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도 해도 부족하지 않은 것
<H마트에서 울다>를 읽고
해도 해도 부족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나에게는 '애도'가 그런 것 같다. 지금은 없어진 존재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일 말이다.
나의 브런치 글이 유난히 죽음과 상실과 관련된 내용들로 많이 채워져 있다는 걸 누군가는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최근 몇 년간 내 삶에서 죽음과 상실이 이토록 가까웠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40대인 내 또래의 사람들과 나이 드신 노인들의 죽음이 삶이란 고속도로 위를 교차하며 지나다녔다. 익숙한 이름들이 계속 사라졌기에 나는 어디에라도 그 상실감을 담아냈어야 했다. 죽음은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단순한 사건들이 아니었고, 상실은 다른 대상이 대신 메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감정은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기도 어려워, 나 자신과 내가 그저 오롯이 겪어나가야 할 일이었다.
어떤 죽음은 준비가 됐었고 어떤 죽음은 너무 갑작스러웠고, 때로는 반복되는 상실을 나는 좀 더 용기 있게 대면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슬픔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움이 섞인 슬픔은 옷 안에 감쳐줘 있다가, 아주 사소하고 예상치 못한 것들로 인해 불쑥 튀어나온다. 일상이라는 음식을 먹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슬픔을 어딘가에 흘리고 묻히게 되었다. 그게 아니라면 슬픔은 나라는 음식에 은근히 배어있는 양념이 되어버린 것도 같다.
나는 자연스럽게 나만의 애도 방식을 찾았는데 애도에 관련된 책을 찾아보는 것도 그중 하나다. 나처럼 상실을 겪은 작가들의 경험을 통해 위로도 받고, 비슷한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해받는 느낌이 들어 기쁠 때가 있다. 그리고 나 또한 죽은 이들을 언젠가 책 속에서 살려내고 싶고, 그것이 왠지 애도의 종결점이 될 거 같다는 막연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 종이 위에 차곡차곡 새겨놓은 마음은 그렇게 인쇄된 글자처럼 웬만하면 사라지지 않을 터이니.
최근 미셸자우너의 에세이집 <H마트에서 울다>를 읽었다.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미셸자우너는 이 책에 상실과 애도를 담아냈다.
작가가 사는 미국에 80개 이상의 매장을 둔 H마트는 영국에서 내가 한국 쌀과 잡곡, 그리고 떡볶이 재료를 사러 가는 '한아름'이라는 뜻을 가진 한국 마트이다. 나는 주로 영국의 한인 타운이라 불리는 뉴몰든의 대형 H마트를 이용한다. 이곳은 다른 아시아 음식 재료뿐만 아니라 냉동 순대를 비롯해 직접 만든 밑반찬과 떡도 팔 정도로 웬만한 한국 식재료를 모두 구비하고 있다. H마트는 해외에 사는 이방인들이 음식을 통해 잠시나마 자신의 고향을 느끼고 정체성의 뿌리를 확인하는 공간이다. 한국이 그리울 때면 한국음식으로 향수병을 달래고, 정서적 허기를 채웠던 나에게 H마트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나는 H마트에만 가면 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첫 장부터 나를 울렸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작가의 문장에 배어있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이 내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책 속에서 그녀와 엄마가 함께 나눠먹던 사랑이라는 음식의 정겨운 냄새가 풍겨져 나오는 것 같았다.
미셸자우너는 갑작스러운 암투병으로 돌아가신 엄마를 그리워하며 H마트에서 장을 본다. 그곳에서 사 온 식재료로 엄마의 한국 음식을 재현하며 엄마와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되새긴다. 그곳에서 쇼핑하는 한국인 가족을 보며, 한국 음식을 먹는 방식과 음식으로 상대방을 챙겨주는 한국적인 태도 등을 목격하며 그녀는 자연스럽게 엄마를 떠올린다. 결국 엄마를 향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미셸자우너는 자신의 록 음반에도 책에도 엄마를 담아낸다. 그것도 너무 감상적이거나 우울하거나 담담하지 않게, 마치 음식이 익을 수 있는 딱 알맞은 온도의 끓는점처럼 아주 적절한 톤으로 표현해낸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딱 알맞은 방식으로 완벽한 애도를 보여준다.
가난한 인디밴드의 삶을 이어가던 작가는 음악을 포기하려 했었다. 하지만 엄마의 죽음 이후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라는 밴드명으로 발매한 음반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예술로 승화시킨 엄마에 대한 사랑과 애도는 대중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켜서, 이제 그녀는 실력 있는 음악인으로도 베스트셀러 작가로서도 최고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그녀는 <H마트에서 울다>의 영화화를 위해 시나리오를 집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돌아가신 그녀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막내 이모와 엄마가 하늘나라에서 그녀에게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는 것 같았다. 그걸 보며 죽은 이들이 단지 우리 곁을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든든한 조력자로 우리 곁에 남아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H마트에서 울다>는 상실을 겪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좀 더 슬퍼해도 된다고 슬픔을 밖으로 꺼내도 된다고 용기를 주는 책이었다. 관계의 영속성을 믿으며, 떠났지만 결코 떠나지 않은 존재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라고 힘을 주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그들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