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호실 이야기 시작합니다.
작은 공간에 비해 제법 큰 창을 가진 원룸을 보자마자 바로 계약금을 넣었다. 결혼을 한 커플 대부분의 증언을 들어보면 ‘아, 이 사람이라면 결혼해도 되겠다.’라는 확신이 든다고 했는데, 그 확신이라는 촉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사실, 그 느낌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곰탕 커플로 다양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지 말입니다. 헤어질 거 아니면 결혼해야지 할 즈음 결혼을 해서^^;; 그게 뭔지 잘 모르지 말입니다.)
몇 날 며칠, 원 룸을 구하러 다니며 머릿속에 매일 그림을 그렸다. 크기는 크지 않아도 되는데, 창문으로 내다보는 뷰가 막혀 있지 않으면 좋을 텐데, 어느 정도의 쾌적함이 보장되면 좋겠는데, 월세가 너무 비싸면 안 되는데, 소음이 많지 않아야 할 텐데, 여자 둘이 사용하니 안전이 보장돼야 될 텐데, 주인이 까탈스럽지 않아야 할 텐데… 수 없이 시뮬레이션했던 공간과 마주하니 ‘아, 이 공간이라면 되겠다’라는 확신이 섰다. 망설임 없이 바로 계약금을 보내고, 부동산 소장님에게 빠른 시일 내에 계약을 할 수 있다고 임대인에게 통보해 달라고 했다.
어느 날, 공간을 얻겠다고 선언하고 한 달여의 여정 끝에 301호실을 계약할 수 있었다. 건물주는 우리가 안착하려는 공간과 마주 보고 있는 302호실에 실거주를 했다.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노부부의 건물이었다. 공동명의로 소유한 건물이라 두 분이 모두 계약서 작성을 위해 부동산에 오셨다. 우리가 계약하려는 아담한 공간에 비해 많은 사람이 모여 계약서를 작성하는 풍경이 사뭇 재미있게 느껴졌다. 나와 S, 노부부, 부동산 소장이 진지모드로 탁자에 둘러앉았다. 유독 직업의식이 투철한 부동산 소장님의 일처리는 건물 하나를 통째 계약하는 분위기를 풍겼다. 걱정과 달리 주인 어르신들은 좋아 보이셨다. 아저씨는 특유의 단단함과 꼼꼼함이 엿 보였고, 아주머니는 털털하면서도 무게 잡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두 분의 조합이 사뭇 온도차가 느껴졌다. 진지한 분위기 속에 아주머니는 내내 잿밥에 관심을 보이셨다. 주위에 결혼 안 한 처자 있으면 소개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오늘 처음 본 임차인에게 헤어질 때까지 소개를 부탁하시며 돌아가셨다.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 이후, 우리와 마주칠 때마다 아들의 직업과 아들의 외형에 대해 정보를 주셨다. 그리고 매 번 주선을 당부하셨다.
이제, 1년의 계약으로 그 공간은 나와 S의 의지에 의해 사용될 공간이 되었다. 하늘의 별과 주역과 명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아무 날이나 정해 입주를 할 수 없는 법이었다. 본격적으로 S와 나의 사주를 풀이해 좋은 날을 내가 찜했다. 보통은 손없는 날 들어가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부족한 걸 채워 줄 수 있는 날을 심사숙고하여 고르고 골라 날을 정했다. S와 나의 사주가 유독 닮은 구석이 있어, 의기투합하는데 걸림돌이 없었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둘 다 ‘목’ 기운이 강한 사주였다. 에너지에 생기가 넘치는 목의 기운답게 마음먹으면 실행에 옮기고, 모험과 시도에 거침없는 행동을 할 수 있었던 듯싶다. 부족한 ‘금’의 기운을 채울 수 있는 날을 정해 입주를 했다.
입주 날짜를 정해 놓고 우리는 공간을 오며 가며 청소도 하고, 책상과 의자 외 기타 필요한 물품을 옮겨 놓았다. 각자의 집에서 가져올 수 있는 것들로 공간을 채웠다. 의외로 S의 집에는 책상이 많았다. 쌍둥이 아들 둘을 키우는 S는 책육아를 끈질기게 이어오다 보니 거실과 아이들의 방 곳곳에 책상과 책꽂이가 과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긴 책상을 구입하기보다는 오히려 S의 집에서 책상을 하나 빼는 것이 경제적 효율성이 높아 보여, 우리는 야밤에 남편의 도움을 받아 책상을 옮겨 놓았다. S의 집에서 책상과 의자 2개를 301호실에 옮겼다. 나 역시 의자 욕심이 많았던지라, 집에 있는 의자 2개를 옮겼다. 사용되지 못하고 방치된 컵도 제법 있어, 사지 않고 각자의 집에서 들고 왔다. 공간은 따로 비용을 들이지 않고 채워졌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데미안을 읽지 않은 이도 이 문장은 어디선가 자주 인용되어서 누구나 알 만한 문장일 것이다. 한 세계를 끝내고, 다음 세계로 나아가려면 어쨌든 그 세계를 깨뜨려야 성장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또, 지구상에 유일하게 자신의 꼬리를 물 수 있는 것은 우로보로스의 뱀 밖에 없다. 그 우로보로스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면 원형을 그린다. 꼬리를 물어 허물을 벗을 때마다 뱀은 성장할 수 있다.
나에게 301호실이라? 한 세계를 깨뜨려, 다른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허물을 벗는 순간과 다르지 않다. 이 세계 또한 언젠가 또 허물을 벗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이번에는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 않다. 왠지 그런 예감이 든다.
비로소, 2023년 10월 19일 우리는 301호실의 첫걸음을 시작하였다. S와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커피를 음미하며, 과일을 깎고 우리만의 조촐한 브런치를 준비하여 앞으로 펼쳐질 이곳에서의 서사를 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