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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 Jul 12. 2024

매미가 운다

물을 뿌리고 돌아서는데 매미 소리가 났다. 환청인가 싶어 가만히 섰더니 먼 데서 끊어질 듯 울음이 이어졌다. 이맘 때면 아버지의 목덜미가 검붉어졌다. 전주 꼭대기에 온종일 매달려 있다가 해 질 녘에야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서다가 문득 돌아서서 검어진 목을 봤다. 괜스레 넘긴 선크림은 바르는지 어디 넣어두기만 했는지 목이 갈수록 검어졌다. 가끔은 살갗이 벗겨질 듯 붉었다. 검은 매미 등을 보면 그 목이 떠올랐다.


살갗처럼 토마토가 발갛게 익었다. 구불구불 엮인 가지가 속으로 품어낸 열매를 따냈다. 땡볕에 녹아내린 잎 아래, 그늘진 열매만은 서늘했다. 사락사락 머리 위로 자란 옥수수가 밀짚모자 정수리를 건드렸다. 턱끝에 땀이 맺힐 새도 없이 흘렀다. 현기증이 일 때면 가만히 서서 소리를 들었다. 산 저편에서 막 날개를 펼친 매미가 홀로 가늘게 울었다.


밭에 물을 주기 위해 열어젖힌 통 안에서 뭔가가 튀어 올랐다. 물을 튀기며 달아난 녀석은 청개구리였다. 봄 내내 소란스럽더니 어둑한 물통에 자리를 잡았다. 손톱보다 작은 개구리들이 폴짝폴짝 물조리개를 피해 달아났다. 문을 열기 전까진 개굴개굴 울어대던 녀석들이 소리 없이 침입자를 바라봤다. 적당히 물을 퍼내고 다시 닫았더니 또 통 안에서 풀쩍, 개굴개굴하는 묘한 소리가 났다.


간혹 밭으로 날아든 새들은 척 보기에도 어렸다. 앞머리가 불쑥 솟은 박새는 도망갈 생각도 없이 앉았다. 홀로 땅을 톡톡 건드리다가 포로롱 날아갔다. 다음날엔 몸집이 작은 뻐꾸기가 왔다. 몸체에 푸른기가 남은 새끼였다. 탁란으로 자라난 새끼라지만 우거진 둥지에서 품어낸 녀석이었다. 빽빽 울어대는 모양새가 깜찍했다. 얼마 전 닭장에 새로운 새끼가 태어났다. 어미 한 마리 당 새끼 한 마리였는데, 한 마리가 아이만 두고 퍽하면 놀러 나갔다. 그때마다 옆집 어미에게 붙어다디 던 새끼는 어느 순간 그 어미를 쫓아다녔다.


무사히 합류해서 이제 어미 하나에 병아리 둘이 되었다. 북슬북슬한 어미 품 아래서 머리 두 개가 나왔다. 뛰쳐나온 병아리 다리에 털이 돋았다. 불쑥 자라난 모습이 새나 식물이나 다르지 않았다. 가늠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건 주변이었다. 개구리가 울던 밤이 지나고 뻐꾸기 소리가 나다가 매미가 폭발하듯 울었다. 찰나동안 질주하던 매미가 멈추고 나면 풀벌레소리가 서늘한 밤바람과 함께 흘러들었다.


매미가 울면 후텁한 여름 창가가 떠올랐다. 에어컨도 없이 선풍기 바람으로 버티던 학창 시절이 생각났다. 점심이 지난 5교시, 아이들이 꾸벅꾸벅 잠든 틈으로 빗겨 들어오던 볕과 그늘진 복도가 뒤섞이며 고요한 풍경을 그려냈다. 탈탈탈 머리 위로 돌아가는 선풍기가 간혹 닿을 때면 가려워진 이마를 긁었다. 창 아래에선 체육시간에 맞춰 나간 아이들과 호루라기 소리가 먹먹하게 퍼졌다. 그 뒤로 배경처럼 맴맴맴 소리가 이어졌다. 한참 판서를 하던 선생님이 옷깃을 펄럭였다. 후텁한 열기에도 이상한 시원함이 찾아들었다.


좀 더 어린 시절에는 일찌감치 집에 도착해 대자리에 누웠다. 한참을 뛰놀던 몸도 대자리에 닿으면 서늘하게 식었다. 그렇게 홀로 뒹굴대다 보면 엄마가 돌아왔다. 주말이면 내 옆으로 어린 혈육이 나란히 누웠다. 서로 발이며 손을 툭툭 쳐대며 실랑이를 벌이다 수박을 먹곤 노곤하게 잠들었다. 밤이면 열대야를 피해 온 가족이 거실로 모였다. 나른한 피신처에서 노곤하게 잠드는 숨소리가 쌕쌕 이어졌다. 이따금 열어둔 창으로 불어온 바람이 들춰진 배를 쓸며 지나갔다.


한 여름 땡볕에서도 미약하게나마 실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라기에도 약한, 기류가 느껴졌다. 그럴 때면 가만히 매미가 울던 시절을 떠올렸다. 되도록이면 가장 편안하게 누웠던 순간을, 수박을 퍼먹던 어릴 적을, 계곡에서 이가 떨리도록 헤엄치던 때를 생각했다. 그렇게 땀을 뚝뚝 흘리고 앉아 있자니 뒤에서 엄마가 "더위도 잠깐이야"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살인적인 태양이었다.


쉴 수만은 없어 물조리개를 들고 이리저리 고랑 사이를 다녔다. 부러진 가지를 정돈하고 열매를 따고, 물을 주다 보니 하늘이 붉어졌다. 산너머가 어둑해지더니 곧이어 땅거미가 졌다. 양 어깨에 수확한 토마토와 오이, 가지를 가득 메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다 문득 어릴 적 나시 바람으로 온 동네를 뛰놀다 집으로 돌아가던 순간이 떠올랐다. "엄마"하고 부르니 앞서가던 엄마가 "왜"하고 돌아봤다. 노을 진 뒷모습을 따라 후다닥 달려가며 "그냥"하고 괜스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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