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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가장 Jan 01. 2022

반환점

새해 첫날, 반환점을 돌다

"과연 내가 완주할 수 있을까?"

출발선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내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괜히 엄지발가락을 꼼지락거려보기도 하고, 손에 난 땀을 닦아 보기도 했다. 올림픽에라도 나간 선수처럼 제자리 뛰기도 해 보고, 머리를 좌우로 털 어보며 긴장을 풀어보려 애를 썼다. 출발 신호가 임박할수록 이상하게도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할 수 있을까?'만 자꾸 떠 올랐다. 그렇다. 나는 지금 내 인생 최대의 도전 앞에 서 있다. 나는 지금 5km 건강마라톤 출발선에 있다.




아이라는 축복은 부모의 헌신이 받쳐줄 때만 가능한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일은 더 바빠졌고, 아내의 짜증은 늘어만 갔다. 반복되는 야근과 육아. 이미 체력은 바닥을 지나 지하층을 뚫고 내려가고 있었다. 잠은 늘 부족했고, 피곤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거대한 파도에 부유하는 부표처럼 떠밀리듯 살고 있었다. 무력한 가장의 모습이 싫었다. 활력을 갖고 싶었다. 지켜야 할 사람이 하나 더 생겼으니, 더 강해져야만 했다. 달리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다. 5km 정도는 우습게 완주할 것 같았다. 운동화부터 새로 샀다. 당당하게 밖을 나선 첫날, 나는 1분도 채 달리지 못하고 길가에 구겨진 채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분명, 건강해보겠다고 시작한 달리기인데, 달리기를 더 하다가는 정말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길가에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봤다. 다들 참 잘도 달린다.


한참 동안 쉬고 난 뒤에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한심한 자신을 욕하며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고된 운동(?)과 그걸 견뎌내지 못한 자괴감이 한데 뒤섞여 고통스러웠다.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왔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열 걸음 정도 다시 달려보기도 했다. 헛구역질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그 수준에 다다를 것 같으면 재빨리 달리기를 멈추고 걸어갔다. 그렇게 걷고 달리는 것을 것을 반복했다. 어느새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생각했다. '굳이 전부를 달릴 필요는 없잖아?' 그렇다. 멈추지만 않는다면, 조금 늦더라도 분명 5km를 완주할 수 있을 것이다. 멈추지만 않는다면, 시간은 언제나 내편이기 때문이다.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걷고 달리는 것을 반복하며, 조금씩 달리는 거리를 늘려나갔다. 조금씩 달리는 시간을 늘려나갔다. 또다시 헛구역질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무리하는 선에서 아주 작은 도전과 성취를 반복했다. 컨디션에 따라 전날보다 못한 날도 있었다. 상관하지 않았다. 오늘도 달리기를 시작했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새로 산 신발이 낡아지는 걸 보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숨이 찰 때까지 달리다가 더 못 달릴 것 같으면 멈췄다. 그리고 지점에서 미련 없이 뒤로 돌았다. 바로 그 지점이 그날의 반환점이다. 반환점까지 달려왔다면 그날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이제 남은 구간은 걸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걷기와 달리기를 반복하며 조금씩 반환점을 밀어냈다. 출발할 때 욕심을 부리는 날에는 멀리 달리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그때쯤이었다. 출발할 때는 일부러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반환점은 점점 멀어져 갔다. 반환점이 3km가 되었던 날, 그날은 처음으로 5km 정도를 달려본 것 같다. 숨은 턱까지 차올랐고, 땀은 흘러내렸지만, 오히려 가슴속은 뿌듯함으로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눈물을 훔쳤다. 자꾸만 땀이 눈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렇다. 땀 때문이다. 감동했기 때문에 조금 울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난히 맑은 날이었다. 마라톤 대회장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마라토너들이 이렇게 많은 줄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도전한 종목은 '5km 건강 달리기'였다. 긴장한 탓에 페이스를 놓쳤다. 앞사람을 따라가느라 초반부터 너무 빨리 달린 탓이다. 나는 그대로 잠시 멈췄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그때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반환점까지만 달려보자. 나머지는 걸어와도 되니까.'


하지만, 다짐만으로는 쉽지 않았다. 대회는 혼자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앞질러 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눈앞에 뻔히 보였다. 마음과 달리 눈은 그들을 바라봤고, 무거워지는 다리가 야속하기만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숨이 찼다. 그러는 사이 반환점을 통과했다. 순간 부담이 줄어들었다. 이제부터 걸어도 된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렇지만, 나는 계속 달렸다. 걷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잠시 속도를 늦춰서 달리기를 계속했다. 천천히 출발하는 연습을 통해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 둔 덕분이었다.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그렇게 5km를 '완주'했다. 반환점이 없었다면, 부담을 내려놓지 않았다면, 내가 어디쯤 달리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면, 아마도 완주하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작년부터 영어와 독서, 그리고 운동을 새롭게 시작했다. 거창한 목표는 없었다. 겨우 1년으로 영어가 유창해질 리도 없을 테고, 책 몇 권 읽었다고 해서 삶이 바뀔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달리기 몇 번 했다고 몸짱을 바라는 건 욕심이다. 물론, 그 모든 소망을 이루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다. 그저 오늘 하루, 단어 하나라도 외우기를, 책 한 페이지라도 읽기를, 조금이라도 걷거나 달려보기를 바랄 뿐이었다. 비록 그날의 목표를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시도했다면 이미 반환점을 향해 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 반환점을 조금 더 밀어낼 수만 있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정한 목표는 보잘것없이 작다. 그저 지속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습관의 체인이 끊어지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믿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정말로 바쁜 날도 있고, 정말로 정신없이 지나가는 하루도 있었다. 정말이다. 그럴 때면, 출발선 앞에 섰더 그날을 떠올린다. '과연 완주할 수 있을까?' 하며 자신을 의심했던 그때를, 그리고 멋지게 해냈던 그날의 성공을 말이다. 그날의 나는 오늘의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그 의심,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부담이 얼마나 부질없는 걱정인지는 일단 시작해 보면 알게 될 것이라고, 시작하는 순간 너는 이미 반환점을 통과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이다.


오늘은 2022년 첫날이다. 처음은 언제나 설레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설렘 뒤에 부담이 숨어있다. 잘 보이지 않을 뿐, 설렘과 부담은 늘 함께 다니는 것 같다. 무언가 하고 싶다는 말은 '지금은 하기 어렵지만, 언젠가 꼭 해내고 싶다는 바람'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이 부담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시작을 망설이는 자신을 자책할 필요는 없다. 만약, 새로운 시작에 설렘보다 부담이 더 크게 보인다면, 그럴 때는 시작하는 순간 이미 반환점을 통과한 것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부담이 아닌 믿음과 함께 말이다. 새로운 시작에는 부담이 아니라 믿음이 필요하다. 새해의 첫날의 설렘은 부담이 아니라 지금까지 잘해왔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할 것이라는 믿음이 그 곁을 지켜줘야 한다.


짧지 않은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낸 당신, 나는 오늘 당신이 무엇을 다짐했는지 알 수 없다. 당신이 무엇을 새롭게 시작하려는지, 그리고 왜 망설이는지 조차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무엇이든 그 시작에서 부담이 아닌 설렘만 챙겨갔으면 한다. 이왕이면 할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말이다. 시작하는 순간이 이미 반환점이고, 그 반환점을 그저 조금씩 밀어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같은 길도 방향에 따라 달리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까지 힘들었을 수도 있다. 각고의 노력으로 반환점에 도착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되돌아가는 길은, 뜻밖에 편안한 여정이 될 수도 있다. 새해 첫 날을 새로운 시작으로 여겨, 초반부터 전력 질주하기보다는, 또 다른 반환점으로 여기는 것은 어떨까? 돌아오는 길은 해오던 대로만 해도 되고, 힘이 든다면, 조금은 쉬어가도 좋다고 자신을 다독여 주면서 말이다. 새해 첫날부터 너무 몰아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초반에 너무 힘을 빼면 완주하는 게 훨씬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 멈추지 않는다면, 꾸준히 지속하기만 한다면, 시간은 언제나 당신 편일 것이다. 새해 첫날, 나는 당신을 응원한다. 그리고 또한 내년의 나를 응원한다.


이제 첫 질문에 답을 해야겠다. "과연 완주할 수 있을까?"

"물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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