받든 지 할 것이라고. 그러나 한 통 두 통 응답 없는 통화기록이 쌓여가자 경화의 마음은 지옥이 따로 없었다.
‘너 어디야?’
‘너 진짜 엄마 이렇게 힘들게 할래?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이게 무슨 짓이야?’
‘전화 당장 받아.’
‘좋아. 그럼 어디 있는 지라도 말해줘. 더 이상 안 물어볼게.’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당장 엄마 목소리 듣기 싫어서 그런 거라면 문자라도 답변해줬으면 했다. 하지만 야속한 지연이는 몇 시간이 넘게 문자에도 답이 없었다. 못된 것. 괘씸한 것. 경화가 분노를 이기지 못해 핸드폰을 소파에 집어던졌다. 제 아무렴 화가 났다고 한들 이런 식으로 반항을 해?
화가 나자 동시에 또 머리가 아팠다. 이러다 제 명에 못살지. 경화가 지끈거리는 머리통을 누르며 털썩 주저앉았다. 등받이에 기대 고개를 젖히자, 눈꺼풀 안으로 자꾸 눈물이 고였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귀하게 자라 조금 틱틱거리는 면은 있어도, 마음씨 착하고 공주 같던 지연이 왜 이렇게 된 건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모든 게 다 자기 탓인 것만 같았다. 자신이 엄마로서 말을 잘 들어주지 않아서 지연이 엇나간 건 아닐까. 어제 지연의 말을 무시하고 억지로 그녀를 엿들으려고 한 것도 그렇고, 초등학교 때 피아노 배우고 싶다는 것 못 하게 한 것, 중학교 때 친한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겠다는 것 반대한 것. 고등학교 때 성적 떨어졌다고 심하게 혼낸 것... 그때 그 하나하나가 지연과의 균열을 만들었나 보다.
결국 그 틈을 메꾸지 못해서 여기까지 온 것일 테고.
경화는 종종 그녀의 20년 전을 회상했다. 선으로 만난 한준과 교제했지만, 한준의 성격은 경화와 많은 부분에서 맞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도 찼고 결혼도 해야 해서 어영부영 만남을 지속하던 중에, 준비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됐다. 거만했지만 책임감은 있었던 한준은 그렇게 경화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 건 너무도 막중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점점 몸은 무거워지고, 장기들은 다 눌려서 소화가 안 됐다. 배우자를 죽도록 사랑해도 힘든 일인데, 더욱이 확신도 없던 한준과의 결혼이었기에 더 많이 힘들고 외로웠다. 커져가는 아이의 기척이 느껴질 때면 신비하고 행복하기보단 무섭고 불안하기만 했다. 내가 과연 이 아이의 생명을 책임져도 되는 걸까.
그런데 그 아이가, 자꾸 찌그러진 얼굴로 울면서 안기고, 눈이 마주치면 개구진 미소를 지으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 조그만 아이의 존재가 심장을 시리고 아프게 했다. 여전히 아이를 키우는 것은 모든 게 힘들고 무서운 일이었지만. 아무것도 없던 경화의 삶엔 유일한 목적이 생겼다. 이 아이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 무엇이라도 하리라고 다짐했었다.
경화는 옅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지연을 기다리며 소파에 잠깐 앉아 있다가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놀란 경화는 핸드폰부터 확인했다. 혹시라도 경화가 잠든 사이, 지연한테서 연락이 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전화도, 문자도 지연에게서 돌아온 것은 없었다.
이젠 경화의 마음속에 분노나 괘씸함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연이 잘못되지만 않으면 그걸로도 다행이었다.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고 있어도 아무래도 좋으니 그냥 무사하기만 하라는 생각이었다. 시간을 보니 일곱 시였다. 한준이 곧 돌아올 것 같았다. 처음으로 한준이 빨리 돌아왔으면 했다. 한준이 돌아오면 경찰에 신고부터 하고 한준의 차를 타고 여기저기 찾아보기라도 할 수 있을 테니. 한준에게 면박 하루종일 듣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젠 정말 지연을 찾아야 했다.
“나 왔어. 근데 왜 불을 다 끄고 있어?”
한준이 집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에서 홀로 흐느끼는 경화를 마주쳤다. 겉옷을 벗으려다 그대로 멈춰 섰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무리 무심한 남자라도 어두운 거실에서 눈이 퉁퉁 부어 있는 경화의 모습은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한준을 보자 경화는 참아왔던 울음을 꺼내 오열했다.
“어떡해요?... 우리... 지연이가 사라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