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형의 사정
*Trigger warning : 폭력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니, 열람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평소 지연의 성격 같아서는 수형에게 당장 따져 묻고 싶었다. 왜 다섯 시에 깨워준다고 약속하고 깨워주지 않았는지, 왜 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으면서 인적 드문 숲 속으로 데려왔는지, 왜 핸드폰으로 아까까지만 해도 연락했으면서 어딨는지 모르겠다는 거짓말을 하는지.
금방이라도 울고 싶은 지연과 달리 수형의 표정은 평온했다. 너무 평온해서 무서웠다. 그 말은 즉 일이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지연뿐이라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수형이 의도한 바였다. 수형이 태연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다시 차에 탈래? 지금이라도 바다 보러 가자.”
지연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수형은 점점 지연에게 다가왔다. 지연의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수형을 따라 이 차에 타면 죽을 것이다. 그 후로는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곧바로 지연이 수형의 반대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숲 속에는 그 어떤 차도,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길을 지연은 계속 뛰고 또 뛰었다. 타닥타닥. 딱딱한 바닥을 딛는 지연의 신발 소리만 부지런히 울려 퍼졌다. 미친 듯이 뛰던 지연이 잠시 숨을 고르고 뒤를 쳐다봤다. 이 넓은 숲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발소리만 울리던 것이 의아하던 차였다. 쫓아오지 않는 건가? 어느새 수형과 수형의 차는 손가락만 하게 작아져 있었다.
하지만 계속 도망은 쳐야 했다. 지연이 다시 지친 몸을 이끌고 뛰기 시작했다. 아까보단 지연의 발걸음 소리도 현저히 느려졌다. 그래도 쫓아오지 않는 것 같으니. 약간 안심했다. 그러다 문득, 도망가는 지연의 뒤로, 아까는 들을 수 없던 소리가 겹쳐 들리기 시작했다. 탁. 탁. 둔탁한 소리가 멀리서부터 다가왔다. 그리고 점점 빨라지고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지연이 뒤를 돌아봤다. 손가락만 했던 수형이 어느새 팔뚝만큼 커져서 쫓아오고 있었다.
따라 잡힐 것이다. 앞뒤로 아무것도 없는 길에서 죽어라 달려봤자 결국 체력이 더 좋은 수형에게 붙잡힐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따돌려야 했다. 크게 다칠 수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평탄한 길을 끊임없이 달리던 지연이, 방향을 틀어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잠깐 나무 덩굴 같은 데 숨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다시 빠른 속도로 산길을 내려가던 지연이 그대로 굳었다. 어떻게 이렇게 절망스러울 수가. 더 이상 지연의 앞에 펼쳐진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길의 끝에 남아있는 것은 가파른 낭떠러지였다.
그리고 절망한 지연 뒤로, 집요하게 쫓아온 수형이 그녀를 덮쳤다.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진 지연의 코와 입에 수형이 손수건을 갖다 댔다. 지연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깼어?”
몽롱한 시야로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수형이었다. 분명 수형의 습격을 받고 기절한 곳은 숲 안이었는데, 지연은 의자에 묶여 있는 채로 웬 실내에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멀쩡한 건물은 아닌 것 같았다. 지금은 쓰지 않는 곳인 듯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오랫동안 쌓인 퀴퀴한 먼지 묵은내가 났다. 뒤늦게 지연은 온몸이 쓰리고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본인을 기절시켜 데려가기 위해 수형이 뒤에서 넘어뜨리면서 얼굴과 몸을 크게 쓸린 모양이었다. 지연은 기어이 폭력까지 쓴 수형을 경멸하듯 노려봤다.
“미안. 그러게, 순순히 차에 타랄 때 탔으면 좋았잖아.”
지연의 표정을 읽었는지 수형은 조소했다. 그러나 지연은 이제 정말 그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가 더 궁금했다. 그가 이유를 말해주면, 어떻게든 그를 달래서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굴에 난 상처쯤이야 너그럽게 용서할 것이다. 하지만 뭔 말을 꺼내려해도 테이프가 입을 꽉 틀어막고 있어서 불가능했다. 답답함에 지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야 내가 원하는 컬렉션이 완성됐어. 지연아, 주위를 좀 둘러볼래?”
컬렉션? 나 말고 뭐가 또 있단 말인가? 지연이 의자에 묶인 채 어렵게 고개를 돌렸다. 지연의 얼굴이 또 한 번 새파랗게 질렸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피칠갑을 한 남자들이 너덜하게 기둥에 묶여 있었다. 지연의 얼굴이 갈린 것쯤은 이렇게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금만 더 수형을 자극했다간 본인도 저런 꼴이 됐을 거라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내가 왜 이러냐고?”
경멸스러운 지연의 시선을 느끼고, 수형은 드디어 본론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수형은 묶인 남자 둘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오징어처럼 축 늘어진 남자 하나의 얼굴을 들어, 지연 쪽으로 억지로 틀었다. 남자는 고통스럽다는 듯 신음했다.
“이 새끼는 불을 만들 수 있는 초능인이고.”
수형은 반대편 남자의 얼굴도 틀어서 지연에게 보여줬다. 어찌나 얻어맞았는지 끔찍한 몰골에 지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얘는 염력을 쓸 수 있는 초능인이야.”
“......”
“지금은 다들 저래서... 초능력은 무슨 살아있는 것도 기적이겠지만.”
정황상 자신이 해쳤음이 분명함에도, 수형은 남일 말하듯 혀를 끌끌 찼다. 단단히 잘못 걸렸구나. 지연은 수형이 이럴 줄도 모르고 수형에게 새벽에 먼저 말을 건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차마 두 눈 뜨고 다 볼 수가 없어서 지연은 결국 눈을 바닥에 떨궜다. 회색 시멘트 바닥에 지연의 눈물 자국이 하나씩 번지기 시작했다. 수형이 그런 지연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 자신의 얼굴을 보게 했다. 한 때는 호감까지 가질 정도로 반듯했던 수형의 용모가, 전혀 다른 사람인 양 섬뜩하고 공포스러웠다.
“지연아. 난 초능인 새끼들을 혐오해. 다 죽여버리고 싶어.”
“......”
“초능인 새끼들은 하나같이 자기들만 아는 이기적이고,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무책임한 놈들이거든.”
“......”
“난 초능인들 때문에 내 부모를 잃었어.”
경화의 신고에 경찰들이 집으로 방문했다. 거의 반 미쳐 있는 경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고를 하긴 했다만, 한준은 경찰이 오고 나서도 못마땅함을 감출 수 없었다. 지연이 남긴 메시지에 근거해, 지연은 실종된 것이 아니라 제 발로 가출한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런 것에 쓸데없이 경찰력을 써서 민폐를 주고, 혹시라도 기사가 나거나 해서 자신의 명성에 흠집이 나는 것이 한준은 싫었다.
“그냥 딸이 엄마랑 싸운 건데... 그래도 부모 된 마음에 걱정이 돼서 그만...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연락이 몇 시간째 안 되신다면서요. 그래도 위치추적 해봐야죠.”
“네. 부탁드립니다. 딸아이가 골치를 썩여서 죄송합니다.”
그런 한준이 이해가 안 되기는 경화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렴 유명 대학의 교수이고, 방송 많이 나오는 유명인이라고 한들 자신의 체면이 딸의 안위보다 더 중요할까? 한준은 혹시라도 기사화가 되면 곤란하다며 몇 번씩이나 경찰에게 당부했다.
“우선 위치추적을 해보고, 실종자의 신병을 확보한 뒤에 부모님께 연락드리겠습니다.”
한준과 경화의 은근한 기싸움을 뒤로하고, 경찰은 다시 오겠다며 집을 나갔다. 일단 신고를 하고 나서도 경화는 진정할 수가 없었다. 지연이 단순 가출한 것으로 생각하는 한준은 지연에 대한 분노와 괘씸함을 쏟아냈다. 오냐오냐 키웠더니 기어이 부모 마음에 이런 식으로 대못을 박는구나. 그리고 초조해하는 경화에게도, 위로와 핀잔이 딱 반반씩 섞인 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위치추적 된다잖아. 좀 기다려보지. 하지만 눈덩이처럼 불어난 경화의 불안감은 한준의 말도, 경찰의 말도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났을까. 기다리던 경찰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준이 재빨리 낚아채 전화를 받았다.
“그래요. 위치추적이 됐나요? 지연이는 어디 있던가요?”
그러나 전화기 속 들려오는 경찰의 목소리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전화를 받던 한준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져 갔다.
“방금 실종자 분의 핸드폰으로 위치추적된 장소에 가보았는데... 실종자 분을 찾지 못했습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사람은 없고 핸드폰만 있다는 소리요? 거기가 대체 어딥니까?”
경찰은 곤란한 말투로 답했다.
“그게... 저수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