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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spiration Feb 25. 2019

오정희 소설 <새>


두 아이들은 물을 삼키듯 소리를 삼킨다. 그 아이들은 아파도 소리 내지 않고, 슬퍼도 소리 내지 않고, 즐거워도 소리 내지 않는다. 소리를 삼키고, 감정을 삼키고, 어른이 아닌 '아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인간'이라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 아무도 알려주는 이가 없으며, 그런 '인간'의 모습을 한 '어른'은 도처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살아 숨 쉬고 있는 '인간'이나 사진첩 속에 있는 '죽어있는 인간'이나 동일시된다. 가위로 오려내고 얼굴을 잘라버린다. 어차피 아무도 신경 쓰는 이도 없고 발각될 일도 없을 테니.


닫혀있고 갇혀있다. 빛바래져있고 죽어있다. 그 모든 것들을 내면으로 삼키고 그것들이 성장해서 괴물 어른이 된다. 마치 우리들의 모습처럼. 그 내면의 독은 폭력으로 변한다. 나보다 약한 자들을 괴롭히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또 하루를 산다. 내 아이에게 내 늙은 부모에게 혹은 내 아내에게 아니면 내 남편에게. 아니면 세상의 약자들에게_ 우리의 하루가 그렇고 우리의 인생이 그렇다. 그게 우리의 본모습이다. 아니_ 우리의 본모습이 어땠는지, 태초에 내가 빛을 바라고 생명을 얻었을 때 그때의 모습이 어땠는지 가늠할 수 조차 없다. 황폐화되었고 모든 것들이 거짓과 허영 속에 물들어져 버렸다.


우리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는 괴물이기에 점점 병들어가고 상처 받고 아프고 두렵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고통은 이미 만성이 되고 나를 점점 퇴색하게 만드는 그 오물들은 더 두꺼워지고 단단해져서 더 이상 빠져나갈 틈조차 주지 않는다. 우리는 절대로 내색할 수 없다. 이미 우리는 그 안에서 미동조차 할 수 없는 화석처럼 아무런 움직임 없이 그렇게 굳어져가고 있고 우리 맨얼굴을 '절대로' 들어낼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언제 진실되고 솔직한 언어를 사용해서 생각하고 말을 했는지 조차 가물가물하다. 아니 그런 이야기조차 언제 들어봤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생각해보면, 솔직하게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게 아니라 우린 배운 적이 없다. 생각하는 방법, 말하는 방법, 그리고 당신의 말을 듣는 방법 조차 배운 적이 없다. 내 생각과 마음 그리고 그 언어들을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이것조차 어떤 누군가가 '사용설명서'를 제시해줘서 모든 사람들은 그 매뉴얼대로 그것의 생각이 내 생각으로, 그것의 언어가 내 언어로, 그것의 마음이 내 마음으로, 그것이 만들어놓은 그 세계가 내 세계가 되어버려서 그것이 나를 삼켜버리고 그것이 나를 지배하는 순간에도 아무런 반성 없이 더 많은 것들을 삼켜버릴 그 세계를 위해 모든 정력과 시간을 투자하고 그것들을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유산으로 남겨준다.


내가 누구이며 난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걸까. 대체 무엇을 위해 하루하루 그토록 내 에너지를 송두리째 바치고 있는 걸까. 아침에 눈을 뜨면 그저 정해진 시간에 똑같이 지정된 장소에서 같은 옷차림, 같은 생각, 같은 모양새를 한 사람들과 같은 언어로 같은 대화를 하고, 또 정해진 시간이 되면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시키고 그 똑같은 짓거리를 매일매일 수도 없이 반복한다. 난 누군가가 손에 틀어쥐고 있는 하나의 이름 안에 갇힌 병정이다. 득실득실 거리는 일개 병정들이 내 밑에 수도 없이 줄 서고 있으며, 그것들을 확인하고 내가 현재 어디까지 도달했는지 증명되는 순간 내 모든 인생과 에너지는 충분히 보상받는다. 내 가족과 내 배우자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도 이 모든 것들은 위대한 유산으로 남겨질 것이며 나와 그들 모두 태초의 어떤 형상의 인간인지 내겐 흥미조차 주지 못한다.


어쩌면 어릴 적부터 우리는 부모에게 혹은 선생에게 사회에게 집어삼키는 법을 먼저 배웠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색채들과 향기들을 모조리 다 한데 휘섞어버리고 삼켜버리는 바람에 각각의 색채와 그 고유의 향기는 자신의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어둡고 악취 나는 오물이 되어버렸다.


살고 싶다. 숨을 쉬고 싶다.

그 단단해진 표층을 다 부서 버리고, 단 한 톨의 먼지도 없이 깨끗하게 세정해서 내가 어떤 모양새인지 내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형체의 인간인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발견해서 따뜻하게 안아주고 사랑해주면서 그저 '나로서' '나답게' 그렇게 단 한 번이라도 용기 내서 살아보고 싶다. 그런 삶이 올바른 삶이라면 기꺼이 내가 나 자신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반듯하게 닦아내서 그 자체로도 빛난다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다.


반짝이는 두 아이들이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그 존재 자체로 사랑받았다면 모든 감정을 삼켜서 자신들을 죽이는 독으로 만들어버리진 않았을 거다. 어릴 적에 형성된 사랑받고 사랑하는 그 관계적인 유대의 뿌리는 지독할 정도로 죽을 때까지 우리를 졸졸 쫓아다닌다. 내가 만들어 놓은 나만의 세상이 결코 나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인생에서 사랑'을 선택'하지 않으면, 내 내면의 그 반짝이는 나를 절대로 결코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를 변하게 하는 것은 지혜의 경험이 아니다. 시간도 아니다. 우리를 변하게 하는 것은 오직 사랑이다."

- 파울로 코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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