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지연 2
지연은 이불속에 한참을 뜬 눈으로 웅크려 있었다. 잠에 들려다가도, 이런저런 생각들이 불쑥 치밀어올라 잠이 오질 않았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 뒤척이다가, 결국은 벌떡 허리를 세워 앉았다.
밖은 모두가 잠들고 빛 한 점 없이 캄캄했다. 지연이 핸드폰을 켜 시간을 봤다. 오전 두 시.
초능력이 생긴 이후 일어난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멋모르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도 물론 화가 났다. 하지만 현재 지연이 가장 분노하는 대상은 엄마 아빠였다. 딸의 감정은 안중에도 없고 어디 보여줄 만한 트로피로만 생각하는 아빠, 딸이 이십 살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손 위에 올려두고 훤히 들여다보려고만 하는 엄마.
잠이 완전히 깨버린 지연이 아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딱히 하려는 건 없었지만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잠도 오지 않는 이 새벽의 시간을 빨리 써버리고 싶었다. 유튜브를 보려다가 별생각 없이 SNS에 먼저 접속했다. 새벽이라 그런지, 그 활발하던 SNS도 잠깐 소강상태였다. 그러다 현재 접속 중인 인원을 확인한 지연이 잠시 얼었다. 수형이 몇 분 전 접속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마치 말 안 통하는 외국에서 유일하게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난 기분일까. 불면의 새벽에 함께 깨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지연은 수형에게 깊은 동질감과 호감을 느꼈다. 왠지 수형만큼은 지연이 느끼는 이 복잡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뒤늦게 초능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내내 속해 있던 비초능인 세계에서 갑자기 뱉어진 느낌.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초능인으로 살기엔 어색하고 서먹한 느낌.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제3세계 같은 이 느낌. 세상 사람들 그 누구도, 심지어 엄마아빠도 이해할 수 없는 이 기분을 말이다. 평소 같음 절대 하지 않았겠지만, 새벽이라 감정이 고조되어 알 수 없는 용기가 났다. 수형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안녕. 혹시... 아직 안 자?’
충동적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지연은 곧바로 후회했다. 그가 답장이 와도, 안 와도 곤란할 것이었다. 순간 드는 반가움에 흔들려 저질러버렸는데, 답장이 오면 뭐라고 답할지도 생각해 놓지 않았다. 그러나 이왕 엎질러진 물이라면, 답장이 오지 않는 것보단 답장이 와서 곤란한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마침 수형도 접속해 있었던지 메시지를 읽었다는 표시가 떴다. 이어 내용을 작성 중인 상태로 변했다. 지연이 긴장 돼서 마른침을 삼켰다.
‘응. 어쩌다 보니. 너도 안 자나 보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뭐라고 답변해야 하지. 수형에게서 바로 답이 와서 기쁜 것도 잠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금방 초조해졌다. 그냥 같이 접속해 있는 게 반가워서 말을 걸었다는 건 너무 관심을 티 내는 것이라 부끄러우니까. 지연이 망설이는 사이, 고맙게도 수형이 대화를 이어갔다.
‘아까 일은 너무 마음 쓰지 마. 시간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
‘아... 아냐. 전혀 신경 안 써. 다 까먹었어.’
‘그렇다면 다행이야.’
역시 세심하고 사려 깊네. 지연이 엷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잠깐 침묵이 돌자, 이번엔 지연이 초조해져선 먼저 말을 꺼냈다.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실없이 대화가 끊기는 건 싫었다.
‘실은 못 자고 있는 이유가 있어. 아까 엄마아빠 때문에 화가 나서...’
수형에게 처음부터 엄마아빠를 욕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냥 수형이라면 이 답답한 마음에 공감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속으론 어떤 생각을 할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왠지 수형이라면 기꺼이 그래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우리 아빠는 내가 싫다는데도 자꾸 방송에 나를 노출시키려고 하고... 그래서 안 그래도 짜증 나 죽겠는데 우리 엄마는 거기다 대고 몰래 텔레파시로 내 생각을 읽으려고 하잖아. 아무리 딸이라도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는 거 아니냐고.’
‘그건 좀 어머님이 너무하셨네...’
‘그렇지? 내가 예민한 거 아니지?’
‘응. 화날 만 해.’
‘하... 진짜 엄마랑 같이 못 살겠어. 너무 짜증 나.’
아, 너무 불평불만만 했나. 철없는 불효녀로 보이는 건 아닐까. 한바탕 쏟아내고 나니까 뒤늦게 아차 싶었다. 지연의 마지막 문자 뒤로 수형의 답장이 뜸을 들였다. 역시 조금 그랬나? 지연이 또 다시 후회하려던 차에 수형이 새로운 메세지를 보냈다.
‘기분 전환 겸 잠깐 바람 쐬고 올래?’
‘.....지금?’
기분 전환, 잠깐 바람 쐬는 것 다 좋았다. 그런데 조금 당황스러웠다. 바깥은 그 흔한 헤드라이트 불빛 하나 없는 고요한 어둠 속이었다.
‘응. 너희 집 앞으로 갈게. 어때?’
지연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아직도 겨우 새벽 두 시 반을 갓 넘긴 시각이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해가 뜨려면 적어도 족히 서너 시간은 기다려야 할 텐데... 하지만 지연은 이미 세이렌에게 홀린 선원 같았다. 그냥 수형을 따라 바닥이 안 보이는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대충 겉옷만 챙겨서 조심히 문 밖을 나가려던 지연이 불 꺼진 집 안을 돌아봤다. 순간 울컥해선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삐져나오는 죄책감을 누르려면 끊임없이 합리화를 해야 했다. 그래, 이건 엄마에 대한 정당하고 합리적인 시위 방법이다. 어쩔 수 없이 뭐라도 터지기 전에 스트레스를 푸는 것뿐이다.
잠깐 근처 바다만 보고 다시 돌아올 것이지만, 혹시라도 그전에 엄마가 알게 되면 단 1초라도 후회하면 좋을 것 같았다. 뭔갈 결심한 지연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방 안에서 필기용 노트를 꺼내 한 장을 부욱 뜯어냈다.
‘맘대로 딸 생각이나 훔쳐보는 엄마랑 같이 못 있겠어. 나한테 두 번 다시 텔레파시 쓰지 마.’
나름대로 제 분노를 표현한 지연이 다시 방 밖을 나섰다. 저 쪽지가 얼마나 큰 나비효과를 부를지 모르는 그땐, 아주 소심한 복수였을 뿐이었다.
수형의 차는 까만 도로를 계속 내달렸다. 저처럼 이제 갓 스무 살밖에 안 된 수형이 차를 몬다기에 내심 걱정했지만, 차를 탔는 지도 모를 정도로 안정적이고 조용한 승차감에 지연의 긴장도 점차 풀렸다. 미뤄왔던 졸음이 서서히 오는 기분이었다. 잠시 딴생각을 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조수석 창문에 머리를 기대 졸고 있었다.
“아, 미안. 졸았다.”
지연이 눈을 깜빡거리며 졸음을 참았다. 그런 지연을 보고 수형이 피식 웃었다.
“잠깐 자. 도착하면 깨워 줄게.”
“그래도... 너도 피곤할 텐데.”
“난 오늘 낮잠 자서 괜찮아.”
“그래? 미안해서 어쩌지... 나 때문에 나온 건데.”
“아냐. 나도 답답해서 나오고 싶었어.”
“그래도 나 5시쯤엔 깨워줘. 그때 울 엄마 일어날 수도 있거든.”
“그래. 알았어. 걱정 말고 자.”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수형이 자도 된다고 허락해 준 덕에, 지연은 맘 놓고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차 안은 적당히 따뜻하고 바깥은 적당히 캄캄했다. 좋아하는 수형과 함께 있는 것은 긴장됐지만 더 큰 졸음을 이길 수 없었다.
지연은 차 안에서 짧은 꿈을 꿨다. 누군가가 지연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경화였다. 용건도 없이 자신의 이름만 계속 부르는 경화의 목소리에 지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지연은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또 오늘도 아침이 왔구나. 엄만 또 아침 먹으라고 자신을 부르는 거구나... 그러면 이제 엄마가 기어이 방문을 열고 또 들어올 일이 남았겠지. 늘 그렇듯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 이불을 젖히고 웅크린 몸을 깰 때까지 흔들 것이다. 거절하고 짜증내면 나가겠지만 십 분만 더 자라면서 또 자신을 깨우러 올 것이다.
그런데 엄마가 오질 않는다. 지연에겐 경화의 목소리만 메아리처럼 울리듯이 들리고, 정작 경화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질 않았다. 시간이 지나니 그 목소리마저도 희미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왠지 찝찝함에 지연이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익숙한 방 천장이 아니라, 생소한 풍경 속 한 복판이었다.
얼마나 잔 걸까. 새벽 5시에 깨워달라고 했는데, 이미 바깥은 해가 완전히 다 뜬 듯 환해져 있었다. 옆에 있어야 할 수형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지연이 화들짝 놀라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핸드폰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분명 겉옷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불룩해야 할 주머니 위치를 몇 번이나 더듬거리다가, 지연은 차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밖은 당초 수형이 얘기했던 바다도 아닌, 어딘지 알 수 없는 숲 속 한가운데였다. 마침 숲 안에서 수형이 태연하게 차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야. 5시에 깨워달랬는데 어디 갔었어?”
“아, 이제 일어났어?”
“응. 근데 내 핸드폰이 어딨지? 혹시 내 핸드폰 못 봤어? 엄마 걱정할 거 같아서 그래도 문자라도 한 통 해야 될 거 같은데.”
지연이 초조하게 다시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혹시라도 차 안에 떨어져 있을까 차 안으로 고개를 넣어 살폈다. 좀 도와주면 좋으련만 수형은 그런 지연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없을 리가 없는데. 아까 너랑 집 앞에서 만나려고 연락도 했으니까... 지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형아, 전화 한 통 해줄 수 있어? 아마 차 어디에 빠진 거 같은데 도저히 못 찾겠네.”
다급함에 지연이 수형을 불렀다. 그러나 그때부터 수형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시작했다. 수형은 초조하게 발을 동동거리는 지연의 걱정이 남 일이라는 듯 팔짱만 끼고 서 있었다. 그전까지 지연의 걱정에 공감해 주고, 지연을 욕하던 동기들을 대신 혼내주던 인물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수형을, 지연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돌아봤다.
“미안, 나도 핸드폰이 어딨는 지 모르겠네.”
수형이 입꼬리만 올려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 차에 타기 직전까지도 수형과 지연은 핸드폰으로 얘기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치는 수형에, 그제야 지연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
수형은 핸드폰을 영영 돌려주지 않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