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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 Jun 20. 2024

고라니가 온다

콩은 내 숙원이었다. 3년 전 12월쯤이면 회사에 일이 없었다. 지루한 공간에서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여러 짓을 했는데, 나는 함께 시간을 견뎌 줄 콩을 심었다. 콩은 파티션 아래 온갖 서류 틈에서 은밀히 싹을 틔웠다. 소식을 들은 동료들도 다들 솜 위에 콩을 얹었다. 콩은 암발아하기 때문에 어둑한 실내에서도 빠르게 자랐다. 출근을 완료한 후에는 서로 비밀스레 콩의 근황을 묻곤 했다. 


콩은 꽤 건강하게 자랐다. 일단 곰팡이를 피했고, 튼튼한 줄기가 곧게 솟았다. 자란 건 콩이지만, 자랑은 내가 하고 다녔다. 이제 솜에서 벗어나 흙으로 옮겼다. 이사를 마친 콩에게 볕을 쬐게 해주고 싶었고, 하필 폭염 주의보가 내린 날이었다. 평소 한산하던 스케줄 표에 갑작스러운 근무가 잡혀 집중한 사이 콩은 베란다에 홀로 남겨졌다. 급히 찾으러 갔을 땐 이미 바싹 말라버렸다. 어쩐지 쓰레기통에 버릴 맘은 들지 않아 인근 공원으로 향했다.


작년에는 밭에 콩을 심었다. 이번에는 일찍부터 볕에 두어서인지, 강한 빛에도 시들지 않았다. 밭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콩으로 향했다. 적응을 끝낸 콩은 싹을 틔웠고, 얼마 되지 않아 둥근 잎을 맺었다. 우비를 쓰고 젖은 흙 위를 걸었다. 비가 많이 내려서인지 콩은 이전보다 빠르게 커갔다. 콩이 어디까지 자랄지, 어떻게 맺힐지 상상했다. 잭과 콩나무처럼 저 끝까지 자라주지 않으려나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콩이 싹을 틔우고 3주 뒤, 폭염주의보 속에서도 밭이 자랐다. 손을 많이 대지 않아 건너편이 보이지 않았다. 우거진 모습이 흡사 정글 같았다. 허리까지 자란 고추가 옷깃을 툭툭 건드렸고, 건너편 고랑까지 덤불을 이룬 토마토가 다리를 붙잡았다. 머리 위로 훌쩍 자란 옥수수가 모자를 건드려 고개를 숙이면 서늘한 그늘이 생겼다. 인간이 견디기 어려운 더위를 묵묵히 받아내어 자라는 작물을 올려다봤다. 푸른 잎이 더위에 녹을 듯 쳐졌지만 소낙비가 내리면 금세 하늘을 향해 뻗을 터였다. 분명 콩도 많이 자랐으리라 생각했다.


덤불을 헤치고 도착한 감나무 아래에는 콩이 없었다. 있긴 했는데 잎이 다 뜯겨 줄기만 휑하니 남았다. 혈육이 고집하여 심은 땅콩도 모두 뽑혀 있었다. 범수는 알 수 없었다. 일단 땅콩을 다시 땅에 심고 물을 듬뿍 먹였다. 그리고 이틀 뒤 새벽, 칡넝쿨이 우거진 곳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홱 돌아보니 흰 궁둥이가 보였다. 곧장 달려갔지만 흰 궁둥이가 순식간에 산 너머로 사라졌다. "고라니!"라고 소리쳤을 땐 이미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넘실대는 넝쿨을 보다 감나무로 달려갔다. 이번에도 콩과 땅콩이 모두 뽑혀 있었다.


이후 잇따른 장마와 홍수로 산의 흙이 쓸려 내려왔다. 잠시 비가 그친 틈을 타 멧돼지가 내려왔다. 묵직하게 파인 발자국은 옥수수까지 선명하게 이어졌다. 발이 푹 빠질 정도로 움푹한 발자국 옆에는 들개 자국도 남아있었다. 당연히 옥수수는 멧돼지 먹이이자 놀잇감으로 으스러졌다. 고라니도 그 틈에 왔다 갔는지 또 콩과 땅콩을 모조리 들쑤셔 놨다. 이후로 아빠는 "멧돼지가 내려오니 옥수수와 땅콩, 콩은 심지 마라"라고 하셨다.


올해 5월 작은 도시 사이, 서향 방구석 책장에서 콩이 은밀히 싹을 틔웠다. 이번에는 군집을 이룰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5일 만에 손가락 길이만큼 훌쩍 자란 콩을 데리고 몰래 밭으로 향했다. 아직 붉어지기 전인 보리수 열매 아래, 콩이 조심스레 자리했다. 며칠 뒤 홀로 향한 콩밭에 땅콩이 생겼다. 이제 땅콩 콩밭이었다. 아마 혈육이 몰래 심은 듯했다. 며칠 뒤에는 옥수수도 생겼다. 우리는 모종의 거래처럼 입을 다물었지만 금세 발각될 정도로 식물이 자랐다.


6월 초, 보리수 열매가 볕에 빨갛게 익었다. 콩도 바람에 흔들릴 정도로 길게 뻗었다. 다시 고추가 무성해지고 토마토가 우거졌다. 슬슬 올 때가 됐으려나, 고랑까지 뻗쳐온 칡을 잘라냈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어진 칡이 푸르게 출렁였다. 작년 여름, 안 될 거라던 장담을 이겨냈던 혈육의 생강이 이번에도 지푸라기 아래서 뾰족 튀어나온 참이었다. 3개월 넘는 긴 여정을 지나 겨우 솟아난 생강이 한 뼘 남짓 자랄 때 고라니가 왔었다. 올해도 오려나 문득 긴장감이 들었다.


얼마 전 새벽 일찍 아빠로부터 연락이 왔다. 새끼 고라니가 칡에 걸려 밭으로 떨어진 걸, 다시 산으로 올려줬다는 얘기였다. 주변에 어미가 있었는지 안절부절못하며 꽥꽥 소리를 지르더라고 했다. 아빠가 나타나니 후다닥 도망을 갔는데 새끼를 올려준 뒤로 사라졌으니 아마 어미 품으로 갔을 거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보리수 열매를 마저 씻었다. 체에 씨를 거르고 설탕을 약간 넣어 갈았다. 붉은 보리수 주스였다. 아직 떫은맛이 남은 주스를 마시며 몰래 콩을 떠올렸다. 올해는 콩을 볼 수 있으려나, 아니면 또 잎이 사라져 있으려나, 사라진다면 그 새끼가 무사히 돌아온 거려나, 뭉근하게 익은 보리수를 먹으며 몰래 아빠가 보낸 새끼 고라니 사진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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