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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Apr 04. 2022

탈의실에서 생긴 일

질렀다.

시원하게는 아니고 약간 홀린 듯이 긴가민가하며 그냥 질렀다. 일주일치 장보는 금액보다 더 비싼 가격이었다. 이런 큰돈을 지출할 때는 왠지 평소보다 더 소심해져서 늘 그렇듯이 남편에게 제품 사진을 보내고 전화통화를 해서 상의를 한 후 구매가 이뤄진다. 남편은 돈 아끼지 말고 원하는 걸 사라고 해도 나는 그게 쉽지가 않다. 내가 벌어들이는 수입이 없어서인가 아님 최근 공과금 및 물가가 너무 올라서 그런 것인가? 환경보호 및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고자 하는 자기 검열 때문인가? 안 그래도 우유부단한데 돈 앞에서 특히 더 우유부단해지는 내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오랜만의 과다 지출이었지만 심사숙고의 과정을 거친 후 나는 재킷 한벌과 셔츠 하나를 구입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봄에 입을만한 옷이 없었다. 내게 있는 적당히 두툼한 봄옷은 무거워서 입기 불편해 옷장에 처박혀 있는 15년 된 자라 재킷과 집 앞 공원 나가기 좋은 모양새의 모자 달린 쥴스라는 영국 브랜드의 남색 점퍼밖에 없었다. 공연을 보러 갈 때나 좀 격식을 차려야 할 때 스포티한 그 점퍼를 입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이건 다 핑계고 내가 가끔 눈여겨보던 영국 디자이너 브랜드 M이 샘플 세일을 했다. 세계 4대 패션 도시 런던 보유국이라 그런지 아님 지속적인 불황 때문인지 영국에서 세일을 자주 한다. 그런데 그중에서 샘플세일은 브랜드들이 어쩌다가 한번 큰맘 먹고 진짜 싸게 해 줄 테니(최고 정가의 80%까지) 이 기회를 붙잡으라며 소비자에게 덥석 월척을 안겨주는 그런 느낌의, 일종의 횡재 세일이라고 할 수 있다. 런던에 샘플 세일만을 위해 빈 공간을 운영하는 곳이 따로 있어서 업체들은 그 공간을 일 년 중 하루나 이틀 임대해서 많은 물량의 물건을 한꺼번에 쫘악 풀어놓는다.


내가 욕구불만이 생겼을 때 종종 인터넷으로 살펴보던 M 브랜드는 평소 가격이 후덜덜해서 말 그대로 구경만 했었다. 지적인 느낌의 무채색의 미니멀한 옷들과 예술적인 느낌이 나는 마케팅이 좋았다. 그리고 디자이너의 철학까지 모든 게 다 힙해 보였다. 그래서 80%까지 세일하는 품목이 있다는 샘플세일 소식을 듣고는 드디어 이번엔 나도 힙스터 옷을 내 옷장에 구비해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여기까지는 지출에 대한 죄책감에 면죄부를 주기 위한 자기 합리화를 위한 글이었고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이다.


둘째 날이라서 물건이 많이 빠졌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세일 행사장에는 괜찮은 물건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신발을 포함해 여섯 개 정도의 옷을 일단 골라 들고 간이 탈의실로 향했다. 그런데 탈의실을 이용하기 위해 줄을 선 내 바로 뒤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행사장은 텅 빈 공간만 제공하기 때문에 업체에서는 한 면만 탈의실용 커튼을 친 사각의 빈 공간에 사람들을 모두 몰아넣고 대중목욕탕 탈의실처럼 사용하게 했다. 칸막이는 없고 1인당 옷을 놓을 접이식 의자 하나랑 거울 하나가 주어졌다. 그런데  남자가 이 여자 탈의실을 이용하려고 내 뒤에 줄을 선 것이었다. 여자 직원이 내 뒤그 남자에게 남자 탈의실은 다른 쪽에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그는 "나는 스커트를 입어 볼거야"라고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당당하게 말하며 꿈쩍도 안 했다. 그와 직원 사이에 몇 마디가 오가고, 마지막에 "네가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하렴" 하고 직원이 그에게 말했다. '뭐지? 이 시추에이션은?' 그들의 대화가 끝나고 그제야 직원과 나 모두 그가 영국 예술가 그레이슨 패리처럼 여장을 하는 남자라고 인정한 것 같다. 목소리를 비롯해 생물학적으로 남자인 것 같았지만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고집을 부린 이 자에게 과격한 느낌은 없었다. 체격도 남자치곤 아담해 보였다. 잠시 후 그 직원이 그에게 다시 돌아왔다. 네가 원해도 다른 사람들이 불편을 느낄 수 있으니 함께 여자 탈의실을 사용하는 고객들에게 동의를 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를 배려하듯이 그 직원은 다른 요구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라고 말했다.


내 차례가 되어 나는 탈의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직원은 그가 들어오기 전에, 옷을 입고 벗느라 분주한 고객들에게, 이러저러해서 그가 탈의실을 이용할 건데 괜찮냐고 동의를 구했다. 아무도 대답이 없고 반대하는 자도 없었다. 탈의실 이용자들은 옷을 입고 구매 여부를 확정 짓기 위해 신중하고 매서운 눈으로 옷매무새를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모습은 심지어 비장하기까지 했다. '헐' 지금 나 혼자만 당황하는 것이지 싶었다. 하지만 나도 그곳에서 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어쨌든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탈의실 에서 사람들이 줄 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복을 입고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상의부터 입어보기 시작했고, 그 사이 스커트를 들고 그가 등장했다. 탈의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다들 지나치게 쿨했고 본인들의 임무를 수행하느라 바빴다. 아무도 그를 정신병자 취급하거나 불편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 옆에 있던 40대 후반에서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영국 여성은 그와 명랑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옷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칭찬하는 것 같았다. 그 소리에 나는 곁눈질로 M 브랜드를 착장한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웬일! 검은색 미디 치마와 검은색 셔츠는 우아하고 고급스럽게 그의 몸 위에서 빛났다. 사실 탈의실 고객들 모두에게 M브랜드는 잘 어울렸다. 아마 그것이 M브랜드의 힘이었을지도 모르다. 어쨌든 자신의 뜻대로 탈의실을 이용한 그는 만족하며 그곳을 떠났다.


한국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직원이 강경하게 안된다고 남자 탈의실을 이용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여자 고객들은 눈에서 레이저를 뿜어내거나 표정이든 말로든 어떤 형태로든 불만과 우려를 표했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가 몰래 탈의하는 여성을 촬영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남자 탈의실도 이용하지 않고 스커트를 두고 그 자리를 황급히 떠나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모르게 영국 문화에 적응한 것인지 한국인인 나는 황당했지만 내가 겪은 이 상황이 많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다만 한국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면 나는 또 다르게 반응했을지도 모른다.

25년 전쯤, 고등학교 때, 지하철 역 앞에 있던 맥도널드 건물 여자 화장실에 다녀왔던 친구가 몰래카메라가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그 이후로 나는 어딜 가든 화장실을 이용할 때 화장실 문이나 칸막이 벽을 유심히 살펴봤던 것 같다. 대학교 때는 밤에 혼자 택시 타는 것이 편안하지 않았다. 나 혼자 탈 줄 알았던 엘리베이터에 남자가 타면 조금 더 긴장했다. 여자로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긴장감을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이제는 중년 여성이 되니 예전보다는 조금 덜 불안해하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영국에서의 나는 스커트를 여자 탈의실에서 입어보겠다는 남자를 내치지 않는 여유를 보일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 BBC가 방영한 다큐멘터리에서 러시아의 길거리에서 성소수자가 뭇매를 맞고 탄압받던 장면도 떠올랐다. 혼란스러웠지만, 그가 여자 탈의실을 남자 탈의실보다 더 안전하게 느끼는 것 같아서 나는 나의 불편을 조금 감수했던 것 같다.  

                   

매년 6월은 성소수자 인권의 달이다. 영국의 슈퍼마켓은 홈페이지를 비롯해 상점에 성소수자의 상징인 무지개마크를 눈에 띄게 표시할 정도로 대대적으로 마케팅에 활용한다. 작년 6월,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은 성소수자의 업적을 기리며 그들을 다우닝가에 초대해 환영하는 리셉션 행사를 주최했다. 이들의 속내는 어쩔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각자의 삶을 존중하고 보호해주려는 분위기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누구나 다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걸 알아준다는 의미이기에 나는 이곳 영국에서 예전보다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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