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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Oct 10. 2022

 여인들의 모습

오랜만에 런던 시내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거리에 스산한 가을바람이 불었다.  어딘가에 잔뜩 갈증이 나 있던 나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갤러리로 향했다.

영국의 유명 상업화랑인 빅토리아 미로( Victoria Miro)에서 그림의 중심에 여성이 있는 <The Story of Art as it 's Still Being Witten>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영국 예술계는 최근 몇 년간 여성 화가 아니면 흑인 예술가의 작품을 갤러리에서 자주 선보이는 것 같다. 백인 남성 위주의 예술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계속 이어지는 분위기다.

샹탈 조페, <Prom>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에 들어와 제일 처음 눈에 띈 건, 강렬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었다. 그림 속의 그녀는 파티의 주최자처럼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파티고 뭐고 다 귀찮다는 듯이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 있다. 영국 화가 샹탈 조페(Chantal Joffe)의 작품 <Prom>으로 자신의 사춘기 십 대 딸을 그렸다. 꾸미지 않아도 찬란한 아름다움을 품는 시절을 상징하는 듯한 붉은빛 드레스, 소녀의 반항적인 표정 모두 강렬하다.


샹탈 조페의 초상화 속 주인공들은 종종 뾰루뚱하거나 무표정한 얼굴을 하는데 바로 그런 인간적인 모습들 때문에 더 친밀하게 느껴진다. 성의 없는 듯한 무심한 붓터치는 표정으로 드러난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좌) 트레이시 에민, Rip my heart out You Fucking Cunt, 우)플로라 유크노비치, Watch out boy she'll chew you up


갤러리 2층에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90년대 생으로 44억에 작품이 팔렸다던 요즘 미술계의 신데렐라 플로라 유크노비치(Flora Yukhnovich) 등 쟁쟁한 영국 화가의 작품들이 포진해있었다.

셀리아 폴, <overshadowed>


그러나 그중에 내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은 따로 있었다. 잠잘 때 입을 것 같은 단출한 홈드레스에 불이 붙은 듯한 여인의 초상, 셀리아 폴의 <overshadowed> 작품이다. 작품의 제목처럼 우울한 기운이 가득하다. 혼이 타들어가는 것인지 육체가 소멸한 유령이 되어가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되는 여인의 모습에 괜히 마음이 아린다. 오래된 벽화 속에 파묻힌 듯한 너덜너덜한 모습, 여인의 영혼이 허공을 헤매는 걸 묘사하는 듯한 붓터치가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유명한 정신의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인 루시안 프로이트와 스승과 제자로 만나 오랜 불륜 관계를 맺고 아들까지 낳았다. 이 작품 속 여인은 셀리아 폴 자신이다. 이 그림을 그릴 때 화가는 루시안 프로이트를 먼저 그렸다고 했다. 그리고 순종적으로 앉아있는 그녀 자신을 그렸다고 했는데 나중에 루시안 프로이트를 지우고 그림자로 남겨두어 지금의 작품으로 탄생시켰다고 한다.  루시안 프로이트의 애인으로 알려지기보다는 자신의 예술작품으로 알려지기를 소망했던 그녀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셀리아 폴은 자신을 초상화가라기보다 자서전 작가로 불렀다. 인물의 삶을 드러내는 그림을 그린다는 점, 자신의 엄마와 자매 등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서 그렇다.  

 빅토리아 미로에서 마주한 여성들의 모습은 어딘가 불만이 있고 멜랑꼴리한 느낌을 주었다. 거리에서 행진하는 게 아니라 작품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위를 하는 것 같다.


빅토리아 미로를 나서며 뭔가 아쉬운 마음에 나는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국의 유명 쇼핑가인 본드 스트릿 근처의 월리스 컬렉션(Wallace Collection)이었다. 이전에 아이와 함께 대충 둘러본 적 밖에 없어 이번에 혼자 찬찬히 그림을 보게 되었다.    

월리스 컬렉션에서 만난 여인들의 모습은 빅토리아 미로의 그녀들과 좀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옛날 여인들이어서 그런지 일상에 순응하는 듯 보였다.

네덜란드 화가 Esaias Boursse의 그림 <A Woman Cooking>, 어수선하게 쌓여있는 침구들을 뒤로하고 아기는 곤히 자고 있고, 한쪽에서 여인은 요리를 하고 있다. 쌓여있는 할 일과 티 안 나는 집안일로 여인은 피로감을 느끼는 것 같다. 그렇지만 삶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일상이지 않겠냐며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 같다.

허트퍼드 후작 집안이 18-19세기 수집한 작품들로 가득한 월리스 컬렉션에서는 램브란트를 비롯한 유명화가들의 작품과 볼거리가 많았다. 남성들이 숲에 앉아 여성의 가슴을 만지고 유흥을 즐기는 모습을 그린 그림들이 자주 눈에 띄기도 했다. 하지만 레이스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화병에 물을 주고, 편지를 읽는 여인들도 만날 수 있었다. 혼자 집안일이 아닌 무언가에 열중하는 여인을 그린 그림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그림으로 마주친 여성들을 통해 나는 내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경험하고 느끼는 여러 순간들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그녀들을 이해했고, 그녀들 또한 이미 내 마음을 다 읽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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