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곰곰 Jan 25. 2021

삶의 기쁨만이 넘을 수 있는 슬픔

단상

당근마켓에서 처음으로 거래를 했다. 아내가 산책 중에 평소 눈여겨보면 신생아 쿠션이 올라왔다며 살까 말까 고민하기에 지르기로 했다. '국민템'이라 하고 이케아 모빌까지 합쳐서 8천 원이라고 하니 가지러 가기로 했다. 가기 전부터 기분이 좋았다. 물건을 올린 분이 양말도 챙겨주겠다고 하고 가져갈 게 많으니 웬만하면 차로 오면 좋겠다고 하고, 등등.


도착하니 그분이 캐리어에 한가득 물건을 담아 내려왔다. 6월이니 모기장도 필요할 것 같다고 하고 옷도 여름옷이 마침 있어서 챙겨준다고 하고. 물건을 어찌나 잘 관리했던지 켜켜이 갠 아기 옷마다 햇볕 냄새가 난다. 아내는 한아름 선물을 받고 오면서 물건 주신 분과 계속 채팅을 했다. 아이 낳은 선배가 해주는 조언이 고맙다고 했다.


차에서 내려서 두 손 가득 짐을 들고 집으로 올라서는데 무척이나 든든했다. 문득 작년에 읽은 장류진의 소설 '도움의 손길'이 떠올랐다. <일의 기쁨과 슬픔>에 실린 단편인데 여초 카페에 '아기는 그랜드피아노다'란 대목이 공감글로 돌아다녔다. 합리적인 사람은 20평대 아파트에 그랜드피아노를 두지 않는다며 아이를 키우는 건 화자에게 사치라던 부분이었는데 전문이 궁금해서 소설집을 사서 읽었다.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도움의 손길' 발췌본


<일의 기쁨과 슬픔>은 내겐 2020년의 문제작으로 남았다. 페미니즘 소설로 분류된다고 하던데 단편소설마다 반복되는 혐오와 조롱의 대상은 주로 여성들을 향해 있었다. 특히 아기 물건을 가득 보관한 20평대 빌라의 아기 엄마를 묘사하던 대목에선 화자가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각오가 어째서 여초 카페에서 그렇게 공감을 받았는지 짐작도 갔다. 


작품들의 한쪽에서 가난과 '무식'에 대한 혐오가 반복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선 클래식에 대한 '취향'이 강박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일보다는 일에 따른 고소득을 통해 거리 두고자 하는 불쾌한 삶이 그러한 구도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할까.


오늘 두 손 가득 아기 물건들을 들고 오면서 이 짐들을 어디 보관할까 고민도 했다. 아기 짐을 두기엔 20평대 아파트가 좁긴 하다. 오늘 우리에게 이 물건들을 선물처럼 건네준 분도 더 이상 짐을 두고 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육아를 위해 필요한 물적 조건, 그러니까 육아의 물성에 민감해지는 것은 대단히 필요한 일이다. 나름의 해법을 찾아서 집도 정리하고 당근 거래도 하고 필요하면 공동으로 짐을 보관할 수 있을 방법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여기엔 부동산 문제 역시 해결해야 할 난제로 끼어든다.) 다만 이 모든 노력 역시 기쁘기에, 기쁨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인간이기에 할 수 있다. 


유사 맬서스주의자의 관점에서 내려다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삶의 기쁨이 있다. 그 기쁨만이 넘어설 수 있는 20평대의 슬픔이 있다.


작가의 이전글 연옥의 병리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