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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Mar 21. 2022

나를 힘들게 했던 책

<셔기 베인>

소설 속 삶이 너무 우울해서 책을 읽는 일이 이토록 힘든 적이 없었다. 소설 <셔기 베인>의 작가 더글러스 스튜어트는 절망을 쪼개서 점묘화처럼 페이지 위에 가득 채워놓았다. 그렇게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수놓아진 고통의 충격적인 풍경을 나는 먼 산 보듯이 바라봐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책 위에 우뚝 솟아있는 흑색 광재의 산을 주인공 셔기와 함께 나는 계속 넘어야 할 것 같았다. 결코 멈추지 않고 제자리걸음 하는 인물들의 고통을 바라보는 일이 지치기도 했지만 나는 그 멍든 페이지들을 계속 넘길 수밖에 없었다. 알코올 중독자인 엄마와 그런 그녀를 보살피는 어린 아들의 연약한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독자인 나에게 강력한 힘을 행사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새로 시작되는 장에는 머리 위로 지나가는 새처럼 잠깐이라도 지나가는 한줄기 희망이 있을까 싶어, 나는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 되어, 그 새를 기다리며, 초조히 책을 넘겼다.


에스트라공: 멋진 경치로군, (블라디미르를 돌아보며) 자, 가자
블라디미르: 갈 순 없어
에스트라공: 왜?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사이) 여기가 확실하냐?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하지만 에스트라공이 여기가 확실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미 시들고 색이 바래 바닥에 떨어져 있는 꽃잎을 사람들은 가만두지 않고 발로 짓이겨 완전히 뭉개 놓았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셔기의 주변 사람들은 고통의 덫에 걸려 움쩍달싹 못하는 셔기와 가족들을 구해주기는 커녕 삽으로 큰 구덩이를 파서 그 안에 그들을 힘껏 밀어 넣어 흙으로 덮어 버린다. 그래서 결국엔 그들의 온몸이 어둠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세상은 약자를 잡아먹기 위해 굶주린 동물처럼 맹렬히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알코올 중독자인 셔기의 엄마 애그니스를 이용하는 빅 제임시를 비롯한 남자들과 이웃집 여자 진티 맥클린치, 겨우 술을 끊은 애그니스를 다시 진창에 빠지게 만드는 애인 유진. 셔기를 괴롭히는 학교와 이웃집 아이들, 그리고 늑대 같은 어느 택시 운전사. 셔기와 엄마의 현실이 더욱 안타까웠던 이유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조차 그들을 무시하고 더욱 포악하게 대했기 때문이었다. 소설 속 삶이 너무 피폐해서 독자가 책을 읽으며 희망을 품는 것,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사치이자 오만함처럼 느껴지게 하는 책은 <셔기 베인>이 처음이었다.  

  


내가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장을 덮자, 예상치 않은, 갑자기 나타난 손님처럼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한동안 닦아내야 했다. 책을 읽는 내내 이야기가 너무 생생해서 셔기가 가깝게 느껴졌는데 나는 도움을 줄 수 없고 계속 방관자로만 있어야 했다. 그것이 내 마음을 조금 힘들게 했었다. 385 페이지 중에 202 페이지가 되어서야 셔기의 삶에 겨우 희망의 단서가 조금 보였을 뿐이었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처럼 이 책이 그렇게 쓰라린 끝맺음을 보여 줄까 봐 마음이 내내 조마조마했다. 내가 셔기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나면 그는 다시 외롭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됐다. 하지만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내 눈물은 셔기에 대한 안쓰러움과 안도감으로부터 흘러나왔던 것 같다. 그리고 훌륭한 문학작품이 준 고요한 파장 때문이었다.       


소년은 멍하니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불안 증세처럼 배에서 이상한 느낌이 나서 도저히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숨이 턱턱 막히는 쓰라림이 아니라, 무언가가 노란 햇살처럼 방울방울 솟아올랐다. 속에서 미소가 터져 나왔다. 셔기는 커다란 정사각형 탁자에 드러누워 양말 신은 발을 올리고, 탁자가 환희로 반들반들 빛날 때까지 꼬리뼈를 대고 빙글빙글 돌았다.  <셔기 베인>, P202  

 

<셔기 베인>을 읽기 전까지 내게 독서는 고통을 잊기 위한 행위이지 고통을 보기 위한 것 아니었다. 그래서 크리스티앙 보뱅이 쓴 <작은 파티 드레스>의 어느 구절에서 위안을 받고자 책을 읽는 게 아니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내가 책을 읽는 건, 보기 위해서예요. 삶의 반짝이는 고통을, 현실에서보다 더 잘 보기 위해서예요. 위안을 받고자 책을 읽는 게 아닙니다. 난 위로받을 길 없는 사람이니까.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책을 읽는 것도 아니에요. 이해해야 할 건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책을 읽는 건 내 삶 속에서 괴로워하는 생명을 보기 위해섭니다. 그저 보려는 겁니다.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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