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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곰 Apr 18. 2020

연옥의 병리학

식민주의 너머 역사읽기 - Part 5

토마스 버클과 같은 유럽 역사학자들은 유럽이 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던 이유로 자연적인 조건을 꼽았다. 유럽인들은 자연을 통제하면서 이성을 발휘하고, 국가를 만들어가면서 질서와 진보를 이뤄가는 주체로 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유럽 바깥 ‘미개인’들이 사는 지역에서는 일이 정반대로 벌어질 것이다. 그들은 식민지민들이 자연조건에 굴복한 채로 그저 운명에 순응해서 살아가는 인간들이라고 봤다.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은 조선이 걸어온 역사가 그러하리라고 생각했다. 이 관점에 서면, 조선이라는 지역에 사람들이 살고는 있었지만 그 사람들은 정치공동체를 이룰 만큼 주체적이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지정학적인 조건이나 지리적 환경에 따라 그저 흘러갈 뿐이라고 설명하면 오늘날 조선이 처한 현실을 이해하기 쉬워졌다. 조선은 이미 죽은 나라, 즉 ‘고사국(枯死國)’이었기에 망한 원인으로 볼만한 조건들도 많았다. 원인이 결과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가 원인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이걸 왜곡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우리 주위에서도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예를 들어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사업에 실패했다고 치자. 그러면 주위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역시나, 저 사람 사회성이 부족해서 실패할 줄 알았어.’ 그런데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사업에 성공해서 큰돈을 벌었다면 주위 평가가 180도로 바뀐다. ‘역시나, 저 사람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해서 성공할 줄 알았어.’

중국이나 한국이 가난할 때는 유교가 나라를 망쳤다고 손가락질했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뜨니 유교자본주의니 뭐니 하면서 유교를 재평가하는 말들이 나왔던 것도 내내 비슷한 방식이었다.


게슈탈트 전환(gestalt shift)으로 불리는 심리학 실험을 떠올려보자. 어떤 순간에는 토끼로 보였다가 다음 순간에는 오리로 보이는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혹은 토끼-오리 대신에 소녀-노파가 나오는 버전도 있다. 만약 이 그림들을 두고 ‘토끼다!’ 혹은 ‘소녀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을 왜곡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망국의 원인을 두고 여러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 이유로 신분제를 폐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거나 유학자들이 너무 많아서라고 말할 수도 있다. 혹은 러시아처럼 공산당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에 망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망한 나라는 어차피 말이 없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를 한대도 어느 정도는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들은 조선이 망한 이유를 설명해주진 못한다. 단지 이야기하는 발화자의 머릿속 세계상이 보일 뿐이다. 국제질서를 움직이는 힘이 무엇이라고 보는지 혹은 하나의 국가가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일본인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이 조선인들을 두고 반도적 성격 때문에 대륙을 섬기느라 타율성에 젖어있었다느니 역사가 정체되어 있어서 망했다느니 운운했던 말을 되짚어볼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저들이 유럽인들의 기준에 얼마나 강박적으로 집착하고 있었는지 발견할 수 있다. 조선의 민도가 낮았던 이유로 가져다 붙인 온갖 성격들, 즉 지리적 조건 때문에 국민성이 낮다거나 타율적이라거나 역사가 정체되어있었다는 식의 의심들은 일본이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해명해야만 했던 후진성 목록들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사실 러일전쟁 전까지만 해도 일선동조론, 즉 조선과 일본이 한 뿌리에서 나온 민족이라는 이야기가 영향력을 크게 가지고 있었다. 일본어와 조선어가 유사하다고 보고 오래 전부터 한일 간에 관계가 깊었으며 따라서 민족 역시도 같은 계통에서 나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에는 일본 역사학이 조선을 바라보는 관점이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언어나 민족보다는 ‘국민성’이 국가를 흥하게도 망하게도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 역사학계가 유럽에서 근대 역사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그 전에도 유교식 명분론에 따라서 역사를 쓰는 유교계 이데올로기 그룹이나 일본신화를 사실로 믿는 국학-신토(神道)계 학자들이 활동 중이긴 했다. 하지만 황실옹립 같은 명분이나 태양신 아마테라스 같은 신화 속 존재를 중심에 두는 방식으로는 일본 역사를 서구에 알리고 세계사적 보편성을 인정받기가 어려웠다.

훗날 이기백 등의 내재적 발전론자들에 의해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지표로 지목된 지리적 결정론이 여기서 등장한다. 일본에서 동양학을 세운 역사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1865~1942)는 1913년 발간한 『만주역사지리』 서문에서 “역사의 기초는 지리에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버클이나 기조의 저작을 자주 읽어서 서구 문명론에 익숙했다.

도쿄제국대학 입학 이후에는 랑케의 제자였던 루트비히 리스에게서 역사학을 배웠는데, 리스는 1887년부터 도쿄제국대학에 초빙되어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다. 리스는 자신의 스승이 ‘도덕적 에너지’라고 불렀던 문명 의식에 따라서 동아시아 각국의 국민성을 평가했다. 예를 들면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중국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인들의 정신력이 ‘서구 정신’에 훨씬 가깝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시라토리가 국민성을 이야기하는 방식에서도 스승인 리스가 영향이 크게 끼쳤다.

그러나 시라토리는 자신의 스승처럼 국민성을 서구식 개인주의에서 찾을 수 없었다. 일본에서 개인주의를 강조한다간 천황제 부정으로 몰려서 경을 칠 수도 있었다. 1891년 토쿄제국대학 사료편찬소 교수 구메 구니타케(1839~1931)가 『사학회잡지』라는 근대적 학술지에 ‘신도는 제천의 풍속’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가 도쿄제국대학에서 쫓겨난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

이 논문은 신도를 동아시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났던 제천의식으로 설명했다. 일본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이처럼 오래된 풍습을 계속해서 이어왔기 때문에 만세일계의 국민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물론 천황제를 모욕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천황제가 지닌 우월성을 근대 역사학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었다.

그러나 구메의 작업은 이 당시 일본에서 ‘국체 훼손’으로 몰렸고, 논문을 실었던 『사학회잡지』는 발매금지 처분까지 받게 되었다. 일본 ‘국민성’에서 천황제는 가장 핵심이었고, 학계 역시 이를 부정하지 않기 위해 몸조심해야만 했다.

게다가 더욱 현실적인 문제가 남아있었다. 일본이 남만주까지 세력을 뻗쳤기 때문에 중국과 직접 대치하는 상황을 맞이했던 것이다. 시라토리는 남만주에 있는 일본인들이 중국문화에 젖어 들까봐 걱정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중국은 북방민족이 힘을 앞세워서 정복해 들어와도 그들을 문화적으로 동화시키는 잠재력을 발휘해왔다. 그것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나로 이어져온 일본의 국민성을 뒤흔들 수도 있는 위협이었다.

일본인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은 자신들의 국민성이 앞선다고 뽐내고, 중국의 국민성을 두고는 뒤쳐졌다고 말했지만, 그들이 그렇게 말할수록 중국에 대해 느끼는 위기감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들은 중국의 문화가 가진 잠재력까지 뛰어넘었다고 자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조선이 다시 문제가 된다. 중국이 가진 동화능력이 그렇게나 강한 것이라면 조선이 중국의 영향 밑으로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시라토리와 같은 일본인 식민주의 역사학자가 조선인의 국민성을 두고 “어떻게 하면 외국을 잘 섬겨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라며 타율성이 짙다고 비난했던 것은 결국 조선에게 예전 사대주의와 단절하라는 신신당부였다.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조선이 중국에 대해 사대하던 습속 때문에 발전하지 못했다고 선을 긋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조선을 중국에서 떼어낸 뒤에 만주와 운명공동체로 단단히 묶는 작업이 이어졌다. 만주와 조선의 역사를 하나로 묶어서 불렀던 ‘만선사(滿鮮史)’가 이렇게 등장한 것이다. 만주와 조선은 일본이 중국과 직접 부딪치지 않게 해주는 완충제 같은 영역이었다.


1908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산하에 설치된 ‘만선역사지리조사부’는 만선사를 키워낸 요람이었다. 국가가 사실상 운영하는 회사인데다가 만주에서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설립된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지원하는 역사지리 조사 사업은 학계에 든든한 물주였다. 그러나 지원이 오래가진 않았다. 1913년 대장성의 결정에 따라 조사부가 폐지되어버린 것이다. 만주와 조선의 지리를 조사하는 사업이 정책적 성과를 즉각 내놓기는 어려웠다. 정부 입장에선 예산만 축내고 효과는 보지 못하는 사업으로 보였던 것이다.

만선사와 지리결정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학자와 관료들은 즉각 반발했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총재로 있었던 고토 신페이는 “새로운 만철 중역의 근시안적 행위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의문스럽습니다”라고 항의했다. 그는 역사지리 조사 사업이 정부 입장에서도 쓸모가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일본이 남만주에서 횡포를 부린다는 유언비어를 학자의 힘을 빌려 자연스럽게 오해를 풀어가게 된다.”

일본 행정가가 보기에도 역사학 연구는 충분히 효용이 있는 일이었다. 일본이 세계열강들을 향해서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할 때 학술연구만큼 객관적이고 순수하게 보이는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학술연구가 정치적으로 충분히 효용성이 있다는 입장은 당시 역사학자들에게서도 노골적으로 보인다. 조사부 주임을 맡고 있었던 시라토리는 “조선에서 우리나라의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느냐 마느냐는 만주에서 우리나라의 획책(劃策)이 타당한지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며, 넓은 차원에서 보면 동양의 평화가 유지될지의 여부도 확실히 이 만주 문제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도 되는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만주를 움켜쥘 수 있다면 조선도 영원히 지배할 수 있을 것이며, 반대로 만주를 잃으면 조선은 물론 본토가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역사연구가 식민통치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관을 맺는지 이보다 더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또 어디에 있을까.

행정가와 연구자들의 항의에도 결국 조사부는 폐지되었다. 하지만 만선사 연구는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으로 이관해서 계속 진행되었다. 따라서 지리적 결정론 역시 대학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식민주의 역사학이 조선인들의 국민성에 부여했던 온갖 부정적인 성격들-‘정체되어 있고, 타율적이며, 사대주의에 빠졌고, 문화적으로 독창성이 없다’-의 뿌리인 지리적 결정론이 대학에서 전문성을 얻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일본 본국에서 힘을 얻은 지식은 식민지에서도 이내 통설이 되었다.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사편수회나 민간에서 만든 조선사학회 등에서 지리적 결정론은 부정하기 어려운 정론이었다. 특히 1926년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은 조선사 연구의 중심을 식민지 조선으로 옮긴 제도적 발판이 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은 일본 본국에 있는 제국대학들과 달리 일본이 아니라 조선을 비롯한 ‘동양’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도록 계획되었다. 당시 조선총독을 맡고 있었던 사이토 마코토는 경성제국대학이 동양 연구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에 필요한 인물의 육성에 유의”할 것을 주문했다.

사이토의 말에서 볼 수 있듯 경성제국대학은 일본 본국에서 생산한 식민지에 대한 지식을 식민지에서 계속해서 재생산해내기 위한 거점이었다. 비록 이 대학 사학과 출신 졸업자가 대학 교수가 되는 경우는 없었지만 대부분 중등교사가 되어 학교로 나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식민주의 역사학을 전파시키는 역할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해방은 경성제국대학 출신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기회였다. 그간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들이 비었고, 조선인들은 대학교수로서 연구와 강의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인 교수들이 가르치는 역사학은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다카하시 토오루가 해방된 지 10년이 지난 시점에 한국사학계에서 나온 학술지를 보고는 ‘한국 동양학 연구는 우리들이 깔아놓은 레일 위를 달리고 있다’고 평했던 이유가 있었다. 


한국인 역사학자들은 해방 직후에 “그릇된 일본교육으로 말미암아 부지중에 아이들의 뇌수에 배인 자기모멸의 사상을 씨쳐버리고 우리 민족에 대한 자신을 부러넣어 주기”(김성칠)를 요구하거나 “새로운 구상 하의 새로운 사관 수립은 현하 조산사학도의 가장 중대한 임무의 하나”(이인영)라고 주장하는 등 식민사관 청산에 목소리를 높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러한 작업이 구체적으로 진행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식민주의 역사학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은 1960년대까지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식민주의 역사학은 질기게도 오래 살아남았다. 1960년대에 이기백 등이 내재적 발전론을 내세워 식민사관 청산을 주장했지만 그것으로 사태가 끝나진 않았다. 식민사관이 조선인들을 두고 반도적 성격이 있어서 타율적이라고 이야기한 것을 뒤집어서 문화적 수용력이라는 면에서 주체적이었다고 말해도 성이 차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의 불만은 단순했다. 조선인들이 왜 반도에만 갇혀 살았다고 말하는가? 조선인들의 역사적 영토를 반도에 가둬둔다는 점에서 타율성론이나 문화 수용론이나 매한가지라는 것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식민사관 청산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랬다. ‘조선인들에게 대륙의 기상이 있었음을 인정하라!’ 요즘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상고사’ 연구자들의 주장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조선인들은 반도에 살았기 때문에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에 끼어서 타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 이를 정반대로 뒤집어서 조선인들은 반도에 살았기 때문에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문화를 모두 수용하는 주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 마지막으로 조선인들은 반도가 아니라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기상이 남달랐다는 주장……
세 가지 주장 모두 식민사관을 청산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지리적 결정론이라는 프레임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선인들의 국민성에 지리적 환경조건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는 점에서 말이다.

튀니지의 반식민 혁명가였던 알베르 멤미는 식민지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식민지민들에게 끈덕지게 남아서 이어지는 식민주의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리고 그날 억압이 종식되고, 우리는 우리 눈 앞에 즉시 새로운 인간이 출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탈식민화가 이미 그것을 입증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태가 이런 식으로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진정 새로운 인간을 보기 전에 식민화된 삶이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해방을 맞았지만 식민화된 삶은 왜 지속되는가? 식민사관을 청산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만으로 식민주의 역사학을 청산할 수 없는 것인가?


식민주의는 식민지민들의 삶을 해석하는 지배적인 틀이었다. 정부를 틀어쥐고 군대를 갈아엎어도 식민화된 인식은 오랫동안 남는다. 문명과 미개, 발전과 정체, 서양과 동양……. 어느 식민주의 연구자는 이처럼 지식과 가치가 식민적 위계에 의해 이분법으로 나뉘어 지속된 것을 식민 이후에도 지적인 식민화가 이어지는 '연옥의 병리학’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식민적 위계가 어떻게 힘을 발휘하는지 잘 보여주는 우화가 하나 있다. 


자신을 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평소에는 멀쩡한 사람이었지만 고양이만 보면 겁을 잔뜩 먹어서 꼼짝도 못했다. 일상생활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회사에 출근을 하다가도 길거리에서 고양이를 보면 집 쪽으로 되돌아서 힘닿는 데까지 뛰어갔으니까. 


그는 가족들의 손에 이끌려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3년이 지나고 마침내 퇴원하는 날이 찾아왔다. 의사는 그가 아직도 쥐라고 생각을 하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 있게 답했다. 



무슨 소리세요. 자기가 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의사는 웃으면서 그에게 이제 퇴원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도 웃으면서 꾸벅 인사를 하고 진료실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뒤를 돌더니 물었다. 


그런데 제가 쥐가 아니란 걸 고양이도 알까요?


식민화된 위계가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는 방식이 이렇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판단기준은 고양이에게 맞춰져있다. 일본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서 자신의 역사에 담긴 세계사적 보편성을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인정받기 원했다. 그래서 자신들을 아시아의 ‘미개한’ 이웃들과 구분 짓고자 갖은 애를 썼다. 자신들이 아니라 조선이 쥐라는 식이었다.

식민지 조선은 식민지배 내내 민도가 낮다는 지적을 받았다. ‘너희는 쥐다, 쥐다, 쥐다, 쥐다…….’ 이런 이야기를 40년 가까이 지겹게 듣다보니 후진적이라는 낙인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이 자리를 잡았다. 해방 이후에 비록 몸은 자유로워졌지만 마음은 강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런 강박을 불러일으키는 병리 상태를 “참으로 지독하게 부착된 이류성(二流性)”이라고 불렀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존심을 되찾고자 종종 과한 태도를 보이곤 한다. 인정을 얼른 받고자 탁월한 결과를 내려다가 실수를 범하는 경우도 많다. ‘상고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런 실수가 보인다.

고조선이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역사적 영토를 요동에서 요서까지 자의적으로 넓혀가는 동안 사료 해석에서 무리가 따르는 경우가 자주 노출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영토를 어떻게든 대륙으로 집어넣으려는 건 대륙적 ‘국민성’을 얻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닌가. 지리적 결정론이라는 프레임은 그대로 유지한 채로 거기서 일류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만 키우고 있는 꼴이다. 

내재적 발전론 역시 “참으로 지독하게 부착된 이류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에게 자생적인 발전이 있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자본주의 맹아를 찾아 나서던 노력에서 일류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쉽사리 찾아볼 수가 있다. 이 강박 역시 ‘발전-정체’라는 이분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내재적 발전론과 ‘상고사’ 주장은 비슷한 강박에서 나온 병리상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식민주의 너머 역사읽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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